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신편 한국사
  • 고대
  • 09권  통일신라
  • Ⅴ. 문화
  • 2. 불교철학의 확립
  • 3) 승려들의 국가적 활동

3) 승려들의 국가적 활동

 신라 중대 왕실은 무열왕계 왕통의 굳건한 기반을 토대로 관료제도의 발달과 새로운 지지세력의 확보 등에 힘입어 강력한 왕권을 유지해 나갈 수 있었다. 그런데 이 시기에 신라사회를 이끌어간 지도이념인 불교와 국가와의 관계를 설정하는 데 많은 논란이 있어 왔다. 중대 왕권의 특질을 전제왕권으로 규정하고 이를 뒷받침해준 이념적 배경이 화엄사상이라는 것이 일반적인 견해이다. 구체적으로 살펴보면 一心에 의해 우주 만상을 통섭하며 우주의 다양한 현상이 결국은 하나라는 화엄사상이 전제왕권을 중심으로한 당시의 통치체제에 적합한 이념이었고 이 같은 종교적 상징성을 국가권력의 지주로 이용하여 전제왕권을 합리화하려 하였다는 것이다.1124)安啓賢, 앞의 책(1982), 79∼80쪽.
李基白·李基東,≪韓國史講座≫ 古代篇(一潮閣, 1982), 375쪽.
―――,<新羅時代의 佛敎와 國家>(≪歷史學報≫111, 1986;≪新羅思想史硏究≫, 一潮閣, 1986, 255∼262쪽).
金杜珍,<統一新羅의 歷史와 思想>(≪傳統과 思想≫2, 韓國精神文化硏究院;≪韓國思想史大系≫2, 韓國精神文化硏究院, 1991, 179쪽).
李基東,<新羅社會와 佛敎>(≪東國大學校開校八十周年紀念論叢 佛敎와 諸科學≫, 東國大 出版部, 1987), 967∼971쪽.

 이에 대해 화엄사상은 시대와 장소를 초월하는 불변의 초역사적 보편성을 강조하면서 인간의 세속적 이념의 한계를 본질적으로 비판하고 이를 불교적 본질로 승화시키고자 하는 것이므로 조화와 평등이 강조될 수 있는 이론은 될 수 있으나 전제왕권을 옹호하는 이론은 될 수 없고, 신라 중대 화엄사상의 형성과 발전은 순수한 불교교리에 대한 연구가 기반이 되어 이룩된 것이라고 보는 견해가 있다.1125)金相鉉,<新羅中代 專制王權과 華嚴宗>(≪東方學志≫44, 延世大, 1984; 앞의 책, 1991, 275∼280쪽).
高翊晋, 앞의 책(1989), 374∼376쪽.
또한 중대 국가불교의 주된 역할은 성전이 설치된 사원을 중심으로 수행되었기 때문에 특정 사상과 전제왕권의 이념적 연계를 인정하기 어렵다는 견해도 있다.1126)李泳鎬,<新羅中代 王室寺院의 官寺的 機能>(≪韓國史硏究≫43, 1983), 108∼113쪽.
蔡尙植, 앞의 글(1984), 111∼115쪽.

 그리고 의상 화엄사상의 특색을 원융사상으로 파악하고 원칙적인 하나 속에 일체의 제법상을 융섭하여 法性과 더불어 혼연된 일체를 이루려는 융섭사상은 중대 전제주의 성립에 유용한 것이지만 이는 왕실·진골 및 6두품과 전 계층을 묶는 總和정책에 어울리는 것이었다는 새로운 분석도 있다.1127)金杜珍, 앞의 책(1995), 383쪽.

 신라 중대의 화엄사상은 실천신앙과 결합하여 기층민의 정신적 일체감 형성을 도와 왕권의 안정된 유지에 기여하였다. 그러나 이 같은 활동으로 인해 화엄사상이 전제왕권의 정치적 이념을 수식하는 역할을 하였다고 볼 수는 없다. 통일기 이후의 중대 신라왕실은 일부 진골귀족의 제거와 지방세력의 개편 및 유교적 정치이념을 도입한 관료조직의 확대 정비를 통해 왕권을 강화해 나갔다.1128)李基東, 앞의 글(1987), 967∼968쪽. 이렇게 볼 때 정치이념을 수식하던 중고기 불교와는 달리 중대 불교의 역할은 유교와 아울러 정치운영에 복합적인 배경을 이루었다고 해야 할 것이다.

 이러한 사회적인 배경에서 승려들이 보였던 국가적인 활동은 여러 분야에 걸쳐 나타난다. 우선 국가대업이었던 통일사업에 기여한 승려들의 활동이 적지 않았다. 그 중에서도 직접적인 활동을 통해 기여한 승려들로는 道玉이나 원효·의상·명랑을 들 수 있다.

