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신편 한국사
  • 고대
  • 05권  삼국의 정치와 사회 Ⅰ-고구려
  • Ⅱ. 고구려의 변천
  • 3. 5∼6세기의 대외관계
  • 2) 백제·신라와의 관계

2) 백제·신라와의 관계

 고구려는 남진과정에서 고국원왕이 백제 근초고왕에게 敗死하였는데 이 사건은 이후 5세기대의 양국관계를 결정짓는 주요한 요인으로 작용하게 되었다. 백제와 원수지간이 된 고구려는 소수림왕·고국양왕대에 걸쳐 백제를 적극적으로 공략하였다. 그러나 백제의 반격으로 양국은 약 20여 년간 일진일퇴의 공방전을 벌였다. 이러한 과정에서 고구려는 백제견제책의 일환으로 신라를 끌어들였다. 백제 禿山城主의 신라 망명문제를 놓고 백제·신라의 기존 우호관계에 금이 간 것을 틈타 고구려가 신라에 접근하였던 것으로 보여진다. 내물왕 22년(377)과 26년에 신라사신이 前秦에 파견되고 있는 기록을 통해서 당시의 양국관계를 추정해 볼 수 있다.274)≪資治通鑑≫권 104, 晉紀 26, 孝武帝 太元 2년.
≪三國史記≫권 3, 新羅本紀 3, 내물이사금 26년.
신라사신이 전진에 갈 수 있었던 배경에는 고구려의 도움이 컸던 것으로 추정된다는 것을 감안해 볼 때275)李丙燾,≪韓國史≫古代篇(震檀學會, 1959), 401∼402쪽. 당시의 양국관계가 상당히 진전되어 있었음을 알 수 있다. 그렇다면 당시 신라의 외교정책이 고구려와의 연결을 도모하는 방향으로 이미 전환되었음을 의미한다.

 이와 같은 양국의 관계 속에서 고구려는 광개토왕 2년(392) 신라에 修好使를 파견하였다.276)≪三國史記≫권 18, 高句麗本紀 6, 고국양왕 9년. 이에 신라는 고구려의 강성함을 인정하고 實聖을 인질로서 고구려에 파견하였다. 이렇게 하여 양국 사이에 인질외교가 시작되었다. 고구려로서는 신라와의 우호관계를 통하여 백제를 견제할 수 있었으므로 대백제공략에 유리한 위치를 차지할 수 있었다. 신라로서도 어렵게 즉위한 내물왕의 정치적 안정확보를 위하여는 고구려의 후광이 필요하였던 국내의 사정이 있었다.277)盧重國, 앞의 글, 59∼60쪽. 양국 사이의 이러한 이해의 일치에 따라 성립된 우호관계는 계속 유지되어 갔다. 그런 가운데에서 백제와 왜·가야 연합군이 신라에 침범하자 신라왕은 고구려에 구원을 요청하였고, 광개토왕은 즉위 10년(400) 낙동강유역까지 진출하여 신라를 구원해 주었던 것이다. 이 때 고구려는 신라구원 및 수호를 명분으로 삼아 신라영토 안에 자국 군대를 주둔시켰던 것으로 보여진다.<中原高句麗碑>에 보이는 ‘新羅土內幢主’는 그 실상을 기록한 것으로 믿어진다. 고구려는 이 주둔군을 기반으로 하여 신라의 내정에까지 간섭하는 등 고구려의 영향력을 확대시켜 나갔다. 그 한 예로서 신라 눌지왕의 즉위에 고구려가 개입되었음은 잘 알려진 사실이다.278)≪三國史記≫권 3, 新羅本紀 3, 눌지마립간 즉위년.

