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신편 한국사
  • 고대
  • 07권  고대의 정치와 사회 Ⅲ-신라·가야
  • Ⅲ. 신라의 대외관계
  • 1. 중국과의 관계
  • 4) 대당사행의 유형

4) 대당사행의 유형

 신라가 당나라에 사절을 파견하는 일은 원칙적으로 조공이란 이름으로 이루어진다. 중국의 왕조가 교체되거나 황제가 바뀌면 보냈으며, 신라왕이 즉위하면 책봉을 위해서 보낸다. 대체로 신왕의 즉위 초 정월에 ‘遣使入唐朝貢’이나 ‘遣使入唐獻(貢)方物’이라 하여 조공과 동시에 방물(토산물)을 보냈다. 그러므로 조공이라는 외교절차에는 문물교환이 부수적으로 따르게 된다. 따라서 이 때 당은 책봉이라는 정치적 승인과 ‘賜物有差’라는 답례를 하게 된다. 그러나 중국측 답례는 비교가 안될 정도로 빈약하다.

 신라의 견당사의 이름은 진덕왕 이후에 나타난다. 이들은 당대의 대표적인 인물로 주로 왕족이 선발되었는데282)고구려의 경우는 桓雄(세자, 영류왕 23년), 任武(왕자, 보장왕 6년), 福男(태자, 보장왕 25년) 등 모두 왕자였고, 지위는 莫離支여서 외교사절의 중요성을 엿볼 수 있다. 구체적 명단은<표 4>와 같다.

인 명 관 등 파 견 연 대 사행목적 귀국 후 활동
邯帙許   진덕왕 2년(648) 조공  
金春秋 이 찬 청병 무열왕으로 즉위
金文王 파진찬 숙위 무열왕 3년 재입당
金法敏 이 찬 진덕왕 4년(650) 태평송 기증 문무왕으로 즉위
金仁問 파진찬 진덕왕 5년(651) 숙위 무열왕 7년, 문무왕2년 재입당
天 福 (弟監) 무열왕 7년(660) 전승보고  
汁恒世 대나마 문무왕 7년(667) 조공  
元 器   문무왕 8년(668)  
淵淨土    

<표 4>신라의 견당사(통일전)

 <표 4>에서 볼 때 신라의 견당사는 거의가 왕족이었고 관등도 波珍湌 이상의 고위관직자였다. 특히 고구려 유족인 연정토를 외교사절로 발탁한 것은 민족융합차원에서 이루어진 것으로 주목할만 하다. 김춘추와 그 아들(法敏·文王·仁問) 등 무열계 가문의 외교활동에서 그들 가문의 세력강화와 함께 통일과정에서의 이들의 역할을 엿볼 수 있다.

 이러한 조공사는 그 사행의 목적에 따라 몇 가지의 사절로 나눌 수 있다. 우선 일반 조공사는 새 왕의 등장에 따른 연례적인 사절이며, 그외 특별한 임무가 부여되지 않은「朝貢-回賜」라는 관행을 뜻한다. 그러나 나당간에는 구체적으로 특별한 목적을 띤 사절도 파견되었으니 謝恩使·宿衛·求法使·請兵使 등이 있었다.

㈎ 진덕왕 원년…당태종이 持節使를 보내 전왕에게 光祿大夫를 추증하고 이어 왕을 柱國樂浪郡王으로 책봉하였다. 7월에 사신을 당으로 보내 謝恩을 표하였다(≪三國史記≫권 5, 新羅本紀 5).

㈏ 무열왕 원년 5월…당이 지절사를 보내어 예를 갖추고 왕을 開府儀同三司新羅王으로 책봉했다. 이에 왕은 사신을 보내어 감사를 표하였다(≪三國史記≫권 5, 新羅本紀 5).

 이 두 기록은 신라가 당에 사은사를 보냈다는 사실을 알려 준다. 이러한 사행은 당나라의 책봉이나 특별한 은전에 대한 答訪이었다.

