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신편 한국사
  • 고대
  • 09권  통일신라
  • Ⅴ. 문화
  • 2. 불교철학의 확립
  • 2) 불교신앙의 일반화
  • (2) 관음신앙

(2) 관음신앙

 관음신앙은 미타신앙과 함께 중대에 가장 보편적으로 나타나는 신앙이다. 미타신앙이 내세적인데 비해 관음신앙은 현세적인 신앙이다.≪法華經≫普門品에는 중생들이 물과 불 또는 악귀나 원적 등의 일곱 가지 어려움에 처했거나 탐욕·성냄·어리석음의 三毒에 헤매일 때, 그리고 자식을 갖고자 하는 등의 온갖 현실적인 바람을 가졌을 때 일심으로 관세음보살을 부르면 관세음보살이 즉시 그 소리를 관찰하고 바라는 바를 모두 들어준다는 내용을 담고 있다. 따라서 사람들이 세상을 살아가면서 부딪히는 갖가지 어려움으로부터 벗어나기 위해 관음을 부르는 신앙은 절실한 것이었다.

 그런데 신라사회에 이 관음신앙을 정착시키기 위하여 의상은 洛山寺에 관음의 眞身이 직접 머무르며 설법을 하고 있다는 眞身常住 신앙을 전개하였다. 이는 남방 해안에 있는 보타락가산에 관음이 상주설법한다는≪화엄경≫의 經說에 따라 신라 해안에 그 실재처를 마련한 것으로, 앞서 자장이 오대산을 문수도량으로 설정했던 것과 같은 신라불국토설의 연장에서 전개한 신앙이었다. 이를 통해 신앙인들은 신라땅에 항상 머무르고 있다는 관음을 보다 현실감 있게 부르고 그 감응을 기대할 수 있었을 것이다.1113)鄭炳三, 앞의 글(1982), 32∼53쪽.

 金仁問은 무열왕의 둘째 아들로 통일전쟁기에 주로 당에 머물며 외교적 역할을 수행하던 인물이었는데, 그가 당에서 돌아오기 어렵게 되자 사람들은 무사히 신라에 돌아오게 해 달라고 仁容寺에 관음도량을 베풀어 기원하였다. 그러나 그는 돌아오지 못하고 죽고 말았다. 그래서 그가 죽은 후에는 도량을 미타도량으로 바꾸어 극락왕생을 빌었다.

 憬興은 三郞寺에 있을 때 병이 들어 낫지를 않았다. 그러다가 南巷寺 十一面觀音의 應現으로 씻은 듯이 병이 나을 수 있었다. 國仙 夫禮郞은 북쪽 해안에서 납치되어 돌아올 길이 없었다. 양친이 栢栗寺 관음이 영험이 있다는 소문을 듣고 가서 기도하였더니 잃어버렸던 두 가지 보물과 낭도와 함께 살아서 돌아왔다. 나라에서는 이 소식을 듣고 백률사에 田地 萬頃을 내리고 夫禮郞을 大角干으로 삼았다. 長春은 경덕왕 때 바다에서 장사를 하며 살았는데 어느날 바다에 나간지 오랜 시간이 지나도록 소식이 없었다. 그래서 모친인 寶開가 敏藏寺 관음에게 빌어서 중국에서 살아 돌아올 수 있었다.

 경덕왕대에 눈먼 希明은 분황사 千手관음에게 눈을 뜨게 해달라고 기도하여 光明을 얻었다. 洛山寺의 知莊이던 調信은 지방의 유력자인 金昕의 딸과 인연을 맺게 해 달라고 낙산사 관음에게 빌었으나 낭자는 다른 사람과 혼인을 하여 뜻이 이루어지지 않았다. 조신은 이를 원망하여 잠이 들었는데 꿈 속에서 바라던 바 대로 인연을 맺어 살다가 나이 들어 헤어지는 것으로 끝맺었다. 꿈을 깨고 나서 덧없음을 깨닫고 세속의 모든 일을 버리고 집을 털어 淨土寺를 창건하여 수도하였다. 崔殷諴은 나이 오래도록 후사가 없어 衆生寺 관음에게 빈 끝에 아들 崔丞魯를 낳았다. 그런데 아이를 얻던 그때 후백제의 견훤이 서울에 침공하여 갓난아이를 다시 관음상에 맡겨놓고 피란갔다 오니 그때까지도 잘 살아 있었다.

 이와 같은 관음의 신앙사례들은 모두 현실세계에서 겪게 되는 바람에 대한 관음의 대응을 말하고 있다.1114)金煐泰,<新羅의 觀音思想>(≪佛敎學報≫13, 1976; 앞의 책, 236∼237쪽). 이런 현실적인 성격 때문에 신라사회에서 관음신앙은 신분에 관계 없이 고루 수용될 수 있었다.1115)洪承基,<觀音信仰과 新羅社會>(≪湖南文化硏究≫8, 全南大, 1978)에서는 시대와 신분에 따라 관음신앙을 구분하여, 통일 이후에 신봉 계층이 진골귀족으로부터 양인 이하의 신분층으로 바뀌고, 신앙 성격도 통일 이후에는 초현세적 기능이 현실적인 고뇌 해결 기능보다 약간 크게 된다고 보았다.

