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려의 5도란 楊廣道·慶尙道·全羅道·交州道·西海道를 말한다. 이들 5도는 남부지방에 설정한 일반적인 중간통치구획으로 민사적인 按察使가 파견되어 북부지방에 설정한 군사적인 兵馬使가 파견된 兩界와 구별되었다. 5도는 중앙정부와 군현 사이의 중간 행정기구이고 안찰사는 수령을 통할하는 상급행정관이었다.
그러나 고려의 5도는 처음부터 중간행정기구가 된 것은 아니었다. 고려 전기의 지방행정의 단위는 어디까지나 외관이 파견된 주현으로 수령은 중앙정부와 직결되고 있었으며, 다만 한정된 기능에 있어서 界首官이 중간기구로서의 역할을 대행하였을 따름이었다.0584)고려의 州縣制에 관한 논문으로는 다음과 같은 글이 있다.
邊太燮,<高麗前期의 外官制>(≪韓國史硏究≫2, 韓國史硏究會, 1968;≪高麗政治制度史硏究≫, 一潮閣, 1971).
河炫綱, 앞의 책.
李惠玉,<高麗時代의 守令制度硏究>(≪梨大史苑≫21, 梨花女大 史學科, 1985).
李羲權,<高麗의 郡縣制度와 地方統治政策-主·屬縣考察을 中心으로->(≪高麗史의 諸問題≫, 三英社, 1986). 이 때에도 도안찰사가 있었으나 처음에는 주현을 순행하여 수령을 감찰하는 명실공히 按察官에 불과하였던 것이다.
안찰사가 처음 설치된 것은 현종대 이후의 사실로 보여진다. 그것은≪高麗史≫백관지 외직 안렴사조에 현종 3년(1012) 節度使가 혁파된 후 안찰사가 설치되었다는 기록으로 알 수 있다. 실제로 안찰사가 처음 기록에 나타난 것은 靖宗 때였으니, 즉 정종 3년(1037) 정월 判에 입춘 이후 제도 외관은 모두 獄訟을 정지하여 백성이 농사에 오로지 힘쓰게 하고 만약 이를 어기는 외관은 안찰사로 하여금 糾理케 하라는 내용이었다.0585)≪高麗史≫권 79, 志 33, 食貨 2, 農桑. 이 判은 바로 전년에 御史臺가 제도 외관의 농사 방해에 대하여 ‘遣使 審察黜陟’을 청한 데 따른 결과였으므로0586)위와 같음. 이 때의 안찰사는 상주관이 아니라 임시적인 사행임을 알 수 있다.
안찰사는 문종 때에 이르러 자주 기록에 나타난다. 문종 4년(1050) 判에는 주현의 水旱蟲霜으로 곡식이 부실할 때는 수령이 몸소 조사하여 戶部에 보고하고 정부는 그 界의 안찰사로 하여금 다른 사람을 보내어 자세히 점검케 하라고 하였고,0587)≪高麗史≫권 78, 志 32, 食貨 1, 田制 踏驗損實 문종 4년 11월. 5년에는 按察副使가 白翎鎭의 화재에 대하여 鎭將과 副將을 탄핵하였으며,0588)≪高麗史≫권 7, 世家 7, 문종 5년 2월. 11년(1057) 判에는 事審官으로 귀향해서 폐단을 일으키는 자는 按廉使(안찰사)와 監倉使로 하여금 서울로 옮겨 벌을 주게 하라는 것이었다.0589)≪高麗史≫권 75, 志 29, 選擧 3, 銓注 事審官 문종 11년. 이것을 보면 문종조에는 제도에 안찰사가 파견되어 주현의 수령을 출척하는 중간기구의 역할을 담당하였던 것 같다. 그러나 문종 18년(1064)의 制에 따르면 구례에는 춘추에 外山祭告使를 10여 도에 파견하여 使命이 번다하고 驛路가 조폐하였으므로 지금부터는 양계는 감창사, 浿西道는 안찰사로 제고사를 겸하게 하고 그 밖의 山南諸道만은 전과 같이 제고사를 보내도록 한다고 하였으므로,0590)≪高麗史≫권 8, 世家 8, 문종 18년 3월. 패서도에는 이미 양계의 감창사와 같이 常遣된 안찰사가 있었으나 그 밖의 지역에는 안찰사가 보이지 않는다. 이러한 현상은 문종 때의 사실로 여겨지는 外獄囚에 대한 判에도 나타난다. 즉 주현의 외옥수를 監行 推檢하는데 서경과 양계는 分臺와 병마사, 關內西道는 안찰사, 東南海는 都部署, 그 밖의 지역은 계수관이 담당하여0591)≪高麗史≫권 84, 志 38, 刑法 1, 職制. 지역에 따른 중간기구에 차이가 있으며 안찰사는 관내서도에만 보인다. 이것을 보면 문종 때에는 전국에 일원적인 중간기구로 안찰사가 파견된 것이 아니라 지역에 따라 차이가 있었으며 다만 패서도·관내서도에만 안찰사가 기능하고 있었음이 나타난다. 또한 문종 15년(1061)에는 ‘西海道按察使’가 기록에 나옴으로써0592)≪高麗史節要≫권 5, 문종 15년 2월. 안찰사는 패서도·관내서도·서해도로 증가되었다. 그러면 문종 때 안찰사가 파견된 이들 3도는 어떤 관계에 놓여 있었을까.
