임금께서 의병
을 일으켜 왕대비(王大妃)를 받들어 복위시킨 다음 대비의 명으로 경운궁(慶運宮)에서 즉위하였다. 광해군
을 폐위시켜 강화도로 내쫓고 이이첨(李爾瞻) 등을 처형한 다음 전국에 대사령을 내렸다. …(중략)… 처음 광해가 동궁(東宮)에 있을 때 선조
께서 세자를 바꾸려는 의사가 있었다. 그러나 결국 광해가 왕위를 계승하게 되었는데, 그는 영창대군(永昌大君)을 몹시 시기하고 모후(母后)
(鄭仁弘) 등이 또 광해
의 악행을 종용하여 임해군(臨海君)과 영창대군을 해도(海島)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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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해군' 관련자료
'선조' 관련자료
선조
의 계비로 영창대군의 어머니인 인목대비(仁穆大妃, 1584~1632)를 말함
를 원수처럼 여겨 그 시기와 의심이 날로 쌓였다. 적신 이이첨과 정인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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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인홍' 관련자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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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화도
에 안치하여 죽이고 연흥부원군(延興府院君) 김제남(金悌男, 1562~1613)
왕대비의 아버지
을 멸족하는 등 여러 차례 큰 옥사를 일으켜 무고한 사람들을 살육하였다. 임금의 막내아우인 능창군(綾昌君) 이전(李佺)도 무고로 죽자, 원종대왕(元宗大王)
인조의 친아버지
이 화병으로 돌아가셨다. 대비를 서궁(西宮)
지금의 덕수궁
에 유폐하고 존호를 삭제하는 등 그 화를 헤아릴 수 없었다.
선조
의 예전 신하로서 이의를 제기하는 자는 모두 추방하여 당시 어진 선비들은 죄에 연루되지 않으려고 초야로 숨어 버렸고 사람들은 모두 불안해 하였다. 또 토목 공사를 크게 일으켜 해마다 쉴 새가 없었고, 간신배가 조정에 가득 차고 후궁이 정사를 어지럽혀 크고 작은 벼슬아치의 임명이 모두 뇌물로 거래되었으며, 법을 무시하고 가혹하게 거둬들여 백성들이 물과 불 속에 든 것 같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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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금께서 윤리와 기강이 이미 무너져 종묘
와 사직
이 망해 가는 것을 보고 억울하고 원통해 하며 난리를 평정하고 세상 질서를 회복하고자 했다. 무인 이서(李曙)와 신경진(申景禛)이 먼저 큰 계획을 세웠는데. 신경진 및 구굉(具宏)·구인후(具仁垕)는 모두 임금의 가까운 친속이었다. 이에 서로 은밀히 모의한 다음, 뛰어난 선비들 가운데 위엄과 인망 있는 자를 얻어 일을 같이하고자 하여 전 동지(同知) 김류(金瑬)를 방문하였고 말 한마디에 서로 의기투합하여 드디어 추대할 계책을 결정하였으니, 곧 경신년
(崔鳴吉)·장유(張維), 유생 심기원(沈器遠)·김자점(金自點) 등과 공모하였다. 이로부터 모의에 가담하고 협력하는 자가 날로 많아졌다. 임술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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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직' 관련자료
1620년, 광해군
12년
이었다. 그 후 신경진이 전 부사(府使) 이귀(李貴)를 찾아가 사실을 말하자 그도 본래 이 뜻을 두었던 사람이라 매우 좋아하였다. 드디어 그 아들 이시백(李時白)·이시방(李時昉) 및 문사 최명길
'광해군' 관련자료
'최명길' 관련자료
1622년, 광해군
14년
가을에 마침 이귀가 평산 부사(平山府使)로 임명되자 신경진을 끌어들여 중군(中軍)으로 삼고 중외에서 서로 호응할 계획을 세웠다.
'광해군' 관련자료
『인조실록』권1, 1년 3월 13일 계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