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략)… 실옹은 말하기를, “좋도다. 너의 물음이여! 백성은 이치대로 따르게 할 수 있어도 이치를 알도록 할 수는 없다’고 하였으니, 군자(君子)는 풍속에 따라 가르침을 베풀고, 지혜로운 자는 알맞음을 좇아 주장을 세울[立言] 뿐이다. 땅은 고요하고 하늘이 운행한다는 말은 사람들의 일반적인 견해로 백성의 뜻에 해로울 것 없고 책력(冊曆)을 만들어 반포하는데도 어그러질 것이 없으니, 그에 따라서 다스리는 것도 가하지 않겠는가?
송(宋)나라 장자후(張子厚)가 이 뜻을 은밀하게 밝혔으며 서양 사람도 배가 움직이느냐 연안(沿岸)이 움직이느냐를 가지고 분명하게 추론했다. 천문 관측을 할 때는 오로지 천운(天運)설을 주로 하는 것이 추보(推步)하기에 편리하다.
그러나 하늘이 운행하는 것과 땅이 회전하는 것은 그 형세가 마찬가지며 나누어 말할 필요가 없다. 오직 9만 리를 한 바퀴 도는데 빠르기가 이와 같다. 저 성계(星界)에서 지구까지의 거리는 겨우 반경(半徑)밖에 되지 않는데도 오히려 몇천만 억인지도 알 수 없거늘, 더구나 별들 밖에 또 별들[星辰]이 있음에랴? 우주[空界]에 끝이 없어 별들도 끝이 없으니, 일주 거리를 말하면 이미 헤아릴 수 없을 만큼 멀다. 하루 동안에 운행하는 빠르기를 생각해 본다면 번개나 포탄의 빠름으로도 여기에 견줄 수 없다. 이것은 역법(曆法)에 뛰어난 자도 능히 계산할 수 없고 말을 잘하는 자도 능히 설명할 수 없다.
하늘이 운행한다는 설이 이치에 맞지 않음은 여러 말이 필요하지 않다.
또 내가 너에게 묻겠다. 세상 사람들이 천지를 이야기할 때 지구가 우주의 정중앙에 있고 삼광(三光)
해, 달, 별
에 둘러싸여 있다고 하지 않느냐?” 하였다.
허자가 말하기를, “칠정(七政, 日·月·金·木·水·火·土)이 지구를 둘러싸고 있다는 것은 천문을 관측해보면 근거가 있으니, 지구가 우주의 한복판에 있다는 것은 의심이 없을 듯합니다” 하였다.
실옹은 말하기를, “그렇지 않다. 하늘에 가득한 별들은 각기 계(界)를 이루지 않은 것이 없다. 성계(星界)로부터 본다면, 지구 역시 하나의 별이다. 헤아릴 수 없이 수많은 계(界)들이 우주에 흩어져 있는데, 오직 이 지구만이 공교롭게 중앙에 위치해 있다는 이런 이치는 없다. 이렇기 때문에 계 아닌 것이 없고 자전 않는 것이 없다고 하는 것이다. 다른 계에서 보는 것도 역시 지구에서 보는 것과 같을 것이니, 각자가 중앙이라고 여기고 다른 각각의 별을 여러 성계[衆界]라고 할 것이다. 또 칠정이 지구를 둘러싸고 있다는 것은 지구에서 보면 참으로 맞는 말이다. 만일 지구가 칠정의 한복판에 위치했다고 한다면 가능하겠지만, 뭇별의 한복판에 위치했다고 한다면 이는 우물에 앉아 하늘을 쳐다보는 격이다. 이렇기 때문에 칠정의 체(體)가 수레바퀴처럼 자전함과 동시에 맷돌을 돌리는 나귀처럼 둘러싸고 있다. 지구에서 볼 때, 지구에서 가까워 크게 보이는 것을 사람들은 해와 달이라 하고 지구에서 멀어 작게 보이는 것을 사람들은 오성(五星)이라 하지만, 사실은 모두가 동일한 성계(星界)인 것이다. 대개 오성(五星)은 해를 둘러싸고 있어 해를 중심으로 삼고, 해와 달은 지구를 둘러싸고 있어 지구를 중심으로 삼는다. 금성과 수성은 해와 거리가 가깝기 때문에 지구와 달은 궤도[包圈]의 밖에 있으며, 삼성은 해와 거리가 멀기 때문에 지구와 달은 궤도의 안쪽에 있다. 따라서 금성과 수성의 안에 있는 수십 개의 작은 별들은 모두 해를 중심으로 삼고, 삼성 주변에 있는 4~5개의 작은 별들은 모두 각 위성(緯星)을 중심으로 삼고 있다. 지구에서 보는 관점이 이러하니, 각 계(各界)에서 보는 관점도 미루어 알 수 있다. 이렇기 때문에 지구는 해와 달의 중심은 될 수 있지만 오성(五星)의 중심은 될 수 없으며, 해는 오성의 중심은 될 수 있지만 중성(衆星)의 중앙은 될 수 없는 것이다. 해도 중심이 될 수 없는데, 하물며 지구이겠는가” 하였다. …(하략)…
『담헌서』내집 권4, 보유, 의산문답