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신편 한국사
  • 고려 시대
  • 13권  고려 전기의 정치구조
  • Ⅰ. 중앙의 정치조직
  • 2. 관직과 관계
  • 1) 관직의 구조
  • (3) 서리직과 권무직

(3) 서리직과 권무직

 중앙의 각 관서에는 품관의 아랫 자리에 위치하여 행정의 실무에 종사한 품외의 하급관리들이 다수 존재하였다. 胥吏와 權務官이 그들로서, 이들이 일보는 직위가 바로 胥吏職과 權務職이었다.

 그 중 胥吏는 단순히 吏 또는 吏屬·掾屬 등으로 불리기도 하고, 또 보통 기록이나 文簿를 관장하는 刀筆의 임무를 띠고 있어 刀筆吏라 칭하여지기도 하였다.0225)李佑成,<高麗朝의 「吏」에 대하여>(≪歷史學報≫23, 1964, 3쪽;≪韓國中世社會硏究≫, 一潮閣, 1991, 91쪽). 이들은 위에서 설명했듯이 중앙의 각사에 소속하여 행정의 말단을 맡아 보았는데, 예컨대 가장 중요한 관부였던 중서문하성에는 主事가 6인, 令史 6인, 書令史 6인, 注寶 3인, 待詔 2인, 書藝 2인, 試書藝 2인, 記官 20인, 書手 26인, 直省 8인, 電吏 180인, 門僕 10인 등 도합 12직 271원이나 설치되어 있었고,0226)≪高麗史≫권 76, 志 30, 百官 1, 門下府. 중추원에는 別駕 10인, 主事 10인, 試別駕 2인, 令史 2 인, 記官 8인, 通引 4인으로 도합 6직 36원이,0227)≪高麗史≫권 76, 志 30, 百官 1, 密直司. 그리고 尙書戶部에는 主事 6인, 令史 6인, 書令史 10인, 計史 1인, 記官 25인, 算士 1인으로 도합 6직 49원이0228)≪高麗史≫권 76, 志 30, 百官 1, 戶曹. 각각 설치되어 실무에 임하였던 것이다. 이처럼 중앙의 거의 모든 관서에는 그의 중요도나 규모 및 업무의 다소에 따라서 많고 적은 차이는 있었지만 주사·영사·서령사·기관을 비롯하여 각각의 업무수행에 필요한 각종 명칭의 이속을 설치해 두고 있었거니와, 그 전체 숫자는 문반의 관서만 하더라도 대 략 1,450여 원에 이르고 있다.

 ≪高麗史≫백관지 등에는 이들 각자가 분담하였던 직무에 대해 아무런 설명이 보이지 않는다. 하지만 명칭이나 중국의 예에 비추어 어느 정도까지는 짐작이 가능한데, 예를 들면 主事나 令史·書令史는 文簿를 관장하는 직위였던 것 같고, 監作은 工作關係의 일을 감독하는 직이었으며, 注寶는 國印 같은 御寶를 담당하는 직이었고, 記官은 기록, 計史·算士는 회계를 맡은 직이었던 듯 생각된다.0229)金光洙,<高麗時代의 胥吏職>(≪韓國史硏究≫4, 1969), 7∼8쪽 참조. 아울러 電吏는 여러 관청과의 연락관계상 신속히 일을 처리하는 使令職이었던 듯싶고, 門僕은 성문의 수위를 주임무로 하는 직이었으며, 그 밖에 尙食局에 설치된 注膳은 主食 담당이었고, 尙舍局 등에 설치된 幕士는 張設을 맡은 것으로 추측되는 등0230)洪承基,<高麗時代의 雜類>(≪歷史學報≫57, 1973), 61∼68쪽 참조. 개략적인 내용은 파악할 수가 있는 것이다.

 그런데 이들 吏屬職은 구조상 일반적인 의미의 서리직 계통과, 그와 약간 성격을 달리하여 잡역에 종사하는 잡직 계통으로 양분되어 있었던 것 같다. 그리하여 전자는 人吏層의 仕路로서 入仕職이 되었던 반면 후자는 下典·雜類層의 사로로서 未入仕職이 되었던 것으로 이해된다. 이제 아래에다 저들의 대략적인 서열도 곁들여 그 내용을 보기 쉽게 도표로 나타내면 다음과 같다.0231)<표 4>는 金光洙, 앞의 글, 10쪽에 제시되어 있는 내용에 약간의 수정을 가한 것이다.

