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 박지원
은 황공하게도 농서를 올리면서 이 기회에 건의를 드립니다. …(중략)… 신의 나이 또한 수세에 걸쳐 다른 사람들을 보았습니다. 그중에 부조(父祖)의 전업(田業)을 능히 보존하여 타인에게 팔지 않은 사람은 열에 다섯 정도이고, 해마다 토지를 떼어 파는 사람은 열에 일곱여덟 정도 됩니다. 그렇다면 남는 것을 축적하여 토지를 점유하는 자는 그 수를 알 수 있습니다. 진실로 토지 소유를 제한하는 법령을 세우십시오. 모년 모월 이후부터 제한된 토지보다 많은 자는 더 가질 수 없고, 그 법령 이전부터 소유한 것이 비록 광대한 면적이라 해도 불문에 부치며, 그 자손으로 지자(支子)나 서자(庶子)가 있어 분급해 주는 것은 허락해야 합니다. 혹시 사실대로 하지 않고 숨기거나 법령 이후에 제한을 넘어 더 점유한 자가 있다면, 백성이 적발할 경우 백성에게 그 토지를 주고, 관아에서 적발하면 관아에서 몰수하십시오. 이렇게 한다면 수십 년이 못 가서 전국의 토지는 균등하게 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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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것이 소노천(蘇老泉)
를 적용하지 않으나 정전제
의 이익을 얻는 것으로서, 비록 주나라의 정전제
라 하더라도 이보다 월등하게 나을 것은 없으니, 참으로 확실한 주장입니다.
중국 북송의 문인 소순(蘇洵, 1009~1060)을 지칭함
이 소위 조정에 조용히 앉아 천하에 법령을 내리되 백성을 놀라게 하지도 않고 대중을 동요시키지도 않고, 정전제
'정전제' 관련자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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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 천하의 온갖 폐단과 고질은 군대 문제에 있으나, 그 근본을 따지고 보면 병농이 일치되어 있지 않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나라를 가진 사람들이 군대를 아낌은 항상 백성들을 아끼는 것보다 위에 있었습니다. 그리고 역시 군대를 독사나 맹수보다 두려워하여 천하의 거의 절반을 그들을 받드는 데 쏟아 왔습니다.
한나라부터 명나라에 이르기까지 수천 년 동안 나라를 잘 다스려 보려는 군주와 계책을 가진 신하들이 없었던 것은 아니었으나, 그들이 주야로 묘책을 생각해 보아도 끝내 좋은 대책을 마련해 내지 못했습니다. 그러나 역시 하루도 군대를 망각해 버릴 수는 없었습니다. 이와 같이 하면서 토지를 상실하고 의지할 곳 없는 백성은 치지도외(置之度外)
마음에 두지 아니함
하여 까맣게 잊은 듯이 함은 무엇이겠습니까. 대개 이들이 논두렁과 밭고랑을 떠나게 됨은 그 원인이 하루아침에 생긴 것이 아니고, 장부를 놓고 그 수를 기록해온 것도 아니기 때문에, 점진적으로 불어나 어느덧 천하 인민의 절반을 차지하는 데까지 이르게 되었는데도 또 이렇게 많아진 것도 깨닫지 못하는 것이었습니다. 이러한 백성은 장차 어디로 돌아가야 합니까. 어찌 그들이 천하 인민의 절반인지 알 수 있는가. 이것은 쉽게 알 수 있습니다. 한나라의 황건·적미(赤眉)
후한(後漢) 초에 산동 지방에서 반란을 일으킨 무리
, 당나라의 방훈(龐勛)
당나라 말기에 현 장쑤 성 쉬저우 시인서주 무녕군(武寧軍) 일대에서 난을 일으킨 군인
과 황소(黃巢, ?~884)의 무리가 과연 모두 농업에 전심한 백성이었다면 어떻게 하루아침에 백만의 군중을 불러 모을 수 있었겠습니까. 그러므로 겸병의 폐해는 반드시 큰 데만 있는 것이 아닙니다. 평범한 사람들이 하루에 두 사발씩 밥을 더 먹는다고 하면 천하 사람이 하루에 먹을 밥에서 그 절반을 축내는 꼴이 됩니다. 그러니 하물며 그 토지를 열 배, 백 배인 가진 자이겠습니까? 그러므로 진(秦)·한(漢) 이후 백세 동안 잘 다스려지지 않는 것에 어찌 달리 이유가 있겠습니까? 큰 근본이 이미 붕괴되어 백성들로 하여금 뜻이 안정되지 못하고 모두 요행만 바라게 만들었기 때문입니다. 그리하여 위로는 정령을 내리는 사람들이 눈코 뜰 새 없이 바쁘나 끝내 고식적인 결론을 답습하는 것을 면하지 못하고, 아래에서는 정령을 집행하는 사람들이 아침에 저녁 일을 예측하지 못할 정도로 급박하여 구차하게 미봉하는데 그쳤을 뿐입니다. 이것은 천하의 공통된 병폐로, 역대 정치의 득실을 알 수 있습니다. 그렇다면 귀척(貴戚)과 근신(近臣)을 깊이 죄책할 것도 없고, 호부(豪富) 겸병자를 몹시 혐오할 것도 없습니다. 문제는 오직 나라를 잘 다스려 보려는 의지와 통치의 근본이 확립되어 있느냐 없느냐에 달려 있을 뿐입니다.
거룩한 우리나라 수천 리 강토는 처음부터 정전을 구획해 본 적도 없었고, 또한 정전을 구획한 경계를 파괴당한 일도 없었습니다. 다행히 성대한 시대를 만나 독자적으로 한 국가의 제도를 마련하였으니, 정밀하고 순일하게 가지고 탕평
의 법을 하고 토지의 경계를 정리하여 백성의 소유를 균등하게 하려는 정책은 옛 성왕와 더불어 처음부터 다른 것이 없습니다. 그러므로 토지 소유를 제한한[限田] 후 겸병이 없어지고, 겸병이 없어진 후 산업이 균등하게 될 것이고, 산업이 균등하게 된 후라야 백성이 모두 안정되어 각기 제 토지를 경작하게 되고, 근면한 사람과 나태한 사람의 구별이 드러나게 될 것입니다. 그리고 근면한 사람과 나태한 사람의 구별이 드러나게 된 후 농사를 권면할 수 있고 백성들을 가르칠 수 있을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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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이 농업정책에 대해 다시 군더더기 말을 붙이는 것은 아닙니다. 그러나 비유하자면 물감이 비록 갖추어져 있고 그림 솜씨도 뛰어나다 하더라도 종이나 명주와 같은 바탕이 되는 것이 없으면 붓을 댈 곳이 없는 것과 같습니다. 그러므로 분수에 넘침을 피하지 않고 이렇게 주장하는 바입니다.
『연암집』권17, 한민명전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