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신편 한국사
  • 고대
  • 03권  청동기문화와 철기문화
  • Ⅰ. 청동기문화
  • 4. 주변지역 청동기문화의 비교
  • 3) 일본
  • (1) 일본 청동기문화의 성격

(1) 일본 청동기문화의 성격

 우리 나라 청동기가 일본에 전파된 시기를 일본에서는 야요이시대라고 한다. 그런데 이 야요이시대는 지역에 따라서 약간씩 차이는 있지만 그 발생지인 규슈(九州)지방의 경우는 대략 기원전 350년경에 시작하여 기원후 250년경에 끝났다고 하고 있으며 이를 200년씩 구분하여 전·중·후기로 나누기도 한다.

 일본 최고의 청동기는 후쿠오카현(福岡縣) 이마카와(今川)遺蹟 출토의 銅鏃이다.0532)酒井仁夫·伊崎俊秋,≪今川遺跡≫(津屋崎町文化財調査報告書 4, 1981). 이 동촉은 有莖式인데 재가공된 흔적이 있으며 板付Ⅰ式 토기와 함께 출토되었으므로 야요이시대 前期前半에 편년된다. 당시 청동끌도 함께 채집되었는데 이 끌은 古朝鮮式銅劍0533)沈奉謹·朴恩貞,<韓國 靑銅劍 系譜와 그 同伴遺物>(≪韓國上古史學報≫10, 韓國上古史學會, 1992).의 莖部를 재가공한 듯하며 시기적으로는 이마카와 출토 동촉과 거의 같다고 추정된다. 그러나 야요이시대 초기 청동기는 그 출토 예가 적어서 보편적인 것이었다고는 생각하기 어렵다. 본격적으로 우리 나라 청동기가 일본에 전파된 시기는 전기 말부터이며 甕棺 형식으로는 金海式단계이다. 이 때 청동기는 한국식동검·동모·동과, 그리고 다뉴세문경이 세트로 이루고 있다.

 지금까지의 일본 최고의 동검은 사가현(佐賀縣) 우기쿤덴(宇木汲田) 18호 甕棺墓에서 출토된 것이다.0534)唐津灣周邊遺跡調査委員會編,≪末盧國≫(1982). 이 옹관묘는 김해식으로, 鎬線이 抉入部 하단까지 있고 결입부 하단에서 關部까지 완만한 곡선을 이루고 있다. 또 후쿠오카현 요시타게타가기(吉武高木) 3호 목관묘에서는 한국식동검·동모·동과·다뉴세문경이 출토되었다.0535)福岡市歷史資料館,≪特設展圖錄早良王墓とその時代≫(1986).
福岡市敎育委員會,≪吉武高木≫(福岡市埋藏文化財調査報告書 143, 1986).
동검은 전술한 우기쿤덴 18호 옹관묘 출토의 것과 동일한 형식이며 동모·동과도 세형이다. 이 청동기와 함께 죠노코시(城ノ越)式으로 추정되는 토기가 출토되어 시기적으로 중기초두에 해당됨을 알 수 있다. 한편 같은 중기초두에 해당하는 2·4호 목관묘에서도 한국식동검이 출토되었으나 이것은 호선이 관부까지 이어졌는데 이와 같은 세형동검들은 모두 우리 나라에서 전파되었다는 설이 일반적이다.

 그러나 최근 키타규슈(北九州) 지역을 중심으로 동검 용범이 후쿠오카현 시카노시미(志賀島) 가쯔바(勝馬)유적0536)森貞次郞·乙益重隆·渡邊正氣,<福岡縣志賀島の彌生遺跡>(≪考古學雜誌≫46-2, 東京;考古學會, 1960).
小田富士雄,<銅劍·銅矛國産開時期の再檢討-近年發見の鑄型資料を中心として2->(≪古文化談叢≫15, 九州古文化硏究會, 1985).
·오타니(大谷)유적,0537)佐士原逸男,≪大谷遺跡-福岡縣春日市大字小倉所在遺跡≫(春日市文化財調査報告書 5, 1979). 사가현 소우자(惣座)유적0538)小田富士雄, 앞의 글.에서 출토되었고, 동모 용범이 사가현 소우자 및0539)小田富士雄, 위의 글.와 요시노가리(吉野ケ里)유적0540)佐賀縣敎育委員會,≪環濠集落吉野ケ里遺跡槪報≫(1990).
佐賀縣敎育委員會,≪吉野ケ里遺跡發掘調査槪報≫(1990).
에서 출토되었다. 사가현 나베시마 모토무라미나미(鍋島本村南)유적0541)小田富士雄,<銅劍·銅矛國産開始期の再檢討(2)-近年發見の鑄型資料を中心として->(≪古文化談叢≫23, 1990).에서는 동과 용범이 출토되어 우리 나라에서 청동기를 받아들인 뒤 얼마 안되어 곧 일본에서 倣製가 시작되었음을 알 수 있다.

