용골대(龍骨大)와 마부대(馬夫大)가 성 밖에 와서 임금의 출성(出城)을 재촉하였다. 임금이 쪽빛으로 염색한 옷차림으로 백마를 타고 의장(儀仗)은 모두 제거한 채 시종(侍從) 50여 명을 거느리고 서문(西門)을 통해 성을 나갔는데, 왕세자가 따랐다. 백관으로 뒤처진 자는 서문 안에 서서 가슴을 치고 뛰면서 통곡하였다. 임금이 산에서 내려가 가시를 펴고 앉았는데, 얼마 뒤에 갑옷을 입은 청나라 군사 수백 기(騎)가 달려 왔다. 임금이 이르기를, “이들은 뭐하는 자들인가?” 하니 도승지 이경직이 대답하기를, “이는 우리나라에서 말하는 영접하는 자들인 듯합니다” 하였다. 한참 뒤에 용골대 등이 왔는데, 임금이 자리에서 일어나 그를 맞아 두 번 읍(揖)하는 예를 행하고 동서(東西)로 나누어 앉았다. 용골대 등이 위로하니 임금이 답하기를, “오늘의 일은 오로지 황제의 말과 두 대인이 힘써 준 것만을 믿을 뿐입니다” 하자 용골대가 말하기를, “지금 이후로는 두 나라가 한집안이 되는데, 무슨 걱정이 있겠습니까. 시간이 이미 늦었으니 속히 갔으면 합니다” 하고, 마침내 말을 달려 앞에서 인도하였다. 임금이 삼공 및 판서·승지 각 5인, 한림(翰林)·주서(注書) 각 1인만을 거느렸으며, 세자는 시강원(侍講院)·익위사(翊衛司)의 여러 관원을 거느리고 삼전도
(三田渡)에 따라 나아갔다. 멀리 바라보니 한(汗)이 황옥(黃屋)을 펼치고 앉아 있고 갑옷과 투구 차림에 활과 칼을 휴대한 자가 방진(方陣)을 치고 좌우에 옹립(擁立)하였으며, 악기를 진열하여 연주했는데, 대략 중국 제도를 모방한 것이었다. 임금이 걸어서 진(陣) 앞에 이르고, 용골대 등이 임금을 진문(陣門) 동쪽에 머물게 하였다. 용골대가 들어가 보고하고 나와 한의 말을 전하기를, “지난날의 일을 말하려 하면 길다. 이제 용단을 내려 왔으니 매우 다행스럽고 기쁘다” 하자 임금이 대답하기를, “천은(天恩)이 망극합니다” 하였다. 용골대 등이 인도하여 들어가 단(壇) 아래에 북쪽을 향해 자리를 마련하고 임금에게 자리로 나가기를 청하였는데, 청나라 사람을 시켜 여창(臚唱)하게 하였다. 임금이 세 번 절하고 아홉 번 머리를 조아리는 예를 행하였다.
'삼전도' 관련자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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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금이 밭 가운데 앉아 진퇴(進退)를 기다렸는데 해질 무렵이 된 뒤에야 비로소 도성으로 돌아가게 하였다. 왕세자와 빈궁 및 두 대군과 부인은 모두 머물러 두도록 하였는데, 이는 장차 북쪽으로 데리고 가려는 목적에서였다. 임금이 물러나 막차(幕次)에 들어가 빈궁을 보고, 최명길
을 머물도록 해서 우선 배종(陪從)하고 호위하게 하였다. 임금이 소파진(所波津)을 경유하여 배를 타고 건넜다. 당시 뱃사공은 거의 모두 죽고 빈 배 두 척만이 있었는데, 백관들이 다투어 건너려고 어의(御衣)를 잡아당기기까지 하면서 배에 오르기도 하였다. 임금이 건넌 뒤에, 한이 뒤따라 말을 타고 달려와 얕은 여울로 군사들을 건너게 하고, 상전(桑田)에 나아가 진을 치게 하였다. 그리고 용골대로 하여금 군병을 이끌고 행차를 호위하게 하였는데, 길의 좌우를 끼고 임금을 인도하여 갔다. 사로잡힌 자녀들이 바라보고 울부짖으며 모두 말하기를, “우리 임금이시여, 우리 임금이시여. 우리를 버리고 가십니까” 하였는데, 길을 끼고 울며 부르짖는 자가 1만 명을 헤아렸다. 인정(人定) 때가 되어서야 비로소 서울에 도달하여 창경궁 양화당(養和堂)으로 나아갔다.
'최명길' 관련자료
『인조실록』권34, 15년 1월 30일 경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