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학십도(聖學十圖)」를 올리는 차자(箚子)
판중추부사(判中樞府事) 신 이황
은 삼가 두 번 절하고 말씀을 올립니다. 생각하옵건데 도(道)는 형상(形象)이 없고 하늘은 말이 없으나, 「하도(河圖)」1)
와 「낙서(洛書)」2)
가 나오고서 성인이 이것을 근거로 하여 『주역(周易)』의 괘효(卦爻)를 만들면서 도가 비로소 천하에 드러나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도는 넓고 크니 어느 곳을 먼저 손대야 하며, 옛 성현의 가르침은 천만 가지인데 어디서부터 따라 들어가야 하겠습니까? 성학(聖學)에는 강령(綱領)이 있고 심법(心法)에는 지극한 요체가 있으니, 이것을 들어 도(圖)를 만들고 이것을 가리켜 해설을 붙임으로써 사람들에게 도에 들어가는 문과 덕을 쌓는 기반이 무엇인지 보여 주는 것은, 이 또한 후현(後賢)들이 부득이하여 만들게 된 것입니다.
'이황' 관련자료
1)
「하도(河圖)」 : 복희씨(伏羲氏) 때 하수(河水), 즉 황하(黃河)에서 용마(龍馬)가 등에 지고 나왔다는 그림으로, 복희씨가 그것을 보고 『역(易)』의 팔괘(八卦)를 만들었다고 한다.
2)
「낙서(洛書)」 : 하(夏)나라 우(禹) 임금 때 낙수(洛水)에서 거북이 등에 지고 나왔다는 글로서, 우임금은 그것을 보고 천하를 다스리는 대법(大法)인 『홍범구주(洪範九疇)』를 만들었다고 한다.
하물며 임금의 마음은 온갖 일이 말미암는 곳이며 모든 책임이 모이는 곳이며, 온갖 욕심이 서로 공격하고 온갖 간사함이 번갈아 뚫고 들어오는 곳이니, 조금이라도 태만하고 소홀하여 방종함이 따르게 되면 산이 무너지고 바다가 넘치는 것처럼 걷잡을 수 없을 것입니다. 이렇게 되면 이것을 누가 막을 수 있겠습니까?
옛날의 성군(聖君)과 현명한 왕들은 이런 점을 근심하였습니다. 이 때문에 항상 조심하고 공경하며 두려워하기를 날마다 하면서도 오히려 부족하게 여겼던 것입니다. 그리하여 사(師)·부(傅)라는 관직을 세우고 간쟁
(諫諍)을 맡은 직책을 두었으니, 앞에는 의(疑)가 있었고 뒤에는 승(丞)이 있었으며, 왼쪽에는 보(輔)가 있었고 오른쪽에는 필(弼)이 있었습니다.3)
수레를 타고 있을 때는 여분(旅賁)4)
의 경계함이 있었고, 조정에 있을 때는 관사(官師)의 법도가 있었으며, 안석에 기대고 있을 때는 악관(樂官)이 외우는 간언(諫言)이 있었고, 침소에는 설어(暬御)5)
들의 잠(箴)이 있으며, 일에 당면할 때는 고사(瞽史)6)
들의 인도(引導)가 있었고, 편안히 쉴 때는 공사(工師)들의 노래가 있었으니, 세숫대야와 밥그릇ㆍ책상ㆍ지팡이ㆍ칼ㆍ들창문 등 무릇 눈이 가는 곳과 몸이 처하는 곳이라면 어디든지 훈계를 새겨 놓지 않은 곳이 없었습니다. 마음을 유지하고 몸을 지키는 것이 이와 같이 지극하였으므로 덕이 날로 새롭고 사업이 날로 넓어져서 작은 허물도 없고 커다란 명성이 있을 수 있었던 것입니다.
'간쟁' 관련자료
3)
앞에는 의(疑)가 있고 뒤에는 승(丞)이 있으며, 왼쪽에는 보(輔)가 있고 오른쪽에는 필(弼)이 있으며 : 네 가지 모두 천자를 전후좌우에서 보필하는 관직의 이름이다. 한나라 때 복생이 『상서』를 전수하고 주석을 붙여 펴낸 『상서대전(尙書大傳)』(금문상서)에서는 “옛날에 천자는 반드시 전후좌우 네 호위가 있어서, 앞에 서는 이를 의(疑), 뒤에 서는 이를 승(丞), 왼쪽에 서는 이를 보(輔), 오른 쪽에 서는 이를 필(弼)이라 하였다(古者 天子必有四鄰, 前曰疑, 後曰丞, 左曰輔, 右曰弼)”고 되어 있다.