 그리고 세형의 靑銅利器는 그 뒤 중세형의 靑銅祭器로 변화하는데 사가현 아네(姉)유적,0542)堤安信,<佐賀縣千代田町姉貝塚出土の銅矛·銅劍の鑄型>(≪考古學雜誌≫70-2, 1984). 효고현(兵庫縣) 타노우(田能)유적0543)尼崎市敎育委員會,≪田能遺跡發掘調査報告書≫(1982).에서 동검 용범이 출토되고 있어서 중기 중반경에 제작되었음을 시사하고 있다.

 중세형 청동제기가 부장된 예에서 그 존속 기간을 추정한다면 먼저 중세형동검은 후쿠오카현 수구오카모토(須玖岡本) D지점과0544)島田貞彦·梅原末治,≪筑前須玖史前遺跡の硏究≫(京都大 文學部 考古學硏究報告 11, 1930).
岩永省三,<須玖遺跡D地點出土靑銅利器の再檢討>(≪MUSEUM≫372, 東京國立博物館, 1982).
미네(峰)유적0545)中山平次郞,<太宰府附近に於けゐ彌生式系統遺跡調査(1)>(≪考古學雜誌≫20-6, 1930). 옹관묘에서 출토되고 있어서 중기후반까지 존재하였던 것으로 추측된다. 중세형 동모는 후쿠오카현 타테이와(立岩) 10호 옹관묘에 부장되어 있으므로0546)福岡縣飯塚市敎育委員會,≪立岩遺跡≫(1977). 중기후반까지 존재하였던 것으로 추정된다.

 중기후반이 되면 새로이 中國鏡이 부장되기 시작한다. 후쿠오카현 타테이와 10호 옹관묘에서는 重圈文淸白鏡 등 前漢 후기의 異體字銘帶鏡 6점, 중세형동모 1점, 철검 1점 등이 부장되어 있었고 옹관 형식은 타테이와식이며 중기후반으로 편년되는 기준 자료이다. 그 밖에도 이 시기의 중요한 유적으로서 후쿠오카현 미쿠모(三雲) 미나미쇼지(南小路)유적과0547)靑柳種信,≪柳園古器略考≫(1822).
柳田康雄,≪三雲遺跡-南小路地區篇-≫(福岡縣文化財調査報告書 69, 1985).
수구오카모토유적을 들 수 있다. 미나미쇼지 1호 옹관묘는 옹관 형식은 알 수 없지만 여기에서 重圈彩畵鏡·四乳雷文鏡·連弧文淸白鏡 등의 이체자명대경 30면 이상, 세형동모 1점, 유병식세형동검 1점, 중세형동모 1점, 중세형동과 1점, 유리벽 8면 이상, 금동제사엽좌금구 8점 이상 등 대량의 부장품이 출토되었다. 그 가운데 중권채화경은 河南省 信陽縣 長臺關楚墓 출토품과0548)樓宇棟,≪信陽楚墓≫(中國田野考古報告集考古學專刊丁種 30, 1986). 유사하므로 戰國鏡이라고 추정되며 사유뢰문경은 地文을 가지고 있어 前漢 전기의 것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러나 나머지 이체자명대경은 전한 후기 것이므로 전자는 약 200년 가량 전세된 것이라는 점과 이 옹관이 전기한 타테이와 10호 옹관묘와 같은 형식에 속하는 것을 알 수 있다. 같은 예는 수구오카모토 D지점 옹관묘에서도 볼 수 있다. 이 옹관묘도 형식은 알 수 없으나 草葉紋鏡·星雲紋鏡·이체자명대경 등 30면 이상의 동경, 多桶式銅劍 1점, 중세형동검 1점, 세형동모 4점, 중세형동모 2점, 중세형동과 1점, 유리벽 등 많은 부장품이 출토되었다. 그 중에서 초엽문경은 전한 전기, 성운문경은 전한 중기에 해당하고 중권문청백경 등의 이체자명대경은 전한 후기에 해당하는 것이다. 따라서 이 옹관묘의 시기도 立岩期, 즉 중기후반에 해당하는 것으로 생각된다. 이와 같이 중국경의 출현기인 중기후반의 특징으로서는 ① 전한 후기경이 부장되는 점, ② 전한 후기경과 함께 전국∼전한 중기의 고식경도 포함되어 있는 점, ③ 대량의 동경이나 청동기를 부장한 옹관묘가 있는 점, ④ 철기를 부장한 분묘가 출현하는 점 등을 들 수 있다.

