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전이나 지금이나 화가는 각자 하나만 능숙하지, 두루 솜씨가 있지는 못하다. 그런데 김군(金君) 사능(士能)
사능은 김홍도
의 자(字)임
은 최근에 우리나라에서 태어나서, 어려서부터 그림 그리는 일을 전공하였는데 못하는 것이 없다. 인물·산수·선불(仙佛)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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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선과 부처
·화과(花果)
꽃과 열매
·금충(禽蟲)
새와 곤충
·어해(魚蟹)
물고기와 게
에 이르기까지 모두 오묘한 경지에 들었으니, 옛사람과 견주더라도 맞설 만한 사람이 거의 없다. 더욱 신선도나 화조도(花鳥圖)
꽃과 새 그림
에 솜씨가 있어 이미 한 세대에 울림이 있고 후대까지 전할 만하다. 우리나라 인물이나 풍속을 그리는 데는 더욱 능하다. 예를 들어 선비가 공부하는 모습, 상인이 시장에 나서는 모습, 나그네, 규방 여인, 농부, 누에 치는 여자, 겹방과 이층집, 황량한 산, 들판의 물에 이르기까지 그 모습을 매우 자세하게 그려서 실물과 차이가 없으니 이것은 옛날에도 일찍이 없었던 일이다. 무릇 화가들은 모두 전해 오는 그림을 따라서 배우고 익혀 솜씨를 쌓은 후에야 겨우 비슷하게 그려 낼 수 있다. 그러나 (김홍도
는) 독창적으로 터득하고 심지어 하늘의 조화를 오묘하게 얻기까지 하였다. 그러니 어찌 하늘에서 부여받은 재주가 남달라 세속을 훌쩍 넘어선 것이 아니겠는가. 옛사람은 “닭이나 개를 그리기는 어렵지만 귀신을 그리기는 쉽다.”라고 하였다. 눈으로 쉽게 볼 수 있으면 대충해서 사람을 속일 수 없기 때문이다. 세상에서는 김홍도
의 뛰어난 재주에 놀라며 지금 사람들이 미칠 수 없는 경지라고 탄식하지 않는 사람이 없다. 이에 그림을 구하려는 사람들이 날로 많아져서 비단이 산더미처럼 쌓이고 재촉하는 사람들이 문을 가득 메워 잠자고 밥 먹을 겨를도 없을 지경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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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조
(英祖) 때 김홍도
는 왕의 초상화를 그리라는 명을 받았다. 또 지금 임금
때에도 명을 받들어 왕의 초상화를 그리니 임금께서 김홍도
에게 특별히 찰방 벼슬을 내리셨다. (찰방 벼슬을 끝내고) 돌아와서는 방 한 칸을 마련하고 마당을 깨끗이 하여, 좋은 화초들을 섞어 심었다. 집 안이 맑고 깨끗하여 한 점의 먼지도 일지 않았다. 책상과 안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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앉을 때 벽에 세우고 몸을 기댈 수 있게 한 등받이
사이에는 오직 오래된 벼루와 고운 붓, 쓸 만한 묵과 흰 비단이 있을 뿐이었다. 이에 스스로 단원(檀園)이라 호를 짓고 나에게 기문(記文)
행적을 기록한 글
을 지어 주길 청하였다. 내가 알기로, 단원은 명(明)나라 때 사람 이장형
가 본떠서 자기의 호로 삼은 것은 무슨 생각에서인가? 이장형이 문학을 하는 선비로서 고상하고 밝았으며, 그림도 기이하고 전아했던 것을 사모한 것일 게다. 지금 김홍도
란 사람은, 생김새가 곱고 빼어날 뿐 아니라 속마음도 세속을 벗어나 있다. 보는 사람마다 그가 고아하게 세속을 벗어난 인물로 보통 사람들과는 다르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성품상 거문고나 피리의 우아한 소리를 좋아하여 매번 꽃핀 달밤이 되면 때때로 한두 곡조를 연주하는 것으로 즐거움을 삼았다. 그의 솜씨가 옛사람을 따라잡을 수 있는 것은 말할 것도 없거니와 그 풍채도 훤칠하여 진(晉)나라나 송(宋)나라 때의 높은 선비 중에서나 이 같은 사람을 찾을 수 있을 것이다. 만약 이장형 같은 이에게 견준다면 이미 높고 원대하여 그보다 못한 것이 없다.
명나라 때의 문인인 이유방(李流芳)으로, 장형은 그의 자(字)임
(李長蘅. 李流芳, 1575~1629)의 호이다. 김홍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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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노쇠한 나이에 김홍도
와 더불어 사포서(司圃署)
는 번번이 나의 노쇠함을 걱정하며 내 대신 수고를 해 주었으니, 이것이 내가 더욱 잊지 못하는 바이다. 요즘에는 김홍도
가 그림을 그리면 으레 나를 찾아와서 한두 마디 평을 써 달라 했으므로, 궁궐에 있는 병풍이나 두루마리까지도 더러 내 글씨로 쓴 것이 있다. 김홍도
와 나는 나이를 잊고 지위를 잊은 채 교제한 사이라 해도 괜찮을 것이다. 내가 단원
에 대한 기문을 사양할 수 없었으나, 또한 원(園) 자가 들어간 호에 대한 설명은 미처 하지 못하고 대략 >김홍도
의 평소 모습을 써 주는 것으로 응하였다. 옛날 사람들은 『취백당기』가 한기(韓琦, 1008~1075)와 백거이(白居易, 772~846)의 우열을 논한 것이라고 비판하였다. 이제 이 기문에서 이장형과 김홍도
의 우열을 논했다 하여 사람들이 혹 나를 꾸짖지 않겠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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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시대 왕실 소유의 과수원과 채소밭 등을 관리하던 관서
의 동료가 된 적이 있다. 일이 있을 때마다 김홍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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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와 김홍도
의 교제는 전후로 모두 세 번 변했다. 처음에는 김홍도
가 어린아이로 내 문하에 다닐 적이었다. 이때는 가끔 그의 솜씨를 칭찬하기도 하고 더러는 그림 그리는 방법을 일러 주기도 하였다. 중년에는 함께 같은 관청에서 아침저녁으로 같이 있었다. 말년에는 함께 예술계에 있으면서 친구의 감정을 느꼈다. 김홍도
는 나에게 기문을 구하였다. 다른 사람이 아닌 나에게 반드시 구한 것은 역시 이유가 있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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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표암고』권4, 기, 「단원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