4)
여분(旅賁) : 고대 관직 이름으로 천자와 제후가 출입할 때 창을 잡고 호위하는 직책.
5)
설어(暬御) : 임금을 가까이 모시는 신하[近臣]이다.
6)
고사(瞽史) : 주(周) 나라 관직 이름으로 고(瞽)는 악사(樂師)로서 음악을 담당하고, 사(史)는 태사(太史)와 소사(小史)로서 음양, 천문, 예악을 담당하였다.
후세의 임금들도 천명(天命)을 받아 왕위에 올랐으니 그 책임이 지극히 중하고 지극히 큼이 어느 정도이겠습니까? 스스로 몸과 마음을 다스리는 도구가 이같이 엄격한 것이 하나도 없었습니다. 그러니 그들이 왕공(王公)과 수많은 백성들의 추대에 들떠서 버젓이 성인처럼 굴며 오만하게 멋대로 하여, 결국 난이 일어나고 멸망하는 데로 돌아가는 것이 어찌 괴이한 일이겠습니까? 그러므로 이러한 때에 신하가 된 사람으로 임금을 도에 맞게 인도하려고 했던 자들은 진실로 그 마음을 다하지 않음이 없었습니다. 장구령(張九齡)7)
이 『금감록(金鑑錄)』을 바친 것, 송경(宋璟)8)
이 「무일도(無逸圖)」를 바친 것, 이덕유(李德裕)9)
가 「단의육잠(丹扆六箴)」을 바친 것, 진덕수(眞德秀)가 「빈풍칠월도(豳風七月圖)」를 올린 것10)
같은 등은, 모두 임금을 사랑하고 나라를 근심하는 깊은 충의와 선을 베풀고 가르침이 될만한 내용을 바치려는 간절한 뜻이니, 임금으로서 깊이 유념하고 공경히 마음에 담아 두지 않아서야 되겠습니까?
7)
장구령(張九齡)과 『금감록(金鑑錄)』 : 장구령(673~740)은 당(唐)나라 현종(玄宗) 때의 재상이다. 저서에는 『곡강선생문집(曲江先生文集)』이 있다. 당시 황제의 생일에는 신하들이 거울을 바쳐서 축하하는 관례가 있었는데, 장구령은 『춘추금감록(千秋金鑑錄)』이란 책을 지어 올렸다. 이 책은 역대 정치의 잘잘못을 기록한 것으로 이것을 보고 황제가 정치의 거울로 삼도록 하기 위한 의도였다.
8)
송경(宋璟)과 「무일도(無逸圖)」 : 송경(663~737)은 당 현종 때 재상으로 그는 주공(周公)이 성왕(成王)을 위해 지은 이 내용을 그림(도)으로 만들어 현종에게 바쳤다. 그 내용은 안일하지 말라는 것이었다.
9)
이덕유(李德裕)와 「단의육잠(丹扆六箴)」 : 이덕유(787~849)는 당나라 재상으로, 「단의육잠(丹扆六箴)」을 지어 경종(敬宗)에게 바쳤다. 단의(丹扆)는 천자가 제후를 대할 때 뒤에 세우는 붉은 병풍이며, 육잠(六箴))은 「소의잠(宵衣箴)」·「정복잠(正服箴)」·「파헌잠(罷獻箴)」·「납회잠(納誨箴)」·「변사잠(辨邪箴)」·「방미잠(防微箴)」이다.