 이 당시 양국관계는 신라가 정치적 안정을 위하여 고구려에 인질을 보내는 인질외교였던 반면에 고구려는 신라를 ‘屬民’으로서 ‘朝貢’을 바치는 나라로 인식하고 있었다. 당시 고구려는 급성장한 국력을 배경으로 하여 華夷論的 천하관에 의한 王者觀念이 형성되어 주변 세력들에게 차등적인 복속관계를 설정하고 있었다.279)<광개토왕릉비>에는 고구려의 주변세력들에 대하여 朝貢·歸王·奴客 등의 차등관계를 설정하고 있으며, 또한 고구려왕을 太王 또는 聖王(<牟頭婁墓誌>)이라 한 데 비하여 百殘主(백제왕) 또는 東夷寢錦(신라왕)으로 표현하고 있다. 이에 대하여는 武田幸男,<高句麗好太王碑文にみえる歸王について>(≪末松保和博士古稀紀念古代東アジア史論集≫上, 吉川弘文館, 1978) 참조. 고구려는 신라에 대하여도 고구려의 우월 및 자존의식을 바탕으로 하여 그들 나름대로의 천하관에 따라280)당시 고구려인들이 가지고 있던 天下觀에 대한 연구는 다음과 같다.
梁起錫,<4∼5C 高句麗王者의 天下觀에 對하여>(≪湖西史學≫11, 1983).
盧泰敦,<5세기 金石文에 보이는 高句麗人의 天下觀>(≪韓國史論≫19, 서울大 國史學科, 1988) 참조.
조공관계를 요구하였던 것이다. 실제로<廣開土王陵碑>에는 신라 내물왕이 직접 고구려에까지 와서 조공하였음을 말해주는 기록이 있다.281)盧重國, 앞의 글, 65쪽. 경주 호우총에서 광개토왕을 기념하기 위한 것으로 보여지는 ‘乙卯年國岡上廣開土地好太王壺杅十’이란 명문이 새겨진 유물이 출토된 것은 당시의 양국관계를 나타내 준다.282)이와 관련된 연구는 다음과 같다.
金載元,≪壺杅塚과 銀鈴塚≫(國立博物館, 1948).
鈴木治,<慶州壺杅塚とその紀年について>(≪天理大學學報≫29, 1959).
盧泰敦,<廣開土王壺杅銘文>(≪譯註 韓國古代金石文≫1, 韓國古代社會硏究所, 1992).
또한<중원고구려비>에는 고구려가 신라를 ‘東夷’라 하고 신라왕을 ‘東夷寐錦’으로 지칭하며 의복을 賜與하는 등의 기록이 보이고 있어 고구려인의 신라에 대한 우월의식을 엿볼 수 있다.

 한편 이무렵 백제에서는 枕流王의 短命(385)에 따른 정변이 일어나는 등 내부적으로 왕권의 동요가 있었다.283)盧重國,≪百濟政治史硏究≫(一潮閣, 1988), 132∼136쪽. 정변에 의하여 변칙적으로 즉위한 辰斯王은 왕권의 신장을 위해 토목공사를 벌이는 등의 조치를 취하였으나 그 역시 정변에 의해 희생된 것으로 보여진다.284)≪日本書紀≫권 10, 應神天皇 3년 임진. 이처럼 백제 지배세력간의 갈등에 따른 정치불안은 고구려의 대백제공략에 유리하게 작용하였다. 광개토왕은 즉위년부터 백제공략에 나섰던 것으로 보여지는데 고구려군의 공세에 대해서는 다음의 기록이 참고된다.

고구려왕 談德(광개토왕)이 4만 명의 병력을 이끌고 북변을 공격해 와 石峴 등 10여 성을 함락시켰다. (진사)왕은 담덕이 용병에 능하다는 말을 듣고 감히 나가 맞서 싸우지를 못하니 漢水(한강) 이북의 여러 성이 함락되었다(≪三國史記≫권 25, 百濟本紀 3, 진사왕 8년).

