평산 도호부사(平山都護府使) 정차공(鄭次恭)이 상서(上書)하기를, “이 앞서는 정전(正田) 이 비록 간혹 진황(陳荒)하더라도 아울러 모두 세(稅)를 거두었는데, 그 후로는 오직 완전히 진황한 경우만을 면세(免稅)하게 하였습니다. 그러나 《원전(元典: 태조
6년(1397) 간행된 『경제육전(經濟六典)』)》에는 ‘질병이 있어서 경작(耕作)할 수 없는 자는 인리(隣里)와 족친(族親)에게 경작을 권유하여 시기를 잃지 말게 하라.’는 조문이 있는 까닭으로, 정전(正田)을 진황(陳荒)한 자가 혹은 신고하여 그 세(稅)를 면하려고 하여도 수령(守令)은 이 법에 구애되어 관찰사(觀察使)에게 보고할 수 없고, 혹 보고하는 자가 있어도 관찰사는 반드시 이 법을 들어서 꾸짖게 되니, 마침내 좋은 법의 아름다운 뜻이 아래에 미치지 못하게 되어 백성들로 하여금 헛된 세금을 바치게 하므로 심히 애석합니다. 신은 생각하건대, 우리 나라는 토지가 협소하여 전지가 없는 백성이 10분의 3에 가깝고, 전지가 있는 자가 사정이 있어서 경작할 수 없으면 인리와 족친이 아울러 경작하여 나누는 것이 곧 민간의 상사(常事)입니다. 만약 과연 기름진 땅이 있다면 어찌 진황할 이유가 있겠습니까? 초목(草木)이 무성하고 모래와 돌이 많이 섞여서 경작을 감당하지 못해도 역시 세(稅)를 거두니, 백성들의 원망이 대개 이 때문에 깊어집니다. 청컨대 이제부터는 토지를 넓게 점유하면서도 타인에게 주기를 꺼려하여 고의로 진황한 자를 제외하고, 척박(瘠薄)하여 쓰지 못하는 전지를 진황한 자는 복사전(覆沙田)의 예에 따라 전주(田主)로 하여금 신고하게 하고, 수령은 몸소 살펴서 관찰사에게 보고하여 세(稅)를 거두지 말게 함으로써 백성의 원망을 풀게 하소서. …(후략)…”
'태조' 관련자료
『세조실록』 권11, 4년 1월 17일 병자
상이 소대(召對)하니 시강관(侍講官) 정유길(鄭惟吉)이 아뢰었다. “정전(井田)의 법1)
을 비록 지금은 시행할 수 없지만, 만일 전지(田地)를 한정하여 함부로 점유하지 못하게 한다면 장차 겸병(兼幷)하는 폐단이 없어질 것입니다. 한(漢) 나라 조정에서 (이 법을) 시행하였으나 성공하지 못하였고, 전조(前朝)
【고려(高麗)】
에서도 성취하지 못하였기 때문에 지금 시행한다면 반드시 막힘이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겸병하는 폐단 때문에 부자는 전지가 서로 잇닿아 있고 가난한 사람은 송곳 하나 세울 땅도 없습니다. 똑같은 왕의 백성으로 부유함과 가난함이 서로 같지 않으니 어찌 왕정(王政)의 공정한 도리이겠습니까. 임금이 된 이는 마땅히 백성의 어려움을 유념하여야 합니다”
1)
정전법(井田法) : 중국 고대의 전지제도(田地制度). 일정한 전지를 정(井)자 모양으로 구획(區劃)하여 중앙의 100묘(畝)는 공전(公田), 밖의 800묘는 사전(私田)으로 하였다. 그 사전은 여덟 집에 나누어 주어 경작하도록 하고 중앙의 공전은 여덟 집이 공동으로 경작하여 공전에서 수확되는 곡식을 세금으로 바치고 사전에서의 수확은 개인 소득으로 하게 하였다.
『명종실록』권7, 3년 3월 28일 계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