楊廣道·慶尙道·全羅道 등 안찰사 파견의 5도가 성립한 것은 예종대였다. 그 이전의 도제는 주지하는 바 성종 14년(995)에 설치한 10도였는데, 그것은 關內道·中原道·河南道·江南道·嶺南道·嶺東道·山南道·海陽道·朔方道·浿西道였다. 그러나 이들 10도는 사신의 巡行道의 구실을 하였을 뿐으로 안찰사가 상견된 것이 아니었으며, 더욱이 전술한 바 문종 18년의 祭告使 파견이나 또 外獄囚 推檢의 判에서 보듯이 이미 그 내용이 바뀌고 있었다.
즉 제고사 파견에서는 전국을 서북양계·패서도·산남제도로 나누었고, 외옥수 추검에서는 서경·동서양계·관내서도·동남해 및 그 밖의 지역으로 나누어 원래의 10도제는 원형이 상실되고 있었던 것이다. 이때 패서도·관내도·산남도의 10도명의 일부가 보이지만 관내도는 關內西道와 함께 關西·關北·關內 3도의 이름과 關內東道의 구별이 생겨 변질되었음이 나타나고 특히 남부지방은 모두 산남도로 표기되어 큰 변화를 엿보게 한다.0593)문종 10년 撫問使 파견의 道는
① 山東南 忠·慶·尙州 3道撫問使
② 山南 晋·羅·全·淸·廣·公·洪州 7道撫問使
③ 關西·北·關內 3道撫問使
④ 關內東道 撫問使
라 하여 關內道가 關內·關西·關北·關內東道로 분화 표기되었고, 山南道는 남부 전지역의 표시로 쓰이고 있음이 나타난다. 서해도는 10도명에는 없는데 그 지역은 패서도·관내서도(관서도)와 동일하므로 결국 처음 설치된 3도안찰사는 서해도안찰사로 귀결된다고 보여진다. 그렇다고 서해도에만 안찰사가 파견된 것은 아니고 그 밖의 지역에도 파견되었을 것은 당연하지만 그러나 중간기구로 기능한 것은 서해도였다고 할 수 있다.
이와 같은 서해도안찰사만 기능하였던 기형적인 안찰사제가 정식 5도안찰 사제로 정립한 것은 예종대였다.≪高麗史≫地理志에 의하면 예종 원년(1106)에 楊廣忠淸州道와 慶尙晋州道가 제정되었고, 이듬해 분견된 諸道安撫使는 양광충청주도·전라주도·경상진주도의 셋으로0594)≪高麗史≫권 12, 世家 12, 예종 2년 2월. 5도의 원형이 마련되었는데, 이는 안찰사제 성립의 기반이 되어가고 있음을 나타내는 것이다. 이제 전술한 바 변질된 10도제는 새로운 5도제로 바뀌고 있는 것이다.
예종 때 안찰사제가 성립하였다는 것은 예종 때 都部署를 안찰사로 개정하였다는 사실로도 엿볼 수 있다. 즉 百官志 外職 按廉使條에는 처음의 안찰사를 문종 18년(1069)에 도부서로 개정하였는데 예종 8년(1113)에 이를 다시 안찰사로 환원하였다는 것이다. 사실상 도부서는 전국적인 행정기구가 아니라 水軍을 관장한 기구로 여기서는 경상도 지방의 東南海都部署를 가리킨 것으로 이 都部署使가 안찰사의 기능을 대행하고 있었는데, 예종 8년에 정식 안찰사로 바뀌었다는 것은0595)<慶尙道營主題名記>≪道先生案≫에는 문종 23년(1069)부터 都部署使 임명의 기록이 나오고 예종 7년(1112)에 안찰사로 개정되어 있어 1년의 차이가 보인다. 이제 전국에 걸쳐 본격적으로 안찰사제가 시작되었음을 의미한다고 보아야 하겠다. 이것은 비단 동남해인 경상진주도에 제한된 것이 아니라 전국적인 안찰사제의 성립을 표시하는 것이 될 것이다.
예종대에 안찰사제가 실시되었다는 가장 확실한 증거는 실제로 5도 안찰사의 이름이 나오고 있다는 사실이다. 예종 때 구체적으로 서해도안찰사 외에 전라도안찰사·양광충청주도안찰사가 보이고 다음 인종 때에는 東南海(慶尙晋州道) 按察副使·春州道按察使가 나타나 전국적으로 5도 안찰사제가 확립되었음을 엿보게 한다.0596)春州道는 원래 東界에 속한 監倉使道였는데 仁宗 때에는 하나의 안찰사도로 전환되었다. 인종 11년(1133) 制에 외옥수의 감사 추검을 兩京留守·兩界兵馬使와 더불어 諸道按廉(察)使가 하고 있는 것은0597)≪高麗史≫권 16, 世家 16, 인종 11년 4월. 남도가 모두 안찰사의 통제를 받았다는 표시가 될 것이다. 지금까지 틈틈이 주현을 순행하여 수령을 출척하는 察訪使를 파견하였던 것을 인종 20년(1142) 이후에는 폐지하고 다만 안찰사에게 위임하였다는 사실도 이를 증명하는 것이다.0598)≪高麗史≫권 75, 志 29, 選擧 3, 銓注 選用監司, 명종 11년 9월.
전기한 인종 11년 制에는 ‘諸道按廉使’라 하여 확실한 안찰사도의 수가 표기되지 않았다. 그러나 다음 의종 때에는 명확히 ‘5道按察使’의 이름이 나오고 있다. 즉 의종 17년(1163)에는 양계병마사와 5도안찰사가 함께 陛辭하여 동시에 발견되고 이들은 그 지방의 방물을 상납하는 임무를 가졌음이 나타난다.0599)≪高麗史節要≫권 11, 의종 17년 8월. 이와 같이 처음의 과도기적인 안찰사제는 예종 때부터 전국적으로 파 견되고 결국 이는 5도안찰사의 완성을 보기에 이르렀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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