分類 入 仕 職 ― 人 吏 未入仕職―
下典·雜類
序列 1 2 3 4 5 6
文班 主 事
錄 事
別 駕
待 詔


 
令 史
書 史
監 史
書 藝
醫針史
孔 目
 

書令史
計 史



 
記 事





 
記 官





 
掌 固 注 膳
書 者 幕 士
書 手 所 由
算 士 門 僕
給 使 電 吏
丁 吏 杖 首
醫 士 大 丈

<표 4>高麗時代 胥吏職制의 구조

 이처럼 같은 이속직이면서도 입사직과 미입사직 사이에는 앞서 지적했듯이 커다란 단층이 개재해 있었으며, 그리하여 未入仕職에서 출발한 사람들은 入仕職으로, 다시 입사직의 하위직에서 출발한 사람들은 서열을 따라 상급 직위로 점차 진급하게 되어 있었던 것이다. 그런데 여기서 한 가지 주목되는 점은 입사직으로서의 서리직은 곧바로 품관과 맞닿아 있었다는 사실이다. 다시 말할 필요도 없이 서리직은 吏族이나 鄕吏들 자제의 사로였지만, 그러나 蔭職을 줄 때 입사직으로서의 서리직이 널리 이용되고 있는 데서 알 수 있듯이 그것은 일반 관직체계의 初職으로 기능하여 다음 단계의 품관으로 진출하는데 별다른 제약이 따르지 않았다.0232)李佑成, 앞의 글, 8∼14쪽;앞의 책, 96∼101쪽 및 金光洙, 위의 글, 18∼20쪽 참조. 품관과 서리직 사이의 단층은 역시 큰 것이었지마는 동시에 양자는 서로 연결되어 있기도 하였던 것이다. 우리는 이런 점에서 고려시대 서리직의 한 특성을 발견할 수 있거니와, 이와 동시에 서리직에 취임하는 인원의 신분이 일반 관인과 일맥상통하고 있다는 사실도 함께 이해하게 된다.

 未入仕職은 말단 이속직이었던 셈인데, 그들 중에 특히 注膳 이하 大丈에 이르는 부류는 따로이 잡류라는 칭호로 불리었다. 그런데 이들도 물론 일정한 기간 동안 立役한 후 입사직으로는 진출할 수 있었으나, 그러나 품관과는 단절되어 있었다.0233)洪承基, 앞의 글, 72∼76쪽. 그들은 서리직 내에 묶여 있는 이족이었던 것이다. 이런 점에서 역시 입사직으로서의 서리직과 잡류를 포함한 미입사직 및 각기 그 곳에 취임하는 인원들 사이에는 커다란 차이가 있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다음 權務職은 글자 그대로 임시적인 직무를 맡은 관직이었다. 고려에서는 수시로 발생하는 正職 소관 이외의 사무를 처리하기 위하여 權務官을 따로이 두고 있었던 것이다. 구체적으로 都兵馬錄事와 四面都監判官(이상 甲科權務), 그리고 迎送都監錄事·都齋庫判官(이상 乙科權務), 書籍店錄事·祭器都監判官(이상 丙科權務), 諸陵直·諸壇直(이상 雜權務) 등 100여 기구에 설치된 직위가 그것들인데, 이들이 文翰 계통이나 西京의 각 기구에도 얼마간 두어졌지만 주로 諸司都監各色에 설치되었던 것은 그들의 저같은 성격과 무관하지 않다고 생각된다.

 그런데 이렇게 해서 처음 설치된 권무직이 본래의 취지와는 달리 곧 고정직화하여 품관과 이속 사이에 개재하는 하나의 직제로 발전하였다. 그러하여 갑과와 을과권무는 9품보다 상위에, 병과와 雜權務는 그보다 하위에 위치하는 직위가 되었던 것이다.0234)金光洙,<高麗時代의 權務職>(≪韓國史硏究≫30, 1980), 50쪽. 이에 따라 그들은≪高麗史≫食貨志 權務官祿條에 명시되어 있는 바와 같이0235)≪高麗史≫권 80, 志 34, 食貨 3, 祿俸 權務官祿. 자기네의 직위에 상응하는 녹봉을 지급받고 있었다. 권무직도 吏職制와 마찬가지로 고려시대 관직체계의 특성을 보여 주는 하나의 제도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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