 이는 고국원왕의 전사 이후 양국이 일진일퇴의 공방전을 벌이던 종래의 상황과는 달라졌음을 나타내는 것이다. 고구려는 계속 백제를 공격하여 마침내 백제수도 한성에 쳐들어가 阿莘王의 항복을 받고 돌아오는 대전과를 거두게 되었다. 이 때 백제는 한때나마 고구려왕에 대한 ‘奴客’으로서 ‘歸王’의 형태로 고구려 세력권에 예속되지 않을 수 없었던 것으로 보여진다.285)武田幸男, 앞의 글, 79∼88쪽. 백제는 점차 압박해 오는 고구려에 대항하기 위하여 왜·가야와 연합을 시도하였던 것으로 나타나고 있다. 이에 관하여<광개토왕릉비>의 기록에 의하면 백제는 왜·가야로 하여금 고구려의 부용세력화한 신라를 공격케 하였다. 다급해진 신라는 고구려에 도움을 요청할 수밖에 없었고 이에 따라 광개토왕의 ‘庚子年 출병’이 있었던 것이다.

 당시 고구려는 백제공략에 온 힘을 기울이고 있었다.<광개토왕릉비>에 기록된 훈적 내용 가운데 가장 많은 부분을 차지하고 있는 것도 백제공략에 관한 것이었다. 한편 고구려는 중국방면에서의 상황이 변하면서 북연을 사이에 두고 북위와 대립하게 되었고, 이후 북위 및 송과의 복잡한 외교관계 때문에 대백제관계에 소홀하게 되었던 것으로 보여진다. 백제는 이 상황을 틈타 失地회복을 위해 고구려를 수 차례 공격하였으나 실패하였다.

 중국방면에서의 정치적 안정으로 인하여 西進에 한계를 느낀 고구려는 장수왕 15년(427) 평양천도를 통하여 남진정책을 본격화하였다.286)고구려의 평양천도와 연관된 문제에 대하여는 徐永大,<高句麗 平壤遷都의 動機>(≪韓國文化≫2, 서울大 韓國文化硏究所, 1981) 참조. 이에 위기감을 느낀 백제와 신라는 433년 우호관계를 맺어 고구려에 대항하고자 하였다. 백제는 신라와의 교섭을 통하여 고구려를 견제할 수 있었고 신라는 백제와의 연합을 통하여 고구려의 간섭에서부터 벗어날 수 있다는 양국의 이해관계가 일치되었던 것이다. 백제측의 적극적인 노력에 의해 양국의 우호관계가 성립됨으로써287)433년에 百濟는 新羅에 和好를 제의하였고 그 이듬해에는 良馬 2匹과 흰 매를 신라에 예물로 보냈다. 이에 신라는 그 화답으로 良金과 明珠를 백제에 보냄으로써 양국간에 우호 분위기가 조성되었다. 백제는 고구려와 약 30여 년에 걸친 치열한 상쟁을 전개할 수 있었다.

 한편으로 백제는 왜 및 송과의 외교관계를 지속시켰을 뿐만 아니라 물길 및 북위와의 연결도 도모하는 등 고구려를 견제하기 위한 외교적인 노력을 전개하였다. 특히 백제 蓋鹵王은 고구려와 북위간의 불편한 관계를 틈타 북위와의 연합을 시도했지만 당시 고구려의 강성함을 인정하고 있던 북위측의 거절로 무산되고 말았다.