10)
진덕수(眞德秀)가 「빈풍칠월도(豳風七月圖)」를 올린 것 : 진덕수(1178~1235)는 남송(南宋) 대의 주자학자이다. 호는 서산(西山), 시호는 문충(文忠). 저서로 『대학연의(大學衍義))』,『독서기(讀書記)』,『서산문집(西山文集)』 등이 있다. 「빈풍칠월도(豳風七月圖)」는 『시경(詩經)』 「빈풍(豳風)」 가운데 제1편인 「칠월(七月)」을 그림으로 그린 것을 말한다. 「빈풍(豳」은 주(周)나라가 건국되기 이전 시대, 곧 후직(后稷) 기(棄)의 3대손인 공유(公劉)로부터 12대손 고공단보(古公亶父, 문왕의 조부)에 이르기까지 주나라의 시조들이 빈(豳) 땅에 살 때 유행했던 노래들을 말하며, 그 중 「칠월」은 계절의 변화에 따라 농사짓는 풍경을 읊은 것으로서 가장 오래된 농가월령가(農家月令歌)의 하나로 생각된다. 노래 가사의 내용을 그림으로 표현한 「빈풍칠월도(豳風七月圖)」는 「빈풍도」라고도 하며 임금이 백성들이 생업에 종사하는 수고로움을 알고 바른 정치를 베풀도록 왕을 경계시키는 목적으로 그려졌는데, 남송 때 진덕수, 원대(元代)에 조맹부(趙孟頫, 1254~1322) 등이 「빈풍칠월도」를 올렸다. 이러한 관습은 조선 초기에 전래되어 여러 차례 「빈풍칠월도」가 제작되었으며, 18세기 이방운(李昉運)의 작품이 그 예이다. 가사가 8연으로 되어 있으므로 「빈풍칠월도」도 역시 보통 8폭으로 구성되어 있지만 작가에 따라 채택하는 장면이나 표현이 조금씩 달라지기도 한다.
신은 지극히 어리석고 지극히 비루한 몸으로 외람되이 몇 대에 걸쳐 베풀어주신 성은을 저버리고 병으로 시골에 들어앉아 초목과 함께 썩어가고자 하였습니다. 그런데 뜻밖에도 헛된 명성이 잘못 알려져서 강연(講筵)을 담당하는 중임으로 부르시니, 두렵고 황송하며 사양하려 하나 피할 길이 없었습니다. 기왕에 외람되이 이를 받는 것을 면하지 못하였다면, 성학(聖學)을 권도(勸導)하고 군덕(君德)을 보양하여 요순(堯舜)의 융성한 정치에 이르기를 기약함은 비록 감당할 수 없다고 사양한들 되겠습니까. 다만 신은 학술이 거칠고 말주변이 어눌한데다가 잇따른 병고로 거의 입시(入侍)하지 못하였고 겨울철 이후로는 전혀 입시하지 못하게 되었으니, 신의 죄는 만 번 죽어도 마땅한지라 근심스럽고 두려워 몸둘 바를 모르겠습니다.
신이 삼가 생각하옵건대, 당초에 상소를 올려 학문을 논한 말들이 이미 성상의 뜻을 감동시켜 분발하게 해 드리지 못하였으며, 그 뒤로도 입대(入對)하여 여러 번 아뢴 말씀이 또 성상의 총명예지에 조금도 도움이 되지 못하였으니, 미력한 신은 곤혹스러워 무엇을 말씀드려야 할지 모르겠습니다. 다만 옛 현인과 군자들이 성학(聖學)을 밝히고 심법(心法)을 얻어서 도(圖)를 만들고 설(說)을 만들어 사람들에게 도에 들어가는 문과 덕을 쌓는 토대가 무엇인지 보여주었던 것들이 오늘날 세상에 행해져 해와 별같이 환합니다. 이에 감히 이것을 가지고 나아가 전하께 진술하여, 옛 제왕(帝王)이 악관들에게 노래를 읊도록 하고 여러 그릇들 속에 명(銘)을 새겨 놓았던 뜻을 대신하고자 하니, 이것은 기왕의 성현들에 힘입어 장래에 유익함이 있었으면 합니다.
이에 삼가 그중에서 더욱 뚜렷한 것 일곱 개를 가려 뽑았는데, 그 중 「심통성정도(心統性情圖)」는 정복심(程復心)의 도(圖)에다가 신이 만든 두 개의 작은 도를 덧붙인 것입니다. 이 밖에 또 세 개의 도는 비록 신이 만들었으나 그 글과 뜻, 조목(條目)과 규획(規畫)에 있어서 한결같이 옛 현인의 사상을 그래도 서술한 것이지 신이 새롭게 지어낸 것이 아닙니다. 이것을 합하여 『성학십도』를 만들고 각 도 아래에 또 외람되게 신의 의견을 덧붙여서 삼가 엮어 베껴(繕寫) 올립니다.
다만 신은 춥고 병든 가운데 직접 이 작업을 하다 보니, 눈이 어둡고 손이 떨려 글씨가 단정하지 못한 데다 글씨의 행과 크기가 바르고 고르지 못하여 규격에 맞지 않습니다. 혹여 물리치지 않으신다면, 이것을 경연관(經筵官)에게 내리시어 상세하게 논의해서 바로잡고 사리에 어긋난 것을 고치고 보충하게 하십시오. 그리고 다시 글씨 잘 쓰는 사람에게 정본(正本)을 정사해서 해당 관서에 보내어 병풍 한 벌을 만들어서 평소 한가롭게 거처하시는 곳에 펼쳐 놓으시고, 또 별도로 조그만 것을 하나 만들어서 첩(帖)으로 잘 꾸며서 항상 책상 위에 놓으십시오. 그리고 굽어보고 우러러 보며 돌아보는 사이에 언제나 보고 살피셔서 경계하는 것이 있게 되기를 바랍니다. 그렇게 된다면 신의 간절한 충정(忠情)에 이보다 다행히 없겠습니다.
