발해 초기 주민구성의 일면을 전해 주는 기록으로는 다음의 기사가 있다.
발해는 고려의 故地에 있다.…그 나라는 2천 리에 걸쳐 있다. 館驛이 없고 곳곳에 村里가 있는데 모두 靺鞨부락이다. 그 백성은 말갈이 많고 土人이 적은데, 모두 토인으로 村長을 삼는다. 大村의 장은 都督, 그 다음 촌의 장은 刺史라 하는데, (이들 촌장들을) 그 아래 백성들이 모두 首領이라 부른다. 매우 추워서 토지는 水田에 적합하지 않다. 그 習俗에 자못 글을 알고 있다. 高氏 이래로 조공이 그치지 않는다(≪類聚國史≫권 193, 殊俗部, 渤海 上).
이는 발해 초기에 발해를 방문하였던 일본 사신의 견문기에 입각한 것으로 여겨진다.066)石井正敏,<渤海の日唐間における中繼的位置について>(≪東方學≫51, 1976). 이 기사에서 먼저 ‘土人’의 존재가 주목된다. 토인이란 그 지역의 토착 원주민을 의미한다. 발해국을 주도하는 중심 족속을 토인이라 표현한 것으로 보아, 위 기사의 토대가 되었던 견문기를 썼던 일본 사신은 使行을 가기 전에 발해국에 대해 그 나름대로의 이해와 지식을 지니고 있었던 것 같다. 즉 발해국은 ‘토인’으로 표현된 어느 족속의 나라이며, 그 문물 제도는 어느 정도의 수준일 것이라는 인식을 가지고 있었다. 그런데 실제 도착하여 견문해보니 자신이 전에 지녔던 그것과 다른 면모가 있게 되자 이를 特記하여 ‘관역이 없고 곳곳에 촌리가 있는데, 모두 말갈부락이며, 그 백성은 말갈이 많고 토인이 적다’고 서술하였을 것이다. 그렇지만 촌의 장은 토인이 되었다는 등의 사실을 통하여, 자신이 종래 지니고 있었던 인식의 한 부분을 확인하였다. 그래서 뒤에 자신이 견문한 바를 기록으로 남길 때에도 발해국을 주도하고 있다고 여겨 왔던 그 족속을 표현해 계속 토인이라고 하였던 것이다. 요컨대 이 기사를 통하여 발해 초기부터 그 주민은 ‘토인’과 말갈이라는 두 족속으로 구성되었음을 확인할 수 있다.
이같은 주민구성에서의 이중성은 발해 말기까지도 이어졌다. 예컨대 南海府와 鐵利府지역의 경우를 보면, 지방관에 의해 직접 통치되는 이들 외에 부족 단위로 자치를 영위하던 말갈족들이 존재하였다. 당시 발해국의 주민들은≪新唐書≫발해전에 전하는 바에 의하면 외형상 모두 부-주-현제 아래 귀속되어 있었던 것으로 되어 있다. 그러나 실제로는 주요 성과 館驛 및 큰 浦口 등을 중심으로 교통망과 농경이 발달한 지역의 주민은 주현제로 편제되었고, 그 밖의 지역의 주민은 族制的 성격이 강한 부족이나 부락별로 편제되어 수령을 통해 간접적으로 지배되었다. 발해 멸망 후 거란에 의해 요동지역 등으로 강제 이주된 이들은 주로 전자에 속하는 부류들이었는데, 그들이 앞에서 말한 ‘발해인’이었다. 한편 후자는 발해의 지배력의 약화·소멸과 함께 오히려 대외적으로 활발한 움직임을 벌여나갔는데, 그럴 수 있었던 것은 이들이 발해의 지배조직에 집단별로 예속되어 자치를 영위하고 있었기 때문에 가능하였던 것이다. 곧 주민구성의 이중성이 통치구조의 이중성과 연결되었던 면을 보여준다.067)盧泰敦, 앞의 글 참조.
발해 멸망 후에는 발해인과 여진인으로 뚜렷이 구분되는 면을 보였음은 앞에서 살펴보았다. 발해인에는 高氏·大氏·王氏 등의 右姓들이 포함되어 있었고 여진인은 말갈족의 후예이므로, 곧 토인=발해인, 말갈=여진인이라는 등식을 성립시켜 볼 수 있다. 물론 발해국의 진전과 함께 말갈족의 일부가 사회적·문화적으로 토인에 동화됨에 따라, 결과적으로 발해국의 주민구성에서 ‘토인’이 점하는 비율이 증대되었을 수는 있겠으나, 양자간의 구분과 상이한 위치는 발해 말기까지도 이어졌다.