 고구려와 신라의 관계는 나제동맹을 계기로 하여 약간씩 변화해 갔던 것으로 보여진다. 그것은<광개토왕릉비>에 신라가 고구려의 屬民으로서 朝貢하는 관계로 표현되어 있던 양국관계가, 5세기 장수왕대에 건립된 것으로 추정되는<중원고구려비>에는 兄弟關係로 기록되어 있어 상당한 차이를 발견할 수 있기 때문이다.288)鄭雲龍,<5∼6世紀 新羅·高句麗關係의 推移>(≪新羅의 對外關係史 硏究≫, 新羅文化祭學術發表會論文集 15, 1994), 45쪽 이러한 변화 속에서 눌지왕 34년(450) 신라에 의한 고구려 장수의 살해사건이 일어났고, 이에 대한 고구려의 보복침공이 있었다.289)≪三國史記≫권 3, 新羅本紀 3, 눌지마립간 34년. 이 사건을 계기로 하여 양국의 우호관계는 깨졌다. 고구려는 신라측의 사과에 만족하고 일단 이 사건을 마무리하려 하였다. 그러나 백제와의 연합을 발판으로 한 신라측의 반고구려적 분위기는 점차 거세어 갔던 것으로 보여진다. 마침내 신라는 광개토왕대 이래 자국 영토내에 주둔하고 있던 고구려군을 제거해 버린 것이다.290)≪日本書紀≫권 14, 雄略天皇 8년 2월. 이후 양국관계는 극도로 냉각되어 고구려는 신라에 대한 보복조치로서 신라 북방의 요충지인 悉直城(삼척)을 공격하였다. 당시 고구려가 신라의 중심부까지 공격하지 않았던 배경에 대하여 백제와의 심각한 대치관계 때문으로 해석하는 견해도 있다.291)鄭雲龍, 앞의 글, 51∼53쪽. 신라는 고구려의 본격적인 침공에 대비하기 위하여 국경지역에 성곽을 축조하고 수리하였을 뿐만 아니라 왕경인 경주에 대한 방비조치를 취하였다.292)閔德植,<新羅王京의 防備에 關한 考察>(≪史學硏究≫39, 1987), 56∼57쪽.

 5세기 후반 고구려는 백제와 신라의 우호적인 관계가 구체화됨에 따라 양국을 번갈아가며 공격하는 등 남진정책을 적극적으로 추진해 나갔다. 5세기말까지의 전투양상을≪三國史記≫에서 추출해 보면 대백제전이 4회, 대신라전이 8회로 나타나고 있다. 이는 신라의 이탈을 경계한 고구려가 신라를 주요 공격대상으로 삼았음을 짐작케 한다. 이에 자극된 백제와 신라는 상호 군사적인 협력을 통하여 대처하였다. 장수왕 43년(455) 고구려가 백제를 침범하자 신라 눌지왕이 백제에 구원병을 파견하면서293)≪三國史記≫권 3, 新羅本紀 3, 눌지마립간 39년. 시작된 양국의 군사동맹은 이후 자비왕 18년(475) 장수왕의 백제 공격시에 신라가 1만 명의 구원병을 파견해 주었고,294)≪三國史記≫권 26, 百濟本紀 4, 문주왕 즉위년. 또한 장수왕 69년 고구려의 신라 침입시에도 백제가 가야와 연합군을 편성하여 파견하는 등의295)≪三國史記≫권 3, 新羅本紀 3, 소지마립간 3년. 구체적인 행동으로 나타났다. 백제와 신라의 군사적인 연합에도 불구하고 고구려 장수왕은 그 63년에 백제 수도 한성을 함락시키고 개로왕을 살해하였을 뿐만 아니라, 69년에는 신라를 침범하여 彌秩夫(興海)지역까지 진출하는 등 백제·신라에 군사적 압박을 계속해 나갔다.

 고구려 장수왕에 의해 큰 타격을 입은 백제와 신라는 군사적인 협력을 더욱 강화해 나가지 않을 수 없었다. 이후 고구려의 남진정책은 충청북도 중북부의 내륙지방을 중심으로 하여 전개되었다. 이 당시 고구려군의 전선은 鎭川―槐山―鳥嶺선이었는데296)金秉柱,<羅濟同盟에 관한 硏究>(≪韓國史硏究≫46, 1984), 44쪽. 백제와 신라측의 강력한 반발로 인하여 큰 성과를 거두지 못한 것으로 짐작된다. 교착상태를 보이던 고구려의 전선은 이후 6세기에 접어들면서 혼인동맹으로까지 발전하게 된 백제·신라측의 협공과 신라의 강력한 부상에 따라 점차 위축되지 않을 수 없었다.

<孔錫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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