 다음으로 신라와 당과의 외교관계에서 특이한 것은 宿衛의 파견이다. 이것은 ‘夫四夷稱臣 納子爲質’283)≪冊府元龜≫권 996, 外臣部 納質.이라는 표현과 같이 唐에 파견된 주변국가의 人質(質子)로 간주되어 왔다.284)末松保和,≪新羅史の諸問題≫(東洋文庫, 1954), 433쪽.
金庠基, 앞의 책, 9쪽.
楊昭全·韓俊光, 앞의 책, 83쪽.
그러나 숙위는 인질과 달리 실제로 자신의 활동을 통하여 조공사·청병사·문물교류사의 역할뿐 아니라, 양국간의 정치·군사적 교량이 되었다.285)申瀅植, 앞의 책(1984), 352∼390쪽 참조. 따라서 숙위외교는 나당간의 외교관계에 중추적 역할을 다한 것이다.286)宿衛는 신라와 당 사이에만 존재한 것이 아니다. 예를 들면 서방의 吐谷渾·于闐國·鄯善國도 質子를 파견하였고(≪舊唐書≫권 198, 列傳 148 및≪漢書≫ 권 96 上), 발해에서도 숙위를 보내고 있는 등(≪冊府元龜≫권 974, 外臣部 褒異 1 및 권 996, 納質) 발해나 서역 제국과 당 사이에서도 널리 행해지고 있었다.

㈎ 진덕왕 2년(648) 3월…이찬 김춘추와 그의 아들 문왕을 당나라에 보냈다. …춘추가 황제께 아뢰기를 “제가 자식이 일곱이 있는데 황제 곁에서 숙위로 있게 하여 주십시요” 하니 그 아들 文注(文王)와 大監 □□을 숙위케 하였다(≪三國史記≫권 5, 新羅本紀 5).

㈏ 진덕왕 5년 2월…파진찬 김인문을 당나라에 가서 조공하고 이어 숙위로 머물게 하였다(≪三國史記≫권 5, 新羅本紀 5).

㈐ 문무왕 6년(666) 4월…天存의 아들 漢林과 庾信의 아들 三光이 모두 나마의 관등으로 당에 들어가 숙위가 되었다. 왕은 백제가 평정됨에 따라 고구려를 멸하고자 당에 군사를 청하였다(≪三國史記≫권 6, 新羅本紀 6).

 이 글은 신라가 통일전에 당에 보낸 숙위에 대한 것이다. 숙위는 주변국가의 왕자로서 당 조정의 近臣(의장대)으로서 시위하며 머무는 外人宿衛로서 출발된 것이지만,287)卞麟錫,<唐宿衛制度에서 본 羅唐關係>(≪史叢≫11, 1966), 50∼66쪽. 그 내면적 성격은 단순한 조공사나 인질의 존재를 넘어 양국간의 외교사절로서 다양한 직능을 갖고 있었다. 그리고 시대의 필요에 따라 그 임무가 달라지고 있으나, 통일전에는 주로 請兵使로서 또는 백제·고구려 정벌의 副將(선봉장)의 역할을 하였다.288)申瀅植, 앞의 책(1984), 359∼385쪽.

 우선 김문왕은 진덕왕 2년(648)에 부친 김춘추를 따라 입당숙위하고 5년에는 김인문과 교대하였다.289)김문왕과 김인문의 경우는 백제 정벌을 위한 나당간의 군사협조 상의 필요성에서 중복된 숙위에 임명되었다. 진덕왕 5년(651)에 교대되었다가, 다시 무열왕 3년(656)에 교대되었으며, 같은 왕 5년에 문왕이 中侍가 되었으므로 다시 교대하였다. 그 후 김인문은 백제 정벌에 선봉장으로 참여하는 등 수차 양국을 왕래하였으며, 전후 22년간이나 당나라에 머물다가 唐京에서 죽었다. 그리고 김유신의 아들인 삼광은 문무왕 6년(666)에 숙위가 된 후, 8년 고구려 정벌 때 선봉의 副將으로 참여하였다. 이들은 주로 청병사의 역할을 하였으며, 당제로부터 武將職의 관직을 받고 있었다. 그리고 이들은<표 5>에서 보듯이 한두 명의 수행원을 대동하고 있었다. 김삼광의 경우 그는≪삼국사기≫新羅本紀에는 한림과 같이 나마로 되어 있으나, 列傳에 의하면 대아찬이었으며 한림은 그의 수행원으로 생각된다.290)신형식, 앞의 책(1984), 361∼362쪽.

숙 위 명 관 등 수 행 원 명 관 등
김 문 왕 (파진찬) □□대감 (급찬)∼아찬
김 인 문 파진찬 유돈·중지 사찬·대나마
김 삼 광 대아찬 한림 나마

<표 5>숙위와 그 수행원(통일전)

 <표 6>에서와 같이 통일전 숙위는 김춘추의 두 아들인 김문왕과 김인문이 교대로 임명되었다가, 그 후 김유신의 아들이 임명되었다. 즉 숙위는 당대를 대표하던 세력자의 자제들이었기 때문에 청병사로서 또는 백제·고구려 정벌의 향도장이라는 군사적 활동을 통해 통일에 큰 역할을 하게 되었다.

