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어학에서 고대국어는 통일신라시대의 국어를 가리킨다. 이 글에서는 이 시대에 기록된 자료를 바탕으로 고대국어의 모습을 살펴보고자 한다.
신라가 삼국을 통일하면서 언어와 문자생활도 하나로 통일되어 갔다. 이것은 옛 삼국의 古地였던 지역에서 나오는 통일신라시대의 금석문들을 보아서도 짐작할 수 있다. 그러나 그 구체적인 사실을 알려주는 자료는 그렇게 많지 못하다.
이 시대의 문자는 한문과 借字표기가 사용되었다. 당시인들이 직접 기록한 한문의 실물은 金石文으로 남아 있다.<甘山寺佛像造成記>들이나<聖德大王神鐘銘>(771)·<皇龍寺九層塔刹柱本記>(9세기)와 崔致遠의<四山碑銘>등이 당시인들의 수준높은 漢文 驅使 能力을 보여준다. 儒家의 학자로서는 强首·薛聰·최치원의 이름이 널리 알려져 있고 佛家에서는 義湘·元曉 등이 많은 佛經註解書를 남겨 한국불교의 새로운 장을 열어 놓았다. 이들은 당시의 지식인들의 한문 구사 능력이 중국인들의 그것에 못지 않을 만큼 높았었음을 말하여 주는 것이다.
차자표기 자료는 鄕札·吏讀·口訣·固有名詞表記가 있다. 향찰로는≪三國遺事≫의 향가 14수가 전한다. 이는 13세기 후반에 기록된 것이어서 바로 신라시대의 것으로 보기는 어려우나≪三代目≫이 편찬된 9세기에는 이에 가까운 표기법이 발달되어 있었을 것이다.
이두는 이미 삼국시대에도 발달되어 약간의 자료들이 전하고 있다. 통일신라시대의 이두는 21편이 발굴되어 해독되었다.1202)이 이두자료의 해독에 관해서는 다음과 같은 글들이 있다.
南豊鉉,<第二新羅帳籍에 대하여>(≪美術資料≫19, 國立博物館, 1976).
―――,<昌寧仁陽寺碑의 吏讀文 考察>(≪國文學論集≫11, 檀國大, 1983).
―――,<永泰二年銘 石造毘盧遮那佛 造成記의 吏讀文 考察>(≪新羅文化≫5, 東國大, 1989).
―――,<新羅禪林院鍾銘의 吏讀文 考察>(≪서재극선생회갑기념논총≫, 계명대 출판부, 1991).
―――,<新羅華嚴經寫經 造成記에 대한 語學的 考察>(≪東洋學≫21, 檀國大, 1991).
―――,<无盡寺鍾銘의 吏讀文 考察>(≪李承旭先生回甲紀念論叢≫, 1991).
―――,<正倉院 所藏 新羅帳籍의 吏讀 硏究>(≪中齋張忠植博士華甲紀念論叢≫, 1992).
―――,<新羅時代의 吏讀文 解讀>(≪季刊 書誌學報≫9, 韓國書誌學會, 1993). 이를 연대순으로 열거하면 다음과 같다.
甘山寺彌勒菩薩像造成記(719) 甘山寺阿彌陀如來像造成記(720) 關門城石刻(7세기말?) 上院寺鐘銘(725) 无盡寺鐘銘(745) 新羅華嚴經寫經造成記(755) 新羅帳籍(758?) 第二新羅文書(758?) 正倉院의 毛氈貼布記(8세기 중엽) 永泰二年銘石毘盧遮那佛造像記(766) 葛項寺石塔造成記(785∼798) 永川菁堤碑貞元銘(798) 禪林院鐘銘(804) 昌寧仁陽寺碑銘(810) 安養中初寺幢竿石柱記(827) 菁州蓮池寺鐘銘(833) 竅興寺鐘銘(856) 咸通銘禁口銘(865) 禪房寺塔誌石銘(879) 英陽石佛坐像光背銘(889) 松山村大寺鐘銘(904)
이 가운데<신라화엄경사경조성기>·<신라장적>·<영태2년명석조비로자나불조상기>·<청제비정원명>·<선림원종명>·<규흥사종명>등은 다양한 표현을 보여주고 있어 이 시대 이두문을 대표하는 것들이다. 비록 충분한 양은 아니지만 당시의 국어를 생생하게 보여 준다.