 야요이문화 후기전반이 되면 옹관묘에 方格規矩鏡이 부장된다. 후쿠오카현 이하라야리미조(井原鎚溝) 옹관묘0549)靑柳種新, 앞의 책.
梅原末治,<筑前國井原發見鏡片の複原>(≪史林≫16-3, 京都大, 1931).
에서는 20면 이상의 방격규구경이 출토되었는데 그 중에서 18면이 복원 가능하였다. 이 방격규구경은 ‘漢有善銅’이나 ‘新有善銅’의 명문이 있는 전한 전기·新代의 동경이며 後漢代의 방격규구경은 포함되지 않는다. 또 사가현 사쿠라노바바(櫻馬場) 옹관묘0550)杉原莊介·原口正三,<佐賀縣櫻馬場遺跡>(≪日本農耕文化の生成≫, 日本考古學協會 編, 1961).에서는 후기초두의 옹관에 방격규구경 2면과 철도·銅釧·把形銅器 등이 부장되어 있었다. 이 방격규구경 역시 후한대보다 약간 이른 신대의 것으로 알려져 있다.

 이 시기가 되면 분묘에 청동무기형 제기를 부장하는 예는 대부분 없어지고 생토 속에 매납하는 예가 늘어난다. 이들 청동제기의 연대결정은 용범이나 토기와의 동반 예에서 추정이 가능하다. 즉 중광형동모에 대해서는 사가현 야수나가타(安永田)유적0551)藤瀨 博·山田正,<佐賀縣安永田遺跡の本照射-銅鐸鑄型出土地點の性格解明->(≪考古學ジヤ-ナル≫195, 1981).의 용범이 중기 말에서 후기초두로 편년되는 토기와 동반 출토되었으며, 對馬ハロウ A지점에서는 후기중엽의 5호 석관묘0552)豊玉町敎育委員會,≪對馬豊玉町ハロウ遺跡≫(1980).에서 중광형동모가 출토되고 있어서 중기 말에서 후기중반에 해당할 가능성이 높다. 또 이 시기에는 한경을 모방한 방제경이 출현한다. 사가현 후타쯔카산(二塚山) 46호 옹관묘0553)佐賀縣敎育委員會,≪二塚山-佐賀縣東部中核工業團地建設に伴う埋藏文化財發掘調査報告書-≫(佐賀縣發掘調査報告書 46, 1979).에서는 철모와 함께 重圈文日光鏡系 방제경Ⅰb식이 출토되었다. 이것은 영천 어은동 출토거울0554)梅原末治·藤田亮策·小泉顯夫,<南朝鮮に於ける漢代の遺跡>(≪大正11年度古蹟調査報告書≫2, 朝鮮總督府, 1925).과 같아서 우리 나라에서 제작되었을 가능성이 높다.

