위에서 살펴 본 것처럼 계림공과 이자의가 왕위를 둘러싸고 전개했던 갈등 상황519)李丙燾, 앞의 책, 159쪽에서는 왕제 漢山侯 昀과 鷄林公 熙를 중심으로 한 왕위 계승의 투쟁으로 이해 하였다.은 이자의의 謀亂, 그리고 계림공과 정치적 입장을 같이 하였던 邵台輔가 상장군 王國髦로 하여금 이를 진압케 하는 과정을 거친 다음, 계림공이 中書令에 임용되어520)≪高麗史≫권 10, 世家 10, 헌종 1년 8월 을축. 전권을 장악하였고 같은 해 10일 헌종의 선양에 의해 왕위를 계승함으로써521)≪高麗史≫권 10, 世家 10, 헌종 1년 10월. “制曰 朕承先考遺業 謬卽大位 年當幼沖體亦病羸 不能撫邦國之權…朕當退居後宮 獲全殘命 乃命近臣金德鈞等 迎鷄林公熙于宗邸 禪位 遂退居後宮” 일단락되었다. 계림공이 이자의의 난을 진압하고 왕위를 계승할 수 있었던 것도 그 역시 이자의와 마찬가지로 자신의 정치적 목적 달성을 위하여 이에 상응하는 세력을 소유하고 있었기 때문에 가능하였다 할 것이다.
먼저 그의 세력기반으로 이자의가 소유하지 못하였던 국가의 강제적 물리력인 군사권의 장악을 들 수 있다. 이는 헌종 1년 權尙書兵部事로서 군사권을 장악하고 있었던 왕국모522)≪高麗史節要≫권 6, 헌종 1년 1월.가 소태보의 명을 받아 군사를 거느리고 入衛하였을 뿐만 아니라 장사 高義和로 하여금 이자의와 그의 무리를 제거하게 한 것으로 알 수 있다.523)≪高麗史≫권 95, 列傳 8, 邵台輔. 숙종과 이들과의 연결 시기는 선종 8년 9월 경인일에 있었던 賞春亭에서의 여진문제 논의에 계림공이 문하시랑평장사 柳洪·좌복야 소태보·상장군 왕국모 등과 함께 참여하였던 사실을 들고, 그것은 여진에 대한 공동 대처의식과 왕실 및 국가보전이라는 원론적인 인식을 같이 하였기 때문이었다는 견해524)金光植, 앞의 글, 117쪽.가 있다. 그러나 국가적 현안문제에 대한 뜻이 같았다는 사실만으로 긴밀한 관계가 맺어지게 되었다고 보기는 어려울 뿐 아니라 그 계기로 제시된 내용 또한 구체적이지 못하다. 오히려 계림공과 이들이 연결될 수 있었던 것은 정치적 입장이나 이해관계의 합치 때문일 것이다.525)정치세력의 결집 요인으로 盧明鎬,<韓安仁一派와 李資謙一派의 族黨勢力-高 麗中期 親屬들의 政治勢力化 樣態->(≪韓國史論≫17, 서울대 國史學科, 1987), 195쪽에서는 친속관계의 유대와 각자의 사상 등에 따른 입장이나 이해관계의 합치라는 두 가지를 들고 있다. 그밖에 군사력 운용에 실질적으로 참여하였던 2군 6위의 상장군·대장군 또한 숙종의 지지세력으로 기능하였다. 이는 다음의 인사이동과 숙종 즉위 이후 자신의 지지세력에게 행한 포상책의 내용으로 알 수 있다.
黃仲寶를 尙書左僕射로, 尹莘傑을 龍虎軍上將軍 兵部尙書로, 黃兪顯을 工部尙書로, 崔迪을 金吾衛上將軍 攝刑部尙書로 하였다(≪高麗史≫권 11, 世家 11, 숙종 즉위년 10월 경진).
황유현을 鷹揚軍上將軍 戶部尙書로, 최적을 神虎衛上將軍 刑部尙書로, 王惟烈을 金吾衛上將軍 工部尙書로 하였다(≪高麗史≫권 11, 世家 11, 숙종 1년 1월 정사).
숙종의 또 다른 세력기반으로는 측근세력과 당시 이자의의 세력으로 기능하지 않았던 중앙정계 구성원의 대부분, 그리고 사병세력 내지 상공업 등과 관련을 맺고 있었던 인물들을 들 수 있다. 고려시대의 諸王子들은 府를 설치하고 典籤·錄事·書藝 등의 관원을 두었는데,526)≪高麗史≫권 77, 志 31, 百官 2. 계림공 역시 왕자였기 때문에 자신의 부를 통해 측근세력을 형성할 수 있었을 것이다. 이는 許慶의 예로527)≪高麗史≫권 97, 列傳 10, 許慶. 입증할 수 있다. 그리고 당시 중앙정계 구성원의 대부분이 숙종의 지지세력이었다고 하는 것은 먼저 이자의의 난으로 화를 당한 인물이 거의 없으며, 선종 후반에서 헌종 1년에 이르기까지 중앙정계의 요직에 있었던 인물의 대다수가 숙종 즉위 이후에도 정계에서 활약하고 있기 때문이다. 사병세력 내지 상공업 등과 관련된 인물들의 존재는 다음의 자료를 통해 알 수 있다.
그 밖에 등급을 뛰어 관직을 옮긴 자가 수백 인이며, 工商皂隷로서 顯職을 超授한 자가 있어도 有司가 감히 말하지 못하였다(≪高麗史≫권 11, 世家 11, 숙종 즉위년 10월 경진).