그런데 『성학십도』의 뜻에 있어서 다 말씀드리지 못한 것이 있으므로 신이 지금 거듭 설명하겠습니다. 일찍이 듣건대, 맹자(孟子)의 말에, “마음의 맡은 일은 생각하는 것이다. 생각하면 얻고 생각하지 못하면 잃어버리고 만다.” 하였고, 기자(箕子)가 무왕(武王)을 위하여 「홍범(洪範)」을 진술할 적에 “생각하면 슬기롭게 되고, 슬기롭게 되면 성인(聖人)이 된다.” 하였습니다. 대개 마음은 방촌(方寸)11)
안에 갖추어 있으면서 지극히 텅 비고 지극히 신령하며, 이치는 「하도」·「낙서」에 드러나 있으면서 지극히 현저하고 지극히 진실합니다. 지극히 텅 비고 지극히 신령한 마음을 가지고 지극히 현저하고 진실한 이치를 구하는 것이니 마땅히 얻지 못할 이치가 없을 것입니다. 그리하여 ‘생각하여 얻고’ ‘슬기롭게 되어 성인이 되는’ 것을 어찌 오늘날이라고 징험할 수 없겠습니까. 그러나 마음이 텅 비고 신령하다 하더라도 주재(主宰)하는 바가 없으면 일을 당하여도 생각하지 못하게 되고, 이치가 현저하고 진실하다 하더라도 비추어 보지 못하면 항상 눈앞에 있을지라도 보지 못하게 됩니다. 또한 이 도(圖)를 토대로 하여 생각을 다하는 공부를 소홀히 할 수 없는 이유입니다.
11)
방촌(方寸) : 사방 한 치란 뜻으로 옛사람은 마음의 작용이 가슴 밑 방촌의 공간에서 이루어진다고 생각하였다.
또 듣건대 공자(孔子)께서는, “배우기만하고 생각하지 아니하면 얻는 것이 없고, 생각만 하고 배우지 않으면 위태로워진다.” 하였습니다. 배운다는 것은 그 일을 익혀서 참되게 실천하는 것을 말합니다. 무릇 성인의 학문이란 마음에서 구하지 않으면 어두워져서 얻지 못하는 까닭에 반드시 생각하여 그 미묘한 이치를 통달해야 하고, 그 일을 익히지 못하면 위태롭고 불안한 까닭에 반드시 배워서 그 실상대로 실천하여야 합니다. 이리하여 생각하는 것과 배우는 것은 이렇게 서로 이치를 드러내고 도와주는 관계입니다.
엎드려 바라옵건대, 성명께서는 깊이 이 이치를 밝히시고 모름지기 먼저 뜻을 세우시어, “순(舜)은 어떤 사람이고 나는 어떤 사람인가? 노력하면 이와 같이 된다.”라고 생각하시어 분연(奮然)하게 힘을 내셔서 생각하고 배우는 이 두 가지 공부에 힘쓰십시오. 그런데 경(敬)을 지킨다는 것은 생각과 배움을 겸하고 움직임과 고요함을 관통하며, 안과 밖을 합하고 드러난 곳과 은미(隱微)한 것을 하나로 하는 방법입니다. 이것을 실천하는 방법은 반드시 삼가고 엄숙하고 고요한 가운데 이 마음을 보존하고, 배우고 묻고 생각하고 분별하는 사이에 이 이치를 궁리하여, 보이지 않고 들리지도 못할 때에도 경계하고 두려워하기를 더욱 엄숙하고 더욱 공경히 하며, 은미한 곳과 혼자 있는 곳에서 성찰하기를 더욱더 정밀히 하는 것입니다. 하나의 도(圖)에 나아가 생각할 때에는 마땅히 이 도에만 마음을 오로지해서 다른 도가 있다는 것을 알지 못하는 것처럼 하고, 어떤 한 가지 일을 습득할 적에는 마땅히 이 일에 오로지하여서 다른 일이 있다는 것을 알지 못하는 것처럼 합니다.