그러면 구체적으로 토인이란 어떠한 족속을 지칭한 것일까. 위의 인용문에서, “발해는 고려의 故地에 있다” “高氏 이래로 조공이 그치지 않는다”라고 하였다. 자연 발해국이 일어난 땅의 원주 토착민이란 뜻으로 표현된 토인은 고구려계 사람을 의미한다. 발해가 고구려의 ‘옛 땅’에 있다는 표현을 단지 양국의 영역이 지역적으로 일치함을 나타낸 것일 뿐이라고 볼 수만은 없다. 발해가 고구려의 계승국이라는 인식을 함축하고 있는 것이다. 727년 발해 사신이 처음 일본에 간 것을 기술하면서,≪續日本紀≫에서 ‘渤海郡은 옛적의 고려국이다’라고 하였음도 동일한 면을 나타낸다.068)≪續日本紀≫권 10, 聖武天皇 神龜 4년 12월 병신. 그리고≪類聚國史≫의 저자인 管原道眞은 일본에 간 발해 사신을 접대하며 그들과 詩話를 나누며 교류한 바 있다.069)鳥山喜一,≪渤海史考≫(目黑書店, 1914), 206∼212쪽. 자연 그는 발해국의 성격에 대한 일정한 이해를 가지고 있었을 것이다. 그러한 그가 위의 기사를 다른 자료에서 인용 전재하였다는 것은, 그러한 사실을 인지하고 있었기 때문이라고 보아야 할 것이다. 비단 그 뿐아니라 발해국 존립 당시, 발해국의 성격을 고구려인에 의한 고구려의 계승국이라고 여기는 것은 당시 일본측의 공통된 인식이었다. 곧 토인은 고구려 계통의 족속을 지칭한 것이었다.
그런데 발해국을 주도하였던 집단에는 분명히 말갈족 계통도 포함되어 있었다. 발해의 건국 주체세력이 되었던 이들 가운데에는 乞四比羽 휘하의 말갈족도 있었다. 이들이 토인의 일부가 되었을 것은 능히 짐작할 수 있다. 이와 아울러 대조영집단의 出自에 대한 논란을 감안한다면, ‘토인’의 성격에 대하여 간단히 결론짓기에는 여전히 문제가 남아 있다. ‘土人’의 구성에 대하여 좀더 구체적으로 검토해 볼 필요가 있는 것이다.
발해국의 주민의 대다수를 차지하고 있던 이들은 고구려계 사람과 말갈계 사람이었다. 이들은 다시 계통별로 다음과 같이 분류해볼 수 있다. 먼저 고구려계 사람들(A)은 ① 營州방면에서 동쪽으로 이동해온 집단, ② 고구려국의 서·남부지역에서 동으로 이주해온 집단, ③ 두만강 유역이나 길림지역과 같은 원주지에 계속 머물고 있다가 발해에 편입된 집단, ④ 9세기 전반 발해의 宣王代에 흡수된 요동지역의 고구려계 사람들 등으로 구성되었다. 말갈족(B)은 ① 영주 방면에서 동쪽으로 이동해온 집단, ② 伯咄部·安車骨部·號室部 및 粟末部와 白山部 잔여세력 등 발해 건국 후 상대적으로 이른 시기에 발해의 주민으로 편입된 집단, ③ 黑水部·鐵利部·越喜部·拂涅部 등 늦은 시기에 발해에 병합된 집단 등으로 구분해 볼 수 있다.070)盧泰敦, 앞의 글.
이 중 상대적으로 늦은 시기에 발해에 병합된 (A)의 ④와 (B)의 ③은 토인의 來源을 검토하는 데에서 일단 제외시켜도 문제는 없을 것이다. 토인은 발해 초기부터 말갈과 구분되었기 때문이다.
다음으로 발해국 초기의 주민구성이 ‘토인’과 ‘말갈’로 구분되었는데, 토인집단에는 고구려계 사람들과 말갈계 사람들이 포함되어 있었다. 그렇다면 (B)의 ①과 ② 중 어느 집단이 토인과 대비되는 말갈의 중심이 되었을까. 이는 토인과 말갈이 이른 시기부터 구분되어졌고, 발해 건국의 주체세력의 주요 부분을 이룬 것이 (B)의 ①을 포함한 영주방면에서 東走해온 집단이었다는 사실 등을 고려할 때, (B)의 ②집단이 위의≪유취국사≫의 인용문에서 전하는 ‘말갈’이 되었다고 보아도 큰 무리는 없을 것이다.
이렇게 보면 (A)의 ①②③과 (B)의 ①이 ‘토인’을 형성하였다고 볼 수 있다. 물론 부분적인 가감은 있을 수 있겠지만, 전체적으로 보아 발해국의 주민을 형성한 집단들의 계통별 분류의 측면에서 그러한 추론이 가능하다.
그러면 토인의 주축은 (A)인가 아니면 (B)의 ①인가. 일단 수적인 면에서 (A)집단이 (B)의 ①집단보다 훨씬 많았을 것임은 확실하다고 할 수 있다. 그런데 토인 즉 발해인 중에서 발해국 당시 및 멸망 후 활동한 이로서 성명이 알려진 사람들 가운데, 고씨와 대씨가 압도적으로 많다. 요동으로 옮겨진 후 일어난 두 차례의 발해인의 봉기에서 중심인물이 각각 대씨(大延琳)와 고씨(高永昌)였다는 사실도 우연한 일이 아니다. 이 중 고씨는 고구려의 大姓이었으니, 대씨의 출자가 관심의 초점이 된다. 대씨는 발해의 왕족이었고 영주 방면에서 동주해온 집단, 즉 (A)의 ①과 (B)의 ①의 중심이었다. 만약 대씨가 고구려인이었다면, ‘토인’은 고구려인이 주류가 되었던 집단임이 명백해진다. 그러면 대씨의 出自에 대해 살펴보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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