태종
(太宗)께서 영락 원년(元年, 1403)에 좌우 신하에게 말씀하셨다. “정치는 반드시 여러 책을 널리 보아야 한다. 하지만 우리나라는 해외(海外)에 있어 중국의 책이 잘 들어오지 않는다. 판각으로 만든다 해도 또 쉽게 깎여 없어질 뿐 아니라, 천하의 책을 다 새기기 어렵다. 내가 구리로 활자를 만들어 필요한 때에 책을 찍어 내어 널리 퍼뜨리면 큰 도움이 될 것이다” 드디어 고주(古註) 『시경(詩經)』, 『서경(書經)』와 좌씨전의 글자를 써서 활자를 만들게 된 만들게 된 계기이며 이를 정해자(丁亥字)라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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또 세종
(世宗)께서 활자를 주조한 글자가 크고 바르지 못해서 경자년(庚子年, 1420)에 다시 활자를 주조하니 그 모양이 작고 바르게 되었다. 이로 인해 인쇄하지 않은 책이 없었다. 이것을 경자자(庚子字)라 했다. 갑인년(甲寅年, 1434)에도 또 『위선음즐(爲善陰騭)
(世祖)에게 명해 강목(綱目)의 큰 글자를 쓰게 하시니 세조
는 당시 수양대군
이었다. 세조는 구리를 부어 글자를 만들어 이로서 강목을 인쇄하니 곧 지금의 훈의(訓義)다. 임신년(壬申年, 1452)에 문종
(文宗)께서 안평대군
에게 다시 경자자를 녹여서 쓰게 하시니 이것이 임자자(壬子字)다. 을해년(乙亥年, 1455)에 세조
(世祖)께서 강희안
(姜希顔)에게 명해 임신자를 주조해 쓰게 하시니 이것이 을해자(乙亥字)다. 지금까지도 이를 쓰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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명 황제가 세종에게 하사한 전 6백권 도서로 갑인자를 만들 때 참고한 명나라 초기 판본 도서 중 하나
』의 글자를 본떠서 활자를 만들었는데, 경자자에 비하면 조금 크고 자체가 아주 좋았다. 또 세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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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뒤 을유년(乙酉年, 1465)에 원각경(圓覺經)을 인쇄하려고 해서 정난종(鄭蘭宗)에게 명해 쓰게 했는데, 글자체가 고르지 못했다. 이를 을유자(乙酉字)라 했다. 성종
(成宗)께서 신묘년(辛卯年, 1471)에 왕형공(王荊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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송대의 정치가이자 개혁가인 왕안석(王安石)
의 『구양공집』 글자를 사용해 활자를 만드니 그 체가 경자자보다 작고 더욱 정묘하였는데 신묘자(辛卯字)라 했다. 또 중국의 신판 강목자를 얻어 활자를 만드니 이를 계축자(癸丑字)라 했다. 활자를 만드는 법은 먼저 황양목을 써서 글자를 새기고, 바닷가 갯벌의 부드러운 진흙을 평평하게 인판에다 폈다가 목각(木刻)자를 진흙 속에 인착하면 찍힌 곳이 움푹 들어가서 활자가 되니, 이때에 두 인판을 합하고 녹은 구리를 한 구멍으로 쏟아 부어 글자가 되면 이를 깎고 또 깎아서 정제한다. 나무에 새기는 사람을 각자(刻字)라 하고, 주조하는 사람을 주장(躊匠)이라 한다. 드디어 여러 글자를 나누어서 궤에 저장하는데 활자를 지키는 사람을 수장(守藏)이라 한다. 나이 어린 공노(公奴)가 이 일을 했다. 그 서초(書草)를 부르는 사람을 창준(唱准)이라 했으며, 모두 글을 아는 사람이 이 일을 했다. 수장이 글자를 서초 위에 벌려 놓고 판에 옮기는 것을 상판(上板)이라 하고, 대나무 조각으로 빈 데를 메워 단단하게 하여 움직이지 않게 하는 사람을 균자장(均字匠)이라 했다. 그것을 받아다 인쇄하는 사람을 인출장(印出匠)이라 했다. 감인관(監印官)은 교서관원(校書館員)이 맡았고 감교관(監校官)은 따로 문신 중에서 임명한다. 처음에는 활자를 벌려 놓는 법을 몰라서 납을 판에 녹여서 글자를 붙였다. 이런 까닭으로 경자자는 끝이 모두 송곳 같았는데, 그 뒤에 비로소 대나무로 빈 데를 메우는 재주를 써서 납을 녹이는 비용을 없앴으니, 비로소 사람의 지혜란 무궁함을 알게 되었다.
『대동야승』권2, 「용재총화」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