 이러한 현실 구제적 관음신앙에는 變化觀音도 등장한다. 경흥이 병이 들어 낫지를 않았는데 남항사의 십일면관음이 응현하여 씻은 듯이 나을 수 있었다. 希明은 눈이 멀어 芬皇寺의 千手관음에게 빌어 눈을 뜰 수 있었다.

 이와는 달리 미타와 연관된 관음신앙 사례들이 있다. 문무왕 때 서방 왕생을 기약하며 수도하던 廣德과 嚴莊에게 관음이 芬皇寺의 寺婢인 廣德의 妻로 응현하여 득도를 도와주었다. 白月山에서 수도하던 努肹夫得과 怛怛朴朴 두 사람은 産氣 임박한 낭자로 화현한 관음의 시험을 거쳐 그 도움으로 미륵과 미타로 成道할 수 있었다. 아간 貴珍의 家婢인 郁面은 주인의 수행도량에 함께 참여하여 주인보다 먼저 서방극락에 왕생할 수 있었다.

 이들 신앙사례는 미타의 脇侍로서 서방극락에의 왕생을 보좌하는 관음의 역할을 보여주고 있다.≪觀無量壽經≫에서 서술하듯이 왕생인의 임종시에 아미타불을 따라 來迎하는 관음에의 신앙을 보는 것이다.

 현실구제나 미타협시와도 다른 것이 眞身常住 신앙이다. 의상은 낙산사에 관음 진신이 산다는 말을 듣고 치열한 구도 정진 끝에 관음의 진신을 참배하였다. 그리고는 관음의 지시에 따라 낙산사를 지었다. 여기에는 불국토신앙의 정착이 중심이 되어 있지만 동시에 구도적인 관음신앙의 모습이 강하게 드러나 있다. 이와 약간 유사한 것으로서 月精寺의 信孝가 老婦로 화현한 관음의 인도로 수행에 정진하는 설화가 있다.

신앙사례 관계인물 신앙내용 연 대 기 타
仁容寺 觀音道場 金仁問 獄中 귀환 기원 문무왕(690경) 死後 彌陀道場
洛山寺 眞身觀音 義相 眞身親見 문무왕 元曉 不見(女人應現)
十九應身 廣德 嚴莊 극락왕생 보조 문무왕 廣德妻(芬皇寺婢) 응현
南巷寺 十一面觀音 憬興 治病 신문왕 尼僧 응현
栢栗寺 大悲 國仙夫禮郞 被賊 귀환 효소왕 2년(693) 승려 응현
白月山 南寺 夫得 朴朴 得道(미륵 미타) 성덕왕 8년(709) 낭자 응현
五臺社 寶川태자 眞身예배 輔國 성덕왕 오대 중 동대
敏藏寺 寶開 長春 海難 귀환 경덕왕 4년(745) 승려 응현
彌陀寺 念佛 郁面 貴珍 得道(미타) 경덕왕14년(755) 觀音之徒 寺婢 轉生
芬皇寺 千手大悲 希明 得明 경덕왕  
洛山寺 夢中 調信 金昕娘 婚姻기원 불응 9세기 응현 정토사 창건
月精寺 五類聖衆 信孝 修道處 지시 9세기 老婦 응현 참회 수도
衆生寺 大悲 崔殷諴 崔丞魯 得男 亂中보호 경애왕 3년(927)  

<표 3>신라 관음신앙 사례

 이상에서 본 것처럼 신라 관음신앙은 현실구제의 성격을 띠는 獨尊的 신앙이 주된 양상을 이루며 현세적인 성격을 강하게 내보인다. 한편으로는 미타정토 왕생과 연결된 내세적 성격도 보이나 이 경우도 현세적 성격이 짙게 배어난다. 시기적으로는 성덕왕대까지 상층 신분의 신앙 사례가 다수 확인되나 8세기 이후 하층신분의 신앙 사례가 더 많이 등장한다. 관음신앙은 국가의 안녕과 개인적 현세이익을 보장받고자 하는 것이면서 동시에 내세적 경향도 공존하였다. 특히 관음은 여러 내용의 女人으로 응현하는데, 이는 친근성의 표현이자 大地神인 女神과의 연계를 생각하게 하는 의미있는 문제이다.1116)金哲埈,<東明王篇에 보이는 神母의 性格>(≪柳洪烈博士華甲記念論叢≫, 1971;≪韓國古代社會硏究≫, 서울大 出版部, 1990, 61∼62쪽).

개요
팝업창 닫기
책목차 글자확대 글자축소 이전페이지 다음페이지 페이지상단이동 오류신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