아침저녁으로 변함이 없이 매일매일 계속하고, 혹 야기(夜氣)가 청명한 때에 차근차근 실마리를 풀어 그 뜻을 이해하고 혹 평상시에 사람을 응대할 때에 몸소 체험하고 길러나가야 합니다. 처음에는 혹 마음대로 안되고 서로 모순되는 근심이 있으며 또 때로 극히 고통스럽고 불쾌한 병통이 있는 것을 면할 수는 없지만, 이것이 바로 옛사람들이 이른바 장차 크게 나아갈 기미이며 좋은 소식의 실마리가 되는 것이라 하겠으니, 절대로 이런 문제로 인해서 스스로 좌절해서는 안 됩니다. 더욱 스스로를 믿고 더욱 힘써야 하겠습니다. 진실한 이치를 체득한 것이 많아지고 오래 힘써 나가면 자연히 마음과 이치가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녹아들어서 어느새 이해하고 통달하게 되며, 익히는 것과 일이 서로 익숙해져 점점 순탄하고 편하게 행해지는 것을 보게 됩니다.
처음엔 각각 그 하나에만 오로지하던 것이 나중에는 하나로 통합될 수 있을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맹자가 논한 바, “깊이 나아가기를 도로써 하여 자득하게 된 경지”이며 “저절로 생겨나게 되면 어찌 그만둘 수 있겠는가”라는 말의 증험입니다. 다시 그것을 바탕으로 “부지런히 힘써서 자신의 재주를 다한다면”, 안연(顏淵)의 ‘석 달 동안 인(仁)을 어기지 않는 마음’이 되어 나라 다스리는 사업이 바로 그 가운데 있게 될 것이며, 증자(曾子)처럼 충서(忠恕)로 일관하게 되어 도(道)를 전할 책임이 바로 자신에게 있게 될 것입니다. 두려워하고 공경함이 일상생활에서 떠나지 않아 중화(中和)를 지극히 이루어 천지가 제자리를 잡고 만물이 길러지는 성과를 이룰 수 있을 것이며, 덕행이 떳떳한 인륜에서 벗어나지 않아 천(天)과 인(人)이 합일하는 오묘함을 얻을 수 있을 것입니다.
이제 여기에 그 도(圖)와 설(說)을 지은 것은 겨우 열 폭밖에 안 되는 종이에 적을 수 있는 것이지만, 이것을 보고 생각하고 익히는 것은 평소 조용히 혼자 계실 때에 하셔야 합니다. 그러면 도를 깨달아 성인이 되는 요령과 근본을 반듯하게 하여 나라를 다스리는 근원이 다 여기에 갖추어 있으니, 오직 성상께서는 정신을 가다듬어 뜻을 더하여서 처음부터 끝까지 여러 번 반복하여 살펴보는 데 달려 있습니다. 하찮은 것이라고 소홀히 하지 마시고 싫증이 나고 번거롭다고 버리지 마십시오. 그러면 종묘
와 사직
의 큰 다행이요, 신하와 백성들에게도 매우 다행한 일이라 하겠습니다. 신(臣)은 ‘시골사람이라 미나리와 햇볕을 임금에게 올리고자 한 정성’을 이기지 못하여, 전하의 위엄을 모독하는 줄 알면서도 이렇게 바치오니, 황송하고 송구스럽습니다. 처분대로 하소서.
'종묘' 관련자료
'사직' 관련자료
『퇴계선생문집』권7, 차, 진성학십도차
- 「하도(河圖)」 : 복희씨(伏羲氏) 때 하수(河水), 즉 황하(黃河)에서 용마(龍馬)가 등에 지고 나왔다는 그림으로, 복희씨가 그것을 보고 『역(易)』의 팔괘(八卦)를 만들었다고 한다.
- 「낙서(洛書)」 : 하(夏)나라 우(禹) 임금 때 낙수(洛水)에서 거북이 등에 지고 나왔다는 글로서, 우임금은 그것을 보고 천하를 다스리는 대법(大法)인 『홍범구주(洪範九疇)』를 만들었다고 한다.
- 앞에는 의(疑)가 있고 뒤에는 승(丞)이 있으며, 왼쪽에는 보(輔)가 있고 오른쪽에는 필(弼)이 있으며 : 네 가지 모두 천자를 전후좌우에서 보필하는 관직의 이름이다. 한나라 때 복생이 『상서』를 전수하고 주석을 붙여 펴낸 『상서대전(尙書大傳)』(금문상서)에서는 “옛날에 천자는 반드시 전후좌우 네 호위가 있어서, 앞에 서는 이를 의(疑), 뒤에 서는 이를 승(丞), 왼쪽에 서는 이를 보(輔), 오른 쪽에 서는 이를 필(弼)이라 하였다(古者 天子必有四鄰, 前曰疑, 後曰丞, 左曰輔, 右曰弼)”고 되어 있다.
