관학 유생 등이 대궐에 엎드려 상소
를 올려 진유(眞儒)
(金宏弼)·정여창(鄭汝昌)·조광조
(趙光祖)·이언적
(李彦迪)을 높여 문묘
에 종사하여 선비의 추향을 밝히고 원기를 배양하는 곳으로 만들기를 청하였다. 또 아뢰기를, “국가가 기묘년(1519년, 중종
14)의 화를 겪은 뒤에 또 을사년(1545년, 명종 1)의 화를 겪었는데 아직 국시(國是)가 정해지지 않았습니다. (그러므로) 사기(士氣)가 꺾여 학문을 하는 데 아직도 의구심을 품고 몸가짐을 단속하는 것을 오히려 해괴하고 이상한 일로 여기고 있습니다. 엎드려 바라건대, 전하께서 다시 도(道)를 중히 여기는 성의를 더하고 선비를 높이는 예(禮)를 융성하게 하시어 네 신하의 문묘
배향을 허락해 주십시오. (그래서) 한편으로는 그들의 공에 보답하고 한편으로는 이 세상을 권면 장려한다면, 사림
들이 높일 바를 알아서 학술이 모두 바른 데에서 나오게 될 것입니다” 라고 하였다.
상이 답하기를, “지금 또 특별히 소장을 올려 다시 문묘
에 종사시키기를 청하였는데 말이 간절하고 뜻이 정대해서 세 번 탄복하였다. 다만 일이 매우 중대하니 어찌 쉽게 조처할 수 있겠는가? 전에도 이에 대해 (이미 어렵다는) 뜻을 알렸는데, 이것이 바로 많은 선비들의 소망에 부응하지 못하는 이유이다” 라고 하였다.
'상소' 관련자료
참된 선비, 유도(儒道)를 참되게 체득한 학자
김굉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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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광조' 관련자료
'이언적' 관련자료
'문묘' 관련자료
'중종' 관련자료
'문묘' 관련자료
'사림' 관련자료
'문묘' 관련자료
『선조실록』권4, 3년 4월 23일 경신
관학 유생이 상소
를 올렸다. 그것을 요약하면, “중종
때에 정몽주
(鄭夢周)를 (문묘
에) 종사한 일은, 여론의 바람에 응답하고 사림
(士林)의 기운을 돋우어 준 것이니, 지극하다고 이를 만합니다. 문묘
에 종사하여 천 년동안 제사를 받은 사람이라고 하여 학문의 공이 어찌 모두 사현(四賢)1)
보다 낫겠습니까. 최치원(崔致遠)·설총(薛聰)·안유(安裕) 같은 이로 말하면, (최치원은) 문장으로 한 시대에 이름을 날렸고, (설총은) 방언(方言)으로 구경(九經)
'상소' 관련자료
'중종' 관련자료
'정몽주' 관련자료
'문묘' 관련자료
'사림' 관련자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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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교의 아홉 경전으로 보통 『시』, 『서』, 『역』, 『춘추』, 『논어』를 포함하며 나머지는 학자와 시기에 따라 다름
을 풀었고, (안유는) 학교에 공이 있었을 (뿐이지만) 오히려 영화롭게 (지금까지) 제사하고 있습니다. 하물며 우리 사현(四賢)이 도(道)를 호위하고 뒷사람들을 깨우친 공으로도 종사(從祀)의 반열에 오르지 못한다면 어찌 성대(聖代)의 흠전(欠典)이 아니겠습니까”라고 하였다.『선조실록』권4, 3년 4월 25일 임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