이들 이두문의 표기법은 2가지로 나누어 볼 수 있다. 하나는 삼국시대부터 내려오는 것으로 한자를 우리말의 순서로 배열한 것이다. 이를 초기적인 이두문이라고 한다. 다른 하나는 이 초기적인 이두문의 중간 중간에 우리말의 조사나 어미를 나타내는 토를 넣은 것이다. 후자가 이 시대에 새로이 나타난 것이다. 전자의 것으로 비교적 긴 내용을 담은 것은<창녕인양사비명>과<안양중초사당간석주기>이다. 이 중에서<중초사당간석주기>의 본문과 그 해석을 보면 다음과 같이 토가 전혀 없어 한자를 우리말 순서대로 해석해 나가면 그 내용이 파악된다.
寶曆二年歲次丙午 八月朔六辛丑日 中初寺東方僧岳 一石分二得 同月二十八日 二徒作初 奄 九月一日 此處至 丁未年 二月三十日 了成之.
해석 : 보력 2년(826) 병오년 8월이 시작되어 엿새째인 신축일에 중초사의 동방에 있는 승악에서 하나의 돌을 나누어 둘을 얻었다. 같은 달 28일에 二徒가 만들기 시작하여 문득(빠르게도) 9월 1일에 (돌이) 이곳에 이르렀다. 정미년(827) 2월 30일에 마치어 이루었다(造成을 마치었다).
토가 쓰인 이두문은<감산사아미타여래상조성기>가 현재로서는 가장 이른 것이다. 이 이두문도 대체로는 한자를 우리말의 순서로 배열하였는데 다음과 같이 토가 나타나고 있다. ‘後代追愛人者 此善助在哉/後代에 追憶하여 사랑하는 사람은 이 善業을 돕기를 바란다.’의 ‘-哉’가 그것이다. 이는 願望을 나타내는 종결어미 ‘-’를 표기한 것이지만<화엄경사경조성기>에서는 연결어미로도 쓰여 후대의 이 이두와 기능상 일치한다. 고려시대의 이두에선 이 토가 齊자로 대체되었고 이것이 조선조말까지 계승되어 널리 쓰였다.1203)南豊鉉,<新羅時代 吏讀의 ‘哉’에 대하여>(≪金完鎭先生華甲紀念論叢 國語學의 새로운 認識과 展開≫, 民音社, 1991).
초기적인 이두문과 토가 쓰인 이두문의 경계는 분명치 않다.<화엄경사경조성기>와 같이 토가 비교적 많이 들어간 이두문이 있는가 하면<감산사불상조성기>와 같이 한두 개의 토만이 들어간 이두문이 있고<중초사당간석주기>와 같이 토가 전혀 들어가지 않은 이두문도 있다. 이들이 공존하는 것이 오히려 이 시대 이두문의 특징이라고 하겠다. 다만 그 어순은 우리말의 어순이어서 조선시대의 이두문과 같이 한문의 어순이 섞이어 쓰인 예는 극히 드물다.
口訣은 한문의 독법을 토로 표시한 것이다. 신라시대의 구결이 실물로서 전하는 것은 없다. 따라서 고려시대의 구결자료와 문헌의 기록을 가지고 이 시대 구결의 모습을 추정할 수밖에 없다. 고려시대의 구결은 釋讀口訣과 順讀口訣이 있다. 전자는 한문에 토를 달아 우리말의 순서로 풀어서 읽는 것이고 후자는 한문의 순서대로 읽으면서 句讀에 해당하는 곳에 토를 넣어 읽는 것이다. 현재 석독구결은 10세기의 것에서부터 13세기에 걸치는 것이 6종류 발굴되어 있다. 순독구결은 13세기의 것으로 추정되는 것에서부터 조선조말까지 사용되어 많은 양이 남아 있다. 순독구결은 고려 중엽에 발달한 것으로 추정되므로 신라시대에는 석독구결만이 있었을 것이다. 옛부터 薛聰은 이두의 제작자로 일컬어져 왔으나 ‘그가 우리말로 경서를 읽었다’는≪三國史記≫와≪三國遺事≫의 기록은 오히려 표준적인 경서의 독법을 석독구결로 저술한 것을 말한 것으로 이해된다.
