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신편 한국사
  • 고려 시대
  • 13권  고려 전기의 정치구조
  • Ⅰ. 중앙의 정치조직
  • 1. 중앙의 통치기구
  • 1) 고려 초기의 정치제도
  • (1) 건국 초기의 정치기구

(1) 건국 초기의 정치기구

 고려의 기본적인 정치제도는 3省·6部를 중심으로 한 것으로 唐制를 모방한 것이다. 그러나 이러한 당제에 따른 3성·6부제가 고려에서 실시된 것은 成宗代였다.≪高麗史≫百官志 서문에는 太祖 2년(919)에 3省·6尙書·9寺·6衛가 설치되었다고 서술되고 있으나 실제로 당제와 같은 3성·6부제가 처음으로 실시된 것은 건국 후 60여 년이 지난 성종 때였다.

 그러면 이러한 당제에 따른 3성·6부제가 실시되기 이전 고려 초기의 관제는 어떤 내용이었을까. 고려 초기란 이 중앙 관제상에서 볼 때 성종 이전까지를 말한다. 고려시대에 있어서 성종 때는 유교정치에 입각한 왕권의 안정을 기하였던 시기였다. 이에 반하여 그 이전은 아직도 왕권이 안정되지 못하여 왕조의 기반이 확립되지 못하였던 시기라 할 수 있다. 성종 이전을 고려 초기라 하는 것은 이런 점에서 수긍이 간다. 특히 정치제도로 보면 성종 때는 그 이전과 커다란 획을 긋게 한다. 전술한 대로 중앙 관제상 3성·6부제가 실시되었을 뿐 아니라 또한 지방제도에서도 12牧의 설치로 처음 外官이 파견되었기 때문이다. 역으로 말한다면 고려 초기는 중앙 관제로 보아도 3성·6부제가 아닌 임시적인 정치기구가 설치되고 지방제도로는 아직도 州縣에 외관이 파견되지 못하고 있었다고 하겠다.

 결론적으로 말하여 고려 초기의 정치제도는 그 전의 弓裔의 泰封官制를 답습한 것이라 말할 수 있다. 아직 건국 초창기로 고려 자신의 정치제도를 제정 실시하지 못하고 옛 제도를 그대로 이어 사용하였던 것이다. 그러면서도 어떤 부문에서는 태봉의 제도를 현실에 맞게끔 조금씩 변형한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태조가 건국한 후 채용한 정치기구는 태봉의 관제인 廣評省을 정점으로 한 것이었다. 태조 王建은 태봉에서 侍中의 최고 관직까지 오른 사람이었으므로 궁예를 넘어뜨리고 고려를 건국하자 그 때까지의 구제를 그대로 이어 받았을 것은 쉽게 짐작할 수 있다. 태조가 건국한 지 5일만에 단행한 관직 임명을 보면 이 때의 정치기구의 구성이 그대로 나타난다. 이 때 임명된 관직과 사람을 표로 만들면 다음과 같다.0001)≪高麗史≫권 1, 世家 1;≪高麗史節要≫권 1, 태조 원년 6월 신유.
邊太燮,<高麗 初期의 政治制度>(≪韓㳓劤停年紀念 史學論叢≫, 知識産業社, 1981).

官 署 長 官(人名) 次 官(人名) 郎·史(人名)
廣 評 省

 
侍 中 (金行濤)

 
侍 郞 (林積璵)

 
郎 中 (申 一)
郎 中 (林 寔)
員外郞 (國 鉉)
內 奉 省

 
 令  (黔 剛)

 
 卿  (能 駿)
 卿  (權 寔)
 
內奉監 (康允珩)
內奉理決(倪 言)
評 察 (曲衿會)
徇 軍 部  令  (林明弼)   郎 中 (劉吉權)
兵 部
 
 令  (林 曦)
 
 卿  (金 堙)
 卿  (英 俊)
 
倉 部
 
 令  (陳 原)
 
 卿  (崔 汶)
 卿  (堅 術)
 
