통일신라시대의 왕릉이라 전해지는 고분은 경주를 중심으로 모두 17기 정도이다. 이 중에 확실하다고 믿어지는 왕릉은 4∼5기에 불과하다. 즉 무열왕릉(660)·신문왕릉(692)·흥덕왕릉(836)·신덕왕릉(917) 등이다. 전해져 오는 왕릉을 모두 포함시켜 왕릉의 구조를 보면 크게 4가지로 분류할 수 있다. 첫째는 봉토 하부나 외부에 아무런 석축이나 석물이 없는 것이고, 둘째는 봉토 하부에 석축을 쌓은 것이며, 셋째는 봉토 하부에 십이지상을 조각한 호석을 돌린 것이고, 넷째는 십이지상 외에 묘 앞에 석인상 등을 배치한 것을 들 수 있다. 첫째 유형의 예는 효소왕릉(702)·희강왕릉(838)·신무왕릉(839)·효공왕릉(912)·신덕왕릉·경명왕릉(924)·경애왕릉(927) 등이며 두번째 유형의 예는 무열왕릉·헌안왕릉(861)·신문왕릉·민애왕릉(839)·헌강왕릉(886)·정강왕릉(887) 등이다. 셋째 유형의 예는 경덕왕릉(764)·헌덕왕릉(826)·김유신묘(673)·구정동 방형분 등이다. 네번째 유형의 예는 성덕왕릉(737)·흥덕왕릉·괘릉(원성왕릉으로 추정, 798) 등이다.
왕릉의 내부구조는 확실하지 않으나 당시 유행하던 석실분으로 추정된다. 도굴로 인해 내부가 알려진 신덕왕릉의 내부는 석실의 크기가 약 3㎡이고, 천정고 3.9m, 네 벽은 안쪽으로 기우려 한장의 천정석을 올려 놓았다. 남쪽 벽의 중앙에는 너비 0.96m, 높이 1.2m의 연도문이 설치되었다. 현실의 안에는 깊이 1.42m, 높이 0.25m의 방형 관대를 만들고 그 위에 동서 방향의 2인분 시상이 있어 합장묘임을 알 수 있다. 이 왕릉에서 중요한 것은 회칠을 한 동·서·북 3면 하부에 동·서에 각각 3개 북벽에 6개, 모두 12폭의 각 폭을 당시 상·하단으로 갈라, 주·황·청·백·감의 5색을 서로 다르게 칠하여 색병풍처럼 만든 점이다. 각 장방형의 채색 크기는 높이 1.4m, 너비 0.34m이다. 이 12개의 화폭은 수로 보아 십이지를 뜻하는 듯하며 2색의 배합으로 각 지를 표현한 것 같다.
통일신라시대의 왕릉은 뚜렷한 시대구분은 할 수 없지만 봉토뿐인 고식의 것에서 당나라식의 석물, 신도가 왕비된 형식에 이르기까지 발전하였다는 것을 알 수 있으며 십이지석·석사자·상석의 배치 등 고려·조선시대의 왕릉에 이르기까지 계속되어 온 한국식 왕릉형식의 시작이라는 점에 중요한 의미가 있다. 또한 예외의 것이 있지만 통일신라시대로 들어 오면서 신라시대의 머리를 동쪽으로 두는 제도가 북쪽으로 바뀌고 이후 북으로 머리를 두는 침향제도가 굳어진 것도 중요한 사실이며 이는 동침에서 북침으로 변화된 것이 고구려나 백제의 영향이었음을 알려주는 중요한 점이라 할 수 있다.
통일신라시대의 장법으로는 특수형식이라 할 수 있는 수중릉이 있다. 이름은 경북 경주군 양북면 용당리 앞 바다에 있다. 일반적으로 대왕암이라 불려지고 있으며≪삼국유사≫와 1967년 5월 조사에 의해 문무왕의 릉으로 알려져 있다. 이 대왕암은 자연의 큰 바위 속에 연못 같이 바닷물이 차 있고 파도에 의해 바닷물이 드나들게 되어 있으며 바위 속 연못 중앙에는 큰 자연석이 물 속에 잠겨 있는데 그 밑에 유골을 안치한 것으로 생각되나 자세한 내용에 대해서는 아직 확실히 알 수 없다. 그러나≪삼국유사≫의 기록이나 현황으로 보아 물 속에 지석묘 같은 시설이 있지 않을까 추정된다. 이 장법은 유일무이한 특수묘라 할 수 있다.
일반 분묘는 석실분이었을 것으로 보이며 화장이 점차 유행되어 큰 봉토분은 서서히 자취를 감추었으리라 생각된다. 경주 남산일대에서 발견되는 골호라 생각되는 유개토기는 그것을 뒷받침하여 준다. 골호로 사용된 유개합은 표면에 통일신라시대 특유의 인화문이 있는 것이 대부분이며 간혹 화병 같은 병, 당나라 백자병이나 삼족기 같은 삼채도기를 사용한 예도 보인다.1278)김용문·안휘준,≪한국미술사≫(서울대출판부, 1993).
<金東賢>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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