위의 내용은 숙종 즉위년에 있었던 자신의 왕위 계승과 관련된 포상조치 내용의 끝 부분이다. 이 가운데 ‘등급을 뛰어 관직을 옮긴 자’들은 관직에 재직 중이었던 자로 생각되므로 숙종은 대부분의 관료들로부터 지지를 받았음을 알 수 있다. 그리고 ‘공상조예로서 현직을 초수받은 자’는 종전 세밀한 분석없이 사병세력으로 이해되었으나,528)南仁國, 앞의 글, 135쪽. 최근에 “거상과 같은 막대한 경제력의 소유상태보다는 보다 미약한 경제력의 상태를 느낄 수 있는 존재들로서 이들이 숙종의 潛邸 시절에 숙종과 긴밀하였다는 것은 숙종 자신의 상업에 대한 깊은 관심 혹은 상업에서 수취되는 경제력을 그의 기반세력의 토대로 활용되는 가능성을 전제로 하는 것이라 하겠다”529)金光植, 앞의 글, 117∼118쪽.라고 하여, 이들을 숙종의 경제적 기반으로 이해하려는 견해가 발표되었다.
고려시대의 국내 상업은 관아 도시와 사원을 중심으로 발달하였다. 관아 도시 중에서도 개성의 市廛 상업이 가장 활발하게 발달하였고, 개성 시전은 중앙정부의 조달상 및 수도를 찾아오는 외국인을 대상으로 하는 최대 규모의 상인으로서의 위치를 유지하였을 뿐만 아니라 정부의 보호를 받으면서 그들의 활동을 외국무역으로 연결시켜 부를 축적하였다고 한다.530)姜萬吉,<商業과 對外貿易>(≪한국사≫5, 국사편찬위원회, 1975), 196∼198쪽. 그리고 사원의 지원세력으로 기능하였던 豪商·大賈의 존재도 찾아진다.531)<金山寺慧德王師眞應塔碑>(≪朝鮮金石總覽≫上, 朝鮮總督府, 1919), 302쪽. 한편 수공업에 의한 상업활동도 관청수공업이나 민간수공업을 막론하고 비교적 활발하였다.532)수공업에 대해서는 劉元東,<高麗時代의 商工業>(≪韓國文化史大系≫2, 高麗大民族文化硏究所, 1965), 姜萬吉<手工業>(앞의 책) 등 참조. 그중 관청수공업은 정부의 용도와 수요에 따라 생산활동을 하였는데, 각 관청에는 이를 위해 해당 기술자인 工匠을 전속시켜 놓고 있었다.533)洪承基,<高麗時代의 工匠>(≪震檀學報≫40, 1975).
수도에서 발생한 왕위 계승과 관련된 정치적 사건에 관여하였던「工商皂隷」는 벼슬길에 들어가 사족과 함께 어깨를 나란히 할 수 없는 존재들로서, 工技 이외의 일로 생업을 삼을 수 없었던 공장과, 소유한 부의 정도를 측정할 수는 없지만 어느 정도의 경제력을 지닌 상인, 그리고「조예」라 표현되었지만 일반 백성 등을 의미하는 것이라 생각된다. 이들이 숙종과 연결될 수 있었던 것은 그가 왕자로서 侯·公에 봉해질 때 받았던 식읍 1,000호534)≪高麗史≫권 8, 世家 8, 문종 19년 2월 갑인.(공에봉해졌을 때의 식읍 지급 내용은 알 수 없음)와 문종 30년의 녹봉규정에 의한 宗室祿 460석 10두535)≪高麗史≫권 80, 志 34, 食貨 3, 祿俸.와 같은 경제력과 관계가 있는 것은 아닌가 한다. 이와 같이 이해할 수 있다면, 숙종은 자신이 소유하였던 경제력을 배경으로 자신의 정치적 목적 달성을 위해 동원할 수 있는 사병집단을 양성하였다고 생각할 수 있을 것이다.
이상의 내용을 통해서 숙종의 즉위는 다음과 같이 이해할 수 있겠다. 선종 사후 왕위 계승 의욕을 지니고 있었던 계림공과 한산후를 추대하려는 이자의 사이에는 왕위 계승을 둘러싸고 대립이 있었다. 이러한 양 세력 가운데 왕위 계승에 지나치게 간여하였을 뿐만 아니라 왕권 강화에 장애적 요인으로 성장하였던 외척 인주 이씨의 정치적 영향력을 약화시키고, 왕권의 안정을 꾀하기 위하여 당시 군사권을 장악하고 있었던 소태보와 왕국모 및 2군 6위의 상위집단과 연결되었고, 나아가 당시 중앙정계 대다수 문·무반의 지지를 획득하였던 계림공이 이자의의 의도를 무산시키고 헌종의 선양이란 형식을 거쳐 왕위를 계승하게 되었다.536)南仁國, 앞의 글, 134∼135쪽. 숙종의 왕위 계승은「王室中興」537)<崔繼芳墓誌>(李蘭暎 編,≪韓國金石文追補≫, 中央大出版部, 1968), 93쪽.이라 표현될 만큼 명분상으로도 이자의의 한산후 추대 의도를 압도하였던 것이라 생각된다.
이 글의 내용은 집필자의 개인적 견해이며,
국사편찬위원회의 공식적 견해와 다를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