 야요이 후기중반이 되면 한경을 부장한 분묘는 감소한다. 후기중반의 나가사키현(長崎縣) 카라카미(唐神)유적0555)水野精一·岡崎敬,<長崎縣 壹岐郡カラカミ遺跡>(≪日本考古學年報≫ 10, 日本考古學協會, 1957).에서 방격규구경이 출토되었으나 깨어서 구멍을 뚫은 破鏡이었다. 앞에서 설명한 것처럼 후기전반에서는 전한 말∼후한 전기의 방격규구경·細線式獸帶鏡 등이 부장되고 있으므로 후기중반에서는 후한중기의 四葉座內行花文鏡의 출토가 예상된다. 그러나 이러한 사엽좌내행화문경을 부장하는 분묘는 후기중반에는 거의 보이지 않고 후기후반에서 종말기 단계에 나타나므로 후기중반부터 전래되기 시작한 것을 알 수 있다. 그것은 후한 세력의 쇠퇴와 관련되는 것으로 생각된다. 이러한 한경의 감소에 따라 키타큐슈에서도 방제경을 제작하기 시작했다. 이 시기의 방제경은 후쿠오카현 이이우지바바(飯氏馬場) 석관묘0556)高倉洋彰,<彌生時代小形倣製鏡ついて>(≪考古學雜誌≫58-3, 1972). 출토경과 같은 내행화문일광경계 및 중권문일광경계 방제경 Ⅱa식이다.

 청동 제기는 이 시기 중광형에서 광형으로 변화한다. 나가사키현 쓰시마 토우노쿠비(對馬塔ノ首) 3호 석관묘0557)長崎縣敎育委員會,≪對馬-淺茅灣とその周邊の考古學調査-≫(長崎縣文化財調査報告書 17, 1974).에서 후기중반에서 후반의 토기와 함께, 쓰시마키사카(對馬木板) 5호 석관묘0558)坂田邦洋,≪對馬の考古學≫(繩文文化硏究會, 1976).에서는 후기후반에서 종말의 토기와 광형동모가 동반 출토되었다.

 야요이 후기후반에서 종말기가 되면 한경의 파경을 분묘에 부장하는 예가 많아진다. 종말기의 후쿠오카현 노카타나카바루(野方中原) 1호 석관묘0559)柳田純孝,≪福岡市野方中原遺跡調査槪報≫(福岡市埋藏文化財調査報告書 30, 1974).에서는 후한 후반의 半肉彫獸帶鏡이 출토되었다.

 그러나 후쿠오카현 미쿠모테라구찌(三雲寺口) 2호 석관묘0560)柳田康雄,≪三雲遺跡 Ⅳ≫(福岡縣文化財調査報告書 65, 1983).에서 蝙蝠座內行花文鏡, 바바산(馬場山) 41a호 토광묘0561)小田富士雄,≪馬場山遺跡≫(北九州市埋藏文化財調査會, 1975).에서는 雙頭龍文鏡 등 후한 중기의 거울이 출토되고 있으므로 약 100년간에 걸쳐 전래되었음을 추정할 수 있다. 종말기의 양상을 잘 나타내는 예로서 후쿠오카현 히라바루(平原) 분묘를 들 수 있다.0562)原田大六,≪平原彌生古墳-大日靈貴の墓≫(平原彌生古墳調査報告書編執委員會, 1991). 여기서는 박제방격규구사신경이나 방제내행화문경 등 모두 39면의 동경이 출토되었다. 즉 기원후 1세기 중반경의 것이므로 일괄 유입된 뒤 약 200년 가까이 전래되었음을 알 수 있다. 이러한 야요이 후기중반부터 보이는 동경의 전래는 종말기에는 거의 끝나고 곧 三角緣神獸鏡이라는 새로운 동경이 출현하여 전방후원분에 부장되기 시작한다. 그 배경에는 큰 사회 변동이 예상되며 이 시기 일본은 야요이시대가 끝나고 古墳時代를 맞이하게 된다. 특히 삼각연신수경에 ‘景初三年’(기원후 239년), ‘正始元年’(기원후 240년)이라는 기년명이 있어 야요이시대가 기원후 3세기 중반경에는 끝난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그리고 기나이(畿內)지방에서는 중기 이후 특수한 청동제 銅鐸文化가 유행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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