인 명 관 등 혈 통 파견연대 귀국연대 당 의 관 직 활 동 상
김문왕 파진찬 김춘추 3남 진덕왕 2년 진덕왕 5년 左武衛將軍  
김인문  〃  2남 진덕왕 5년 무열왕 3년 左領軍衛將軍  
김문왕  〃  3남 무열왕 3년 무열왕 5년   중시 역임
김인문  〃  2남 무열왕 5년     백제정벌
김삼광 대아찬 김유신 장남 문무왕 6년 문무왕 8년 左武衛翊府中郞將 고구려정벌

<표 6>신라의 숙위 일람표(통일전)

 한편 일반적인 조공사 외에 國學入學 요청이나 구법 등 특별한 목적을 띤 사절이 있었다. 즉 선덕왕 9년(640) 5월에 왕이 그 자제를 당에 보내 국학에 입학을 청한 경우나, 선덕왕 5년에 慈藏法師가 불법을 배우러 간 것 등이 그 예이다. 그리고 진덕왕 4년 6월 ‘告破百濟之衆’과 무열왕 7년 7월의 ‘遣弟監天福 露布於大唐’은 戰捷報告의 의미가 있었다. 그러나 통일전 신라의 대당관계에서는 사절의 역할에서 다양성이 찾아지지 않는다.

㈎ 선덕왕 11년 8월에 백제는 고구려와 합세하여 党項城을 빼앗아 당과의 통로를 끊으려 하였다. 이에 왕은 사신을 唐太宗에 보내어 급박한 사정을 알렸다.…겨울에 이찬 김춘추를 당에 보내어 군대를 요청하였다(≪三國史記≫권 5, 新羅本紀 5).

㈏ 선덕왕 12년 9월에 당나라에 사신을 보내어서 글을 올리되 ‘‘고구려, 백제가 신의 나라를 능멸하니…원컨대 군대를 보내어 구원해 주십시오’’ 하였다(≪三國史記≫권 5, 新羅本紀 5).

㈐ 진덕왕 2년 겨울…김춘추와 그 아들 문왕을 당나라에 보냈다. 춘추가 무릎을 꿇고 아뢰기를…“만약 폐하께서 군대를 내어 흉악한 무리를 제거하지 않으면 저희 나라 인민들은 전부 포로가 되고 육·해로를 통해 조공할 방도가 없습니다” 하였다. 태종이 깊이 동감하고 군대지원을 허락하였다(≪三國史記≫권 5, 新羅本紀 5).

 이 내용은 통일전에 파견된 37회의 조공사 가운데 7차에 걸쳐 파견된 청병사에 대한 기록의 일부이다.291)이 외에도 ‘王遣使入唐求援’(무열왕 2년), ‘遣使入唐乞師’(같은 왕 6년) 그리고 ‘欲滅高句麗 請兵於唐’(문무왕 6년) 등의 기사가 보인다. 특히 김문왕·김인문·김삼광 등 숙위는 請兵使로서 역할에 그치지 않았다. 이들은 양국간에 정치·군사적 중요사항이 생기면 중개인의 역할까지 하게 되었다.

龍朔 원년(661) 고종이 인문에게 말하기를…“지금 고구려는 예맥과 함께 포악무도하여 事大之禮를 어겼으니 이는 善隣之義를 저버린 것이다. 짐은 군사를 일으켜 이를 정벌하고자 하니, 그대는 돌아가 국왕에게 이를 알리고 함께 군사를 내어 고구려를 정벌하자”고 하였다(≪三國史記≫권 44, 列傳 4, 金仁問).

 이와 같이 신라의 대당외교는 긴급한 백제·고구려 정벌문제에 부딪쳐 청병사가 중심이 되었으며, 다양한 사절의 형태가 나타나지 않았다.292)신라가 청병사에 치중한 반면 백제와 고구려의 경우에는 비교적 다양한 사절의 형태가 보인다. 즉 告哀(무왕 42년), 進賀(영류왕 11년, 보장왕 15·25년), 謝罪(보장왕 5년, 의자왕 4년) 등의 사절이 있었다. 다만 숙위외교를 통해 삼국통일의 외교적 관문이 열리게 되었으며, 통일 후 양국간의 친선관계가 이룩되면서 여러 가지의 외교사절이 교환되었다. 특히 통일 전 나당간의 외교에서 김춘추 가문의 역할이 크게 부각되었으며, 그 후 무열왕권 성립으로 새로운 외교상의 변화가 있게 된다.

<申瀅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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