 實際寺의 도옥은 태종 2년(655)에 백제의 대군이 助川城을 침공하여 나제간에 공방이 그치지 않자 군복으로 갈아입고 창칼을 들고 적진에 뛰어들어 장열하게 전사함으로써 신라군의 사기를 드높였다. 이때 도옥은 “승려가 된 자는 첫째로는 수행에 정진하여 자성을 되찾고 다음에는 도를 활용하여 남을 이롭게 해야 하는 것인데, 나는 하나의 선행도 행한 것이 없으니 차라리 군대에 나가 殺身하여 나라에 보답함만 같지 못하다” 하고는 이름도 급히 달려가 무리가 된다는 상징적인 驟徒로 바꾸고 三千幢에 소속되어 일선에 나서 힘써 싸우다 전사하였다.1129)≪三國史記≫권 47, 列傳 7, 驟徒. 살생을 금계로 하는 승려의 신분으로 직접 전장에 뛰어들 수 없어 승복과 승명을 버리고 참전하였다는 것은 승려의 본분을 외면하지 않으면서 국가 공동체의 구성원임을 강조하는 투철한 국가의식을 보여주는 좋은 예라 할 것이다.1130)金相鉉,<新羅의 歷史와 思想>(≪韓國思想史大系≫2, 韓國精神文化硏究院, 1991), 108∼109쪽.

 신라가 백제를 물리치고 문무왕 원년(661)에 고구려를 칠 때 당군에게 군량을 수송한 김유신이 당군과 합세할 지를 묻는데 대한 회신으로 그려준 비밀부호를 해독하지 못하자 元曉가 이를 해독하여 군사를 돌이키도록 하였다. 이는 전쟁에 직접 참여하지는 않지만 승려들이 자문 역할을 담당하던 일면을 확인해준다. 당과의 대립이 한창일 때 당에서 수학하던 義相은 귀국하면서 당군의 침공 계획 소식을 갖고 왔다. 이에 조정에서는 明朗이 나서서 대비하도록 하였다. 이들 사례들을 통해 통일전쟁기를 살아가던 출가 승려들의 국가의식을 명확하게 살펴볼 수 있다.1131)高翊晋 外,<佛敎思想이 新羅의 三國統一에 미친 影響>(≪東國大學校 論文集≫12, 1973), 59∼64쪽.

 통일을 완성하고 중앙집권적인 왕권체제를 이루어가던 중대 전반기의 왕실은 의상에게 浮石寺를 중심으로 敎團 체제를 운영하도록 지원하는 한편으로 명랑에게는 군사적인 대비를 맡기고 憬興은 국로로 봉하여 교단을 영도하도록 하며 義安은 大書省에 임명하여 교단을 통제하도록 하는 등 다양한 계통의 승려들에게 각기 역할을 분담시켜 불교계를 이끌어갔다. 이 중에서 이 시기의 국가불교 활동을 주도한 것은 密敎僧들이었다.

 당의 침공에 대비하던 명랑은 당군이 국경을 넘어 바다로 몰려들자 文豆婁 비밀법으로 풍랑을 일으켜 교전도 하지 않고 당군을 침몰시켰다. 그리고 四天王寺를 세우고 도량을 개설하여 지속적으로 대비하였다.1132)≪三國遺事≫권 2, 紀異 2, 文虎王法敏. 이 설화적 사실에서 알 수 있는 것은 승려가 국가의 위급 상황을 앞장서 해결해 나간다는 사실이다. 명랑은≪灌頂經≫의 약사 주술을 사용하였던 선덕왕대의 密本을 계승하여, 위급한 액난을 만나면 五方神을 만들어 문두루법 곧 神印法을 행한다는≪관정경≫의 내용 그대로 비밀법을 사용하여 당군을 물리치고≪金光明經≫의 사천왕 호국사상으로 지속적인 밀교 행법을 실천하였다.1133)文明大,<新羅 神印宗의 硏究>(≪震檀學報≫41, 1976), 203∼205쪽.

 惠通은 신문왕이 병이 나서 보아주기를 청하자 와서 주문을 외웠더니 당장 나았다. 사량부 출신으로 지역적 연고로 인해 친밀한 관계를 가졌던 세력의 왕권에 대한 반발로 효소왕대에 왕권의 강화에 비판적인 鄭恭의 사건에 연루되어 몰락하던 혜통은 왕녀의 병을 치유하여 다시 신망을 회복하고 국사가 되었다.1134)≪三國遺事≫권 5, 神呪 6, 惠通降龍. 혜통이 공주의 治病이나 자신을 붙잡으러 온 군대를 물리치는데 사용한 것은 모방주술로, 이는 解怨과 創寺 呪術에 결부된 순수한 밀교의 주술의례였다. 밀본이나 명랑이≪관정경≫을 중심으로 한 약사주법이나 문두루법을 주축으로 한 데 비해 혜통은≪다라니집경≫을 중심으로 한 순수 주술을 행한 차이가 드러난다.1135)高翊晋,<新羅密敎의 思想內容과 展開樣相>(≪韓國密敎思想硏究≫, 東國大 出版部, 1986), 167∼173쪽.