義 刑 臺  令  (閻 萇)    
都 航 司  令  (歸 評)  卿  (林湘煖)  
物 藏 省
 
 令  (孫 逈)
 
 卿  (姚仁暉)
 卿  (香 南)
 
內 泉 部  令  (秦 勁)    
珍 閣 省  令  (秦 靖)    
白 書 省
 
   卿  (朴仁遠)
 卿  (金言規)
 
內 軍
 
   卿  (能 惠)
 卿  (曦 弼)
 

<표 1>太祖 元年의 官職任命

 이<표 1>을 보면 이 때의 관서는 廣評省·內奉省·徇軍部·兵部·倉部·義刑臺·都航司·物藏省·內泉部·珍閣省·白書省·內軍 등 12개 기구이다. 즉 5省·4部·1臺·1司·1軍이 된다. 이들 관서의 순서는 단순한 나열이 아니라 서열로 보여진다. 그것은 실제로 광평성이 최고 기관이고 이어 내봉성·순군부·병부가 강력기구의 위치에 있었기 때문이다.

 이들 태조 즉위 직후의 관서를 보면 태봉의 제도를 그대로 채용하였음이 눈에 띤다.≪三國史記≫職官志 弓裔官號에 기록된 태봉의 관서를 보면 광평성 등 19개가 된다. 이 태봉의 관서 중 고려 초와 같은 것은 광평성·내봉성·병부·의형대·물장성의 다섯 기관이다. 그러나 중요 관서인 순군부·창부, 그리고 진각성도 태봉 때 있었다는 기록이 있으므로0002)건국 직후의 인사에 “前守徇軍部卿 能駿·倉部卿 權寔 並爲內奉卿”이라 하여 이미 태봉 때 순군부와 창부가 있었음이 증명되고, 또 태조 원년 9월에 珍閣省卿 柳陟良이 혁명이 일어났을 때 진각성 창고의 소관물자를 잘 지킨 공으로 廣評侍郞을 특별히 수여하였다는 기록으로 역시 태봉 때 진각성이 있었음이 나타난다. 고려 초의 12개 관서 가운데 4대 중요 관부인 광평성·내봉성·순군부·병부를 비롯하여 모두 9개가 태봉제였음을 알 수 있다. 건국 또 직후에 설치된 12개 관서에는 없으나 元鳳省도 궁예 이래 그대로 존속되었음이 나타난다.0003)≪高麗史≫권 92, 列傳 5, 崔凝傳에는 최응이 건국 직후에 태봉구제에 따라 知元鳳省事에 임명되었다 한다. 그 밖의 도항사·내천부·백서성의 3개 관부도 비록 사료에는 보이지 않으나 역시 궁예 때부터의 관서로 보인다.

 이와 같이 태봉 구제를 답습한 고려 건국 직후의 관제는 그대로 성종 초까지 계속되었다. 태조가 처음 관직을 임명한지 7일 후에 새 관제를 개정하였 다고 하면서 내린 詔書에서 지금부터는 모두 신라의 구제에 따르고 그 명의 가 알기 쉬운 것만 궁예의 신제에 따르라고 하였지만, 이것은 궁예의 광평성체제의 변화를 뜻하는 것이 아니라 다만 신라의 官階를 사용케 한 사실을 말한 것이었다.0004)≪高麗史≫권 77, 志 31, 百官 2, 文散階. 다만, 태조 중엽에 새로운 권력기구가 출현하였으니, 그것은 內議省이라는 관서이다. 내의성에 관한 최초의 기사는 태조 13년(930) 3월 內 議舍人 임명의 사실이며, 그 후 26년(943) 5월 태조가 서거할 때 백관이 내의 성 문밖에 列位하여 宰臣인 王規가 遺命을 宣示하였다 하니, 내의성이 태조 중기부터 설치되고 그 지위가 자못 높았음을 짐작할 수 있다. 이로써 고려 초기에는 태봉의 구제인 광평성 중심의 기구에다가 새로이 내의성이 부가된 정치제도로 구성되었음을 알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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