커다란 집을 짓는 자는 먼저 경남(梗楠)과 기재(杞梓)의 재목1)
을 몇십백 년을 길러서 반드시 공중에 닿고 골짜기에 솟은 다음에 그것을 동량(棟梁)으로 쓰게 되는 것이요, 만 리를 가는 자는 미리 화류(驊騮)와 녹이(騄駬)2)
의 종자를 구하여 반드시 꼴과 콩을 넉넉히 먹이고, 그 안장을 정비한 연후에 가히 연나라와 초나라의 먼 곳에 닿을 수 있는 것이다. 국가를 경영하는 자가 미리 어질고 재주있는 자를 기르는 것이 이와 무엇이 다르리오. 이것이 곧 독서당(讀書堂)을 지은 이유이다.
1)
경남과 기재의 재목 : 경(梗)은 산느릅나무, 남(楠)은 남나무, 기(杞)는 산버드나무, 재(梓)는 가래나무로 모두 목재가 좋은 수종들이다.
2)
화류(驊騮)와 녹이(騄駬) : 예전 뛰어난 말을 지칭함.
삼가 생각하건대, 본조(本朝)에 열성(列聖)이 서로 계승하여 문치(文治)가 날로 높아지고, 세종대왕
께서는 신이한 생각과 밝은 지혜가 어느 왕보다도 탁월하여 제도를 만드는 묘함이 신명(神明)과 부합되니, 전장(典章)과 문물은 유학자가 아니면 함께 제정할 수 없다고 생각하시어, 널리 문장(文章)이 뛰어난 선비를 뽑아서 집현전
을 두고 아침저녁으로 치도(治道)를 강론하고 연마하였다. 또한, 의리의 오묘함을 연구하고 많은 글의 방대함을 두루 종합하는 일은 학업을 전문으로 하지 않으면 해낼 수 없다고 생각하여, 처음으로 집현전
문신(文臣) 권채(權採, 1399~1438) 등 세 명을 보내어 특별히 긴 휴가를 주어 산사(山寺)에서 글을 편히 읽게 하였다. 말년에는 또 신숙주
(申叔舟, 1417~1475) 등 6명을 보내어, 마음껏 한가롭게 거니며 학업에 힘을 쓰게 하였다. 문종(文宗)
께서도 이러한 일을 이어 뜻이 굳건하고 시문에 풍류가 있었기에, 또 홍응(洪應) 등 6명을 보내어 휴가를 주었다. 이에 인재의 성함이 한때에 최고였고, 저작의 아름다움이 중국에 비길 만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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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 임금(성종
)께서 왕위에 오르시자 먼저 예문관을 열어 옛 집현전
의 제도를 회복하고, 날마다 경연
에 참석하시어 문적을 깊이 연구하고, 유술(儒術)을 높이며 인재를 양육하니 옛날에 비하여 보아도 더한 면이 있었다. 병신년(1476, 성종
7)에 다시 조종(祖宗)의 옛일을 회복하여 채수(蔡壽, 1449~1515) 등 6명에게 휴가를 주었고, 올 봄에 또 김감(金勘, 1466~1509) 등 8명에게 휴가를 내려 장의사(藏儀寺)에서 글을 읽게 하였는데, 옹인(饔人)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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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라간에서 음식을 만드는 사람
이 음식을 만들고 주인(酒人)
술을 빚는 일을 맡은 사람
이 단술을 마련하면 때때로 중사(中使)를 보내어 위로함이 빈번하였다. 그리고 승정원
에 교서(敎書)를 내리기를, “마땅히 성 밖에 땅을 골라 당(堂)을 열어서 독서할 곳을 만들어라” 하였더니, 승정원
에서 아뢰기를, “용산(龍山)의 작은 암자가 지금 공해(公廨)에 소속되어 있는데 버려져 있습니다. 잘 수리한다면 탁 트이고 깊숙한 곳에 있어, 자연을 벗삼아 공부에 전념할 장소로서 이곳이 가장 마땅하옵니다” 하였다. 임금이 그 청을 옳게 여기어 관원을 보내 역사를 독려하게 하니 두 달 만에 완성되었다. 건물은 겨우 20칸이었으나 여름에는 서늘하고 겨울에는 따뜻하여 그 장소로는 매우 적합하였다. 이에 독서당(讀書堂)이라 사액하고 신(臣)에게 명하여 기문을 짓게 하시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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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속동문선』권14, 「기」 독서당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