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라도 관찰사
정민시(鄭民始)가 죄인 윤지충(尹持忠)과 권상연(權尙然)을 조사한 일을 아뢰기를 “…(중략)… 윤지충과 권상연을 다시 자세히 문초하고 매 30대를 치니, 윤지충이 공술하기를 ‘양대(兩代)의 신주를 과연 태워 버리고 그 재를 마당에다 묻었습니다. 그래서 전에 묻었다고 공초했던 것입니다. 그리고 8월 모친 장례 때에도 신주를 세우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스승으로부터 전해 받았다는 한 조목으로 말하면, 그 책을 얻어 그 학문을 익힌 것에 지나지 않는데 어찌 전해 받은 스승이 있겠습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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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주(敎主)라는 말은 서양(西洋)에 있다고는 들었어도 우리나라에 있다는 소리는 못 들었습니다. 도대체 어떤 사람을 지목하여 하는 말인지 모르겠습니다만, 이에 대해서는 홍낙안(洪樂安)에게 물으면 알 수 있을 것입니다. 신도가 많이 늘었다는 말은 더욱 애매하기 짝이 없습니다. 이는 사람들이 스스로 터득하는 학문일 뿐 애초부터 권하고 가르쳐서 할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그래서 형제처럼 친한 경우에도 본래 전해 주지 못하는데, 어떻게 신도를 늘렸겠습니까. 또 망령되게 증언하지도 말고 남을 해치지도 말라는 천주의 가르침이 계율(誡律) 가운데 있으니, 더욱 다른 사람을 끌어다 증거할 수 없습니다’ 하였습니다. 권상연은 공술하기를 ‘저의 집 신주를 애초에 땅에 묻으려 하였으나, 이목이 번거로울까 두려워 남몰래 불태워 버리고 그 재를 무덤 앞에 묻었습니다. 천주교에 대한 책은 윤지충에게 빌려 보았을 뿐 애초에 베낀 일이 없는데, 어떻게 감추어 둔 것이 있겠습니까’ 하였습니다. 그리고 윤지충의 동네 사람들을 또 추문(推問)했더니, 회격(灰隔)
관과 광중(壙中) 사이에 석회를 다져 넣음
과 횡대(橫帶)
관을 묻은 뒤 구덩이 위에 덮는 널조각
를 예대로 했고, 시기를 지나 장사 지낸 것도 사실이라고 하였습니다. 천하의 변괴가 어찌 한량이 있겠습니까마는, 윤지충과 권상연 두 사람처럼 극도로 흉악한 자는 있지 않았습니다. 부모의 시신을 버렸다는 것은 비록 사실이 아닌 것으로 낙착되었지만, 그 위패를 태워 버린 것은 그들도 역시 실토하였습니다. 아, 두 사람은 모두 사족
(士族)입니다. 그리고 윤지충으로 말하면 약간이나마 문자를 알고 또 일찍이 성균관
의 유생이었으니, 민간의 어리석고 무지스러운 무리들과는 조금 다른데, 사설(邪說)을 혹신(酷信)하여 완전히 딴사람이 되어 버린 채 단지 천주가 있는 것만 알 뿐 임금과 어버이가 있는 줄은 모르고 있습니다. 나아가 평소 살아 계신 부모나 조부모처럼 섬겨야 할 신주를 한 조각 쓸모없는 나무라 하여 태워 없애면서도 이마에 진땀 하나 흘리지 않았으니, 정말 흉악하기만 합니다. 그러니 제사를 폐지한 것 등은 오히려 부차적인 일에 속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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더구나 형문을 당할 때 하나하나 따지는 과정에서 피를 흘리고 살이 터지면서도 찡그리거나 신음하는 기색을 얼굴이나 말에 보이지 않았고, 말끝마다 천주의 가르침이라고 하였습니다. 그리고 심지어는 임금의 명을 어기고 부모의 명을 어길 수는 있어도, 천주의 가르침은 비록 사형의 벌을 받는다 하더라도 결코 바꿀 수 없다고 하였으니, 확실히 칼날을 받고 죽는 것을 영광으로 여기는 뜻이 있었습니다” 하니, 상이 형조판서 김상집(金尙集)과 참판 이시수(李時秀) 등을 불러 보고 이르기를, “이제 전라 감사
가 조사해 아뢴 것을 보면, 윤지충과 권상연이 신주를 태워 버린 한 조목에 대해서는 이미 자백하였다 하니, 어찌 이처럼 흉악하고 이치에 어긋나는 일이 있겠는가. 대저 경학으로 모범이 되는 선비가 없기 때문에 사람들이 점차 물들어 이처럼 오도되기에 이른 것이니, 세도(世道)를 위해서 근심과 한탄을 금할 수가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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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조실록』권33, 15년 11월 7일 무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