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구려는 혈연 및 지연공동체인 那의 연합체를 중심으로 하여 고대국가로 성장해 갔다. 따라서 국가의 중심 나가 어느 것이었느냐 하는 문제는 있지만 적어도 5部를 이룬 5개 나의 족장층이 자연히 국가체의 지배층을 형성하였다. 이들은 加라는 ‘족장’·‘왕’의 의미를 갖는 官名을 갖고, 대대로 소속 집단에 대하여 지배권을 행사하면서 그 힘을 바탕으로 중앙정부에서 일정부분의 권력을 향유할 수 있었다. 이들 중에는 중앙정부에서 구체적인 관직을 갖는 이도 있었지만 그의 가계가 갖고 있는 본래의 지배력에 의해 중앙에서도 그 지위를 인정받을 수 있었다.
이들은 국초에는 ‘兄’이라는 명칭을 띠고 있는 관직을 차지하였는데 점차 보다 전문적인 관직이었을 ‘使者’류의 관직에도 취임하게 되었다.651)金哲埈,<高句麗·新羅의 官階組織의 成立過程>(≪李丙燾博士華甲紀念論叢≫, 1956 ;≪韓國古代社會硏究≫, 知識産業社, 1975, 137쪽). 이들 귀족들은 국초에서부터 이미 5부의 귀족층 내에서만 혼인을 하여 배타적인 지배층을 구성하고 있었다. 예를 들면 고구려초에 계루부 왕실과 연나부 明臨氏와의 지속적인 혼인관계도652)李基白,<高句麗王妃族考>(≪震檀學報≫20, 1959), 88쪽. 이같은 동일신분내 결혼의 실상을 보여주고 있다.
귀족은 5부 나아가 본래의 5나의 족장층이 주류를 이루었지만, 국가의 영토가 확장되면서 새로 편입된 지역의 대족장층의 일부도 귀족에 편입되었을 것이다.≪三國史記≫태조대왕본기 22년조에 의하면 藻那를 정벌하고 그 왕자를 포로로 하였는데 그를 古鄒加로 삼았다는 사실에서 유추해 볼 수 있다. 이외에도 안악 3호분과 관련된 선비족 출신의 冬壽와 같은 자는 고구려에 투항하여 상당한 예우를 받는 귀족으로 살아 갔음을 볼 수 있다.
귀족들은 성씨를 가지고 있었다. 이들은 자신들의 가계의 출현을 설명해주는 나름의 설화를 가지고 있었다고 보이는 만큼, 자신들의 존재에 대한 자부심 속에서 동아시아의 왕족이나 지배층들이 가지고 있던 성씨를 갖게 되었다. 성씨는 대개 그들의 출현의 연원과 관련이 있었다. 왕실의 解씨나 高씨, 왕비족이었던 연나부의 于씨는 물론이고, 샘에서 나왔다는 연개소문가의 淵씨를653)<高句麗泉男生墓誌銘>(李蘭暎,≪韓國金石文追補≫, 中央大 出版部, 1968), 255쪽. 위시하여, 많은 밥을 짧은 시간에 할 수 있는 성능좋은 쇠솥을 가지고 있었다는 負鼎씨,654)≪三國史記≫권 14, 高句麗本紀 2, 대무신왕 4년 12월. 그리고 지역의 족장이나 유력자로서 성씨를 갖게 된 克씨·仲室씨·少室씨·大室씨 등이 그것이다.655)앞의 3개의 성씨는≪三國史記≫권 13, 高句麗本紀 1, 시조 동명성왕 즉위 기사에 보이며, 대실씨는≪三國史記≫권 14, 高句麗本紀 2, 대무신왕 15년 3월조 기사에 보인다. 특히 대실씨·중실씨·소실씨라는 성씨에서는 이들 성씨의 명칭에 상호 대비되는 면이 있음을 볼 수 있는데, 이 3성씨의 성씨 취득과정의 순서나 이들 귀족들의 세력의 정도가 성씨명에 반영되고 있었다고 여겨진다.
이같은 고구려의 귀족은 성씨를 갖는 존재들인 만큼, 그 귀족들의 가계와 연원 등이 적혀있는 일종의 귀족 씨족의 명부인 성씨록이 있었을 가능성도 있다고 보인다.≪삼국사기≫에 성씨 취득의 연원들이 적지않게 보이고 있는 것은 바로 지금은 존재하지 않지만 성씨록이 있었기에 가능한 것이 아니었을까 하는 생각도 든다.
귀족들은 소속된 가문의 힘과 자신의 능력에 따라 국가의 주요관직을 독점하였다. 왕족의 경우 좀더 우대되었던 것으로 보이며 이들의 관직 취임에 제한은 없었던 것으로 보인다. 대체로 5부의 중심귀족들은 자기 부의 세력과 본인의 능력에 따라 모든 관직에 취임할 수 있었다. 집안의 권력이 클수록 初任의 관등을 보다 적은 나이에 받은 듯하며 승진에도 유리하였다. 연개소문의 아들 男生은 불과 9세에 先人이라는 최하급 관등을 가진 이래 15세에 中裏小兄, 18세에 中裏大兄을 거쳐 승진을 거듭하여 28세에 莫離支에 올랐다.656)<高句麗泉男生墓誌銘>(李蘭暎, 앞의 책).
이 글의 내용은 집필자의 개인적 견해이며,
국사편찬위원회의 공식적 견해와 다를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