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신편 한국사
  • 고대
  • 10권  발해
  • Ⅱ. 발해의 변천
  • 3. 발해유민의 부흥운동
  • 1) 발해유민의 의미
  • (2) 발해국 지배층의 성씨 분포와 그 유민

(2) 발해국 지배층의 성씨 분포와 그 유민

 발해유민을≪고려사≫나 중국이나 일본측의 기록에서 가려내는 작업은 ‘발해유예’를 그 범주에 포함시킬 때에 쉽지 않은 일이다. 좁은 의미의 발해유민은 ‘발해 아무개’와 같이 국적이 확실히 밝혀진 사람들을 뽑으면 된다.166)李鍾明,<高麗에 來投한 渤海人考>(≪白山學報≫ 4, 1968).
權兌遠,<高麗初期 社會에 미친 歸化人의 影響에 관한 考察>(≪忠南大 人文科學論文集≫19, 1981).
金昌謙,<後三國 統一期 太祖 王建의 浿西豪族과 渤海遺民에 대한 政策硏究>(≪成大史林≫4, 1987).
朴玉杰,<高麗時代의 渤海人과 그 後裔>(≪退村閔丙河敎授停年紀念 史學論叢≫, 1988).
그러나 ‘거란(요) 아무개’도 때에 따라서는 발해유민으로 보아야 한다. 이름이 밝혀진 사람들 중에 거란 국적을 가졌다 할지라도 발해유민으로 볼 수 있는 사람들은, 우선 같은 이름을 가진 사람이 일정한 시간이 흐른 후 ‘거란’으로 표기되는 경우와, 그 다음으로 거란사람들 중에서 발해 지배층에 많이 나타났던 사람들의 성씨, 이를테면 ‘高아무개’, ‘大아무개’와 같은 사람들, 끝으로 앞뒤의 상황으로 미루어 보아 발해유민으로 판단할 수 있는 경우가 있지 않을까 한다. 그러나 위의 세 가지 경우 중 첫번째의 예는 찾아볼 수 없고, 두번째와 세번째의 경우를 통해서 거란 국적을 가진 발해유민을 구별해 낼 수 있다.

 우선 여러 사료들 가운데서 발해인으로 이름이 밝혀진 성씨를 종합해 보기로 한다. 물론 성씨가 밝혀진 고아무개나 대아무개만이 발해유민이 아닐 것임은 분명하다. 오히려 성씨가 밝혀져 있지 않은 이를테면, 고아무개나 대아무개의 이름 뒤에 따라붙는 몇 십·몇 백·몇 천의 사람들도 이름이 밝혀져 있는 사람들과 똑같이 발해인이었기 때문이다. 金毓黻의≪渤海國志長編≫에 의거하여 발해인의 성씨를 종합하면 다음의<표 1>과 같다.167)金毓黻의≪渤海國志長編≫ 宗臣·諸臣·士庶·遺裔列傳에 의거하여 작성하였으며 위의 釋은 승려로서 俗姓은 알 수 없다.

宗 臣 諸 臣 士 庶 遺 裔























기타
1명씩
49
























32
8
13
2
6
8
3
2
3
2
2
1

1
2
2


2

2

32

1










1

1


1
2

1


3
41
23
14
5
11
5
1

1




2



1


1


30
90
56
22
18
13
11
9
3
3
3
2
2
2
2
2
2
2
2
2
2
2
2

65
49 132 8 137 317

<표 1>발해 지배층 성씨 분포표

 표에 나타난 사람들의 성씨 분포를 보면 大氏가 90명, 高氏가 56명, 王氏가 22명, 李氏가 18명, 張氏가 13명의 순이다. 이것은 발해와 고구려 왕족이었던 대씨와 고씨가 발해 왕실에서 가장 큰 비중을 차지하고 있었다는 역사적 사실과 부합하는 것이다. 그리고 고씨 다음으로 나타난 王·李·張·烏·楊氏들도 발해사회에서 상당한 위치에 있었는데 이들도 모두 발해의 지배층이었다.

 앞의<표 1>의 내용을 뒷받침하는 사료는 중국측의 기록에서도 볼 수 있다.

옛날 그(발해) 왕은 姓이 大氏였고, 右(貴)姓으로는 高·張·楊·竇·烏·李氏의 몇 종류에 불과했으며, 部曲·奴婢·無姓者는 모두 그들 주인의 姓을 따랐다(洪皓,≪松漠紀聞≫권 上, 渤海).

 이것은 대부분 앞의 성씨분포표와 일치하는데, 단지 竇氏가 분포표에서 1 명도 없다는 것이 예외라 하겠다. 또한 위의 여섯 개의 右姓(貴族姓) 외에 발해의 庶姓으로 49개의 성씨가 있었는데 이들은 다음과 같다.

賀·王·任·馬·馮·呂·裴·崔·已·慕·郭·木·史·辛·解·趙·劉·朱·衛·吳·洪·林·申·夏·梁·羅·文·安·朴·胥·茹·卯·門·隱·周·列·公·多·聿·受·智·壹·怱·古·阿·達·冒·謁·渤海(金毓黻,≪渤海國志長編≫권 16, 族俗考 3).

 이들 성씨는 앞의 성씨분포표에서 대부분 2명 내지 1명씩 있었던 사람들로서, 김육불은 이들을 모두 庶姓이라 하였으나 오히려 우성으로 보아야 할 것이다. 왜냐하면 7세기말에서 10세기 초엽에 성씨를 가졌던 사람들은 발해에서 비교적 높은 지위에 있었던 사람들로 볼 수 있기 때문이다.

개요
팝업창 닫기
책목차 글자확대 글자축소 이전페이지 다음페이지 페이지상단이동 오류신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