 고위 가문 출신의 명랑은 통일전쟁 과정에서 주술적인 군사 능력을 발휘하여 밀교의 상당한 교단적 기반을 마련할 수 있었다. 그러나 8세기말 효소왕대에 들면 혜통에서 보는 것처럼 治病 기능을 중심으로 국가와의 관계를 유지시켜 가기는 했으나 왕권 강화에 반대하는 정치세력과 연계되어 효소왕 원년(692) 醫學의 설치에 따른 전문적인 의술의 진전과 더불어 점차 밀교의 기능이 낙오됨으로써 왕권 측근에서 서민사회로 영향력이 옮아가게 된다.1136)金在庚,<新羅의 密敎受容과 그 性格>(≪大丘史學≫14, 1978), 23∼24쪽.
呂聖九는 혜통이 정공과 함께 성덕왕의 즉위에 반대하여 몰락하였다가 성덕왕녀의 치병으로 인하여 회복되는 것으로 이해하였다(呂聖九,<惠通의 生涯와 思想>,≪許善道先生停年記念 韓國史學論叢≫, 1992).

 경덕왕 12년(753) 여름에 큰 가뭄이 들어 왕은 태현을 불러≪金光明經≫을 강의하여 비를 빌도록 하였다. 이는 명랑이 실천하였던 밀교 행법이 중대 말기까지 국가적인 관심 속에 행해지고 있었음을 알게 한다. 그런데 다음해에 또 가뭄이 들자 이번에는 法海가≪화엄경≫을 강론하여 전년의 태현보다 뛰어나게 물을 조종하였다.1137)≪三國遺事≫권 4, 義解 5, 賢瑜珈 海華嚴. 이와 같은 설화는 이 시기에 들어서 종파에 구별됨이 없이 밀교적인 행법이 시행되었음을 말해준다. 이는 전통신앙의 의례와 상통하는 일면을 지녔던 밀교의 성격이 신라사회 저변에 용해되어 나타난 현상으로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이러한 직접적인 국가활동과 달리 사회 구성원의 의식을 이끌어 새로운 통일국가의 안정에 기여했던 불교활동의 의의는 오히려 외형적인 활동보다 더 필요한 것이었다.

 신라의 삼국통일이 내면적으로 완결되기 위해서 반드시 해결해야 할 과제는 고구려와 백제의 유민들을 포용하여 이들의 정신적인 상처를 치유하고 융합을 이루어야 하는 것이었다. 통일기 불교가 적극적으로 추진하여 기층사회에 폭넓게 전파하였던 미타신앙을 중심으로 한 신앙체계는 삼국민의 유대와 통합에 중심적인 역할을 하였던 것이다.1138)金相鉉, 앞의 글(1991), 111쪽.

 이런 관점에서 의상이 청정한 持戒 태도를 철저히 견지하며 신분평등의 화엄교단을 영도하고, 국왕이 그에게 제공하는 토지와 노비를 상하가 함께 나누어 쓰고 귀하고 천한 사람이 함께 지켜 나가는 불법의 평등성을 역설하여 거절하며, 국왕이 추진하는 과도한 토목사업을 기층민의 안정을 위해 적극적으로 저지시킨 것은 사회의식으로서 중요한 의미를 지닌다. 의상은 통일 이후의 가장 커다란 과제인 사회안정이 기층민의 경제적 안정을 통한 민생의 안정과 이에 바탕한 정신적 일체감에서 가능하다고 보았다. 그래서 의상이 철저한 청정 수도행과 화합된 교단활동 그리고 진신 상주의 관음신앙과 현실에 기반을 둔 정토신앙으로 정립한 화엄사상은 새로운 사회안정에 부응하는 의식이 될 수 있었고, 여기에서 중대 왕실은 불교의 직접적인 수식이나 지원이 아니라 정신적인 일체감 조성이라는 역할을 바탕으로 안정된 왕권을 유지해 갈 수 있었다.1139)鄭炳三, 앞의 글(1992b), 209∼210쪽.
南東信,<한국 고대불교의 국가관·사회관>(≪역사비평≫23, 역사문제연구소, 1993), 213∼214쪽.

<鄭炳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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