- 여분(旅賁) : 고대 관직 이름으로 천자와 제후가 출입할 때 창을 잡고 호위하는 직책.
- 설어(暬御) : 임금을 가까이 모시는 신하[近臣]이다.
- 고사(瞽史) : 주(周) 나라 관직 이름으로 고(瞽)는 악사(樂師)로서 음악을 담당하고, 사(史)는 태사(太史)와 소사(小史)로서 음양, 천문, 예악을 담당하였다.
- 장구령(張九齡)과 『금감록(金鑑錄)』 : 장구령(673~740)은 당(唐)나라 현종(玄宗) 때의 재상이다. 저서에는 『곡강선생문집(曲江先生文集)』이 있다. 당시 황제의 생일에는 신하들이 거울을 바쳐서 축하하는 관례가 있었는데, 장구령은 『춘추금감록(千秋金鑑錄)』이란 책을 지어 올렸다. 이 책은 역대 정치의 잘잘못을 기록한 것으로 이것을 보고 황제가 정치의 거울로 삼도록 하기 위한 의도였다.
- 송경(宋璟)과 「무일도(無逸圖)」 : 송경(663~737)은 당 현종 때 재상으로 그는 주공(周公)이 성왕(成王)을 위해 지은 이 내용을 그림(도)으로 만들어 현종에게 바쳤다. 그 내용은 안일하지 말라는 것이었다.
- 이덕유(李德裕)와 「단의육잠(丹扆六箴)」 : 이덕유(787~849)는 당나라 재상으로, 「단의육잠(丹扆六箴)」을 지어 경종(敬宗)에게 바쳤다. 단의(丹扆)는 천자가 제후를 대할 때 뒤에 세우는 붉은 병풍이며, 육잠(六箴))은 「소의잠(宵衣箴)」·「정복잠(正服箴)」·「파헌잠(罷獻箴)」·「납회잠(納誨箴)」·「변사잠(辨邪箴)」·「방미잠(防微箴)」이다.
- 진덕수(眞德秀)가 「빈풍칠월도(豳風七月圖)」를 올린 것 : 진덕수(1178~1235)는 남송(南宋) 대의 주자학자이다. 호는 서산(西山), 시호는 문충(文忠). 저서로 『대학연의(大學衍義))』,『독서기(讀書記)』,『서산문집(西山文集)』 등이 있다. 「빈풍칠월도(豳風七月圖)」는 『시경(詩經)』 「빈풍(豳風)」 가운데 제1편인 「칠월(七月)」을 그림으로 그린 것을 말한다. 「빈풍(豳」은 주(周)나라가 건국되기 이전 시대, 곧 후직(后稷) 기(棄)의 3대손인 공유(公劉)로부터 12대손 고공단보(古公亶父, 문왕의 조부)에 이르기까지 주나라의 시조들이 빈(豳) 땅에 살 때 유행했던 노래들을 말하며, 그 중 「칠월」은 계절의 변화에 따라 농사짓는 풍경을 읊은 것으로서 가장 오래된 농가월령가(農家月令歌)의 하나로 생각된다. 노래 가사의 내용을 그림으로 표현한 「빈풍칠월도(豳風七月圖)」는 「빈풍도」라고도 하며 임금이 백성들이 생업에 종사하는 수고로움을 알고 바른 정치를 베풀도록 왕을 경계시키는 목적으로 그려졌는데, 남송 때 진덕수, 원대(元代)에 조맹부(趙孟頫, 1254~1322) 등이 「빈풍칠월도」를 올렸다. 이러한 관습은 조선 초기에 전래되어 여러 차례 「빈풍칠월도」가 제작되었으며, 18세기 이방운(李昉運)의 작품이 그 예이다. 가사가 8연으로 되어 있으므로 「빈풍칠월도」도 역시 보통 8폭으로 구성되어 있지만 작가에 따라 채택하는 장면이나 표현이 조금씩 달라지기도 한다.
- 방촌(方寸) : 사방 한 치란 뜻으로 옛사람은 마음의 작용이 가슴 밑 방촌의 공간에서 이루어진다고 생각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