구결은 한문이 이 땅에 수입되어 체계적인 학습이 널리 보급되면서 자연 발달되어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초기에는 한문을 우리말의 순서로 배열해 가면서 읽는 방법만이 있었고 토를 기입하여 독법을 표시하는 방법은 훨씬 후대에 발달했을 것이다. 삼국시대의 이두문이 한자를 우리말의 순서로 배열하는 데 그치고 토의 모습을 보여 주지 않는 것은 아직 토의 표기법이 발달하지 않은 데에 기인하는 것으로 생각된다. 한편 통일신라시대에 들어와서 토가 들어간 이두문이 발견되는 것은 이 시대에 구결의 토표기가 존재하여 그의 영향을 받은 것으로 믿어진다. 현재 구결의 토는 설총보다 한 세대 앞서는 義湘시대에 이미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의상의 제자들이 의상의 華嚴經 강의를 기록한≪要義問答≫(일명 智通記 또는 錐洞記)과≪一乘問答≫(일명 道身章)에는 우리말이 섞여 있다고 義天의≪新編諸宗敎藏總錄≫은 말하고 있다. 이 책들은 현재 전하고 있지 않지만 均如의 화엄경 강의를 그 제자들이 기록한≪釋華嚴敎分記≫에 석독구결이 섞여 있는 것을 보면 의상의 이 강의록에도 석독구결이 들어있었음에 틀림없다. 경서를 강의하자면 그 해석을 먼저 보이고 내용을 설명하는 것이 순서이기 때문이다. 이 석독구결의 토표기는 이두와 향찰의 표기법에 응용되어서 그 발달의 견인차 역할을 한 것으로 믿어진다.1204)南豊鉉,<釋讀口訣의 起源에 대하여>(≪국어국문학≫100, 1988) 참조.
고유명사표기는 人名·地名·官名 등 우리의 고유어를 표기한 것이다. 지금은 이 명칭들이 거의 한자어로 되어 있지만 삼국시대에는 물론 통일신라시대에도 대개는 우리의 고유어로 되어 있었다. 이 표기는 이두문에 주로 나타나지만 한문 문맥에도 그대로 쓰였다.≪삼국사기≫에 나타나는 삼국의 지명이 고유어로 되어 있어 삼국시대 국어연구의 중요한 자료가 되고 있다. 이 자료는 이두문이나 향찰에서는 좀처럼 보여주지 않는 국어의 형태를 직접 보여주는 점에서 가치가 크다. 일례로 赫居世와 弗矩內는 신라 시조의 이름을 표기한 것인데 이는 ‘블거’나 ‘’를 표기한 것이다. 이를 ‘光明理世(광명이 세상을 다스린다)’의 뜻이라고 하는데 직역하면 ‘밝은 것(존재)’ 또는 ‘밝은 이(사람)’의 뜻이다. 여기서 동사어간 ‘븕-’과 동명사어미 ‘-은’, 명사파생접미사 ‘-/의’를 분석해낼 수 있다.
신라시대의 漢字 字形 가운데는 省劃字가 자주 나타난다. 이러한 생획자는 구결의 약체자가 발달하는 것과 맥락이 이어지는 것이어서 문자의 발달과정을 설명할 수 있는 자료가 된다.
<상원사종명>에 唯乃와 旦越의 표기가 나온다. 唯는 維가 원자인데 維의 糸자를 흘려서 쓰던 것이 굳어져서 口자로 간략화됨으로써 나온 것이다. 乃는 那가 원자인데 그 앞부분을 생략하고 뒷부분만 딴 것이다. 旦은 檀이 정자인데 그 앞부분을 생략하고 表音符만을 딴 생획자이다.
한편 두 글자를 합해서 쓰는 예가 자주 나온다. 이는 삼국시대부터 발견되는데 통일신라시대에도 자주 확인된다.<화엄경사경조성기>에는 大舍를 합자한 예가 나오고 乃末을 합자한 예는<청제비정원명>과<선림원종명>에 나온다. 功夫의 합자인 巭와 伯士의 합자도 앞의 두 銘에서 발견된다. 巭는 고려시대 이후에는 㠫로 쓰여 우리의 고유한자로 굳어졌다. 이러한 합자의 관습에서 나온 것이<신라장적>에 나오는 畓자이다. 이는 水田을 합자하던 관습에서 온 것으로 자형이 沓과 비슷하여 ‘답’으로 읽히지만 이는 후대의 독법이고 본래는 ‘논’으로 읽었을 것이다. 콩을 太로 표기하는 것은 기원적으로 大豆를 합자하여 쓰던 것이 豆자를 초서체로 흘리다가 간략화되어 점으로 바뀜으로써 생긴 것이다. 大豆의 豆를 점에 가깝게 흘려 쓴 예가<제2신라문서>에 나타나 이 시대에 太의 자형이 발달헀을 가능성을 보여주고 있다.1205)南豊鉉,<韓國의 固有漢字>(≪국어생활≫17, 국어연구소, 1989) 참조.
이 글의 내용은 집필자의 개인적 견해이며,
국사편찬위원회의 공식적 견해와 다를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