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신편 한국사
  • 고려 시대
  • 13권  고려 전기의 정치구조
  • Ⅲ. 군사조직
  • 1. 경군
  • 1) 태조대의 경군
  • (2) 태조대 경군의 편제

(2) 태조대 경군의 편제

 태조대의 경군은 별도의 명칭이 없는 세 개의 마군부대와 특정한 명칭을 지닌 다섯 개의 보군부대들(지천군, 보천군, 우천군, 천무군, 그리고 간천군)로 편제되었던 것으로 상정되어 있었다.0652)李基白,≪高麗兵制史硏究≫(一潮閣, 1968), 51쪽.
洪承基, 앞의 글, 31쪽.
朴龍雲,≪高麗時代史≫上 (一志社, 1985), 283쪽.
이것은<표 1>의 내용에 근거한 추론이었다. 그러나<표 1>의 내용을 직접적인 근거로 하여 경군의 편제를 그같이 상정하는 데에는 몇 가지 문제점들이 있다.

 첫째, 부대의 고유명칭이 보군부대에만 있고 마군부대에는 없었다는 점이 다. 보군부대보다는 마군부대가 전투력의 면에서나 유지 관리의 측면에서 훨 씬 더 고급의 부대였을 터인데도 고유한 부대 명칭들이 없었다는 것은 지천군이니 보천군이니 하는 보군부대의 부대명칭들이 제도적인 것이 아니라 임시적인 것이었음을 시사한다.

 둘째로, 支天軍을 비롯한 다섯 개 부대명칭들은 오직 태조 19년(936) 9월의 신검 토벌전에 관한 기록에서만 보이고 있다. 그러한 부대명칭들은 그 이전이나 그 이후의 기록에서는 전혀 나타나지 않는다. 만일 그것들이 경군의 제도화된 부대 명칭들이었다면 그러한 제도명들이 신검토벌 이전의 수많은 전투에 관한 기록 속에 언급되었을 법도 한데 전혀 그렇지 않은 것이다. 이것은 지천군대장군 따위가 특별한 출병이나 작전이 있을 때에 한하여 그 최고장수에게 임시적으로 부여되는 직함이었음을 시사한다. 태조 18년 태조가 나주를 경략하기 위해 마군장군 유금필을 출전시키면서 그에게 都統大將軍의 직함을 임시로 부여했던 사실이 그러한 예가 될 것이다.0653)≪高麗史≫권 92, 列傳 5, 庾黔弼.

 셋째로, 지천군대장군을 비롯한 다섯 개 보군대장군 칭호에는 한결같이 「天」자가 포함되어 있다. 이것은 그 부대들이 하늘의 뜻을 받들어 반군 토벌에 나선 군대임을 상징적으로 표현하고 있다. 그 구체적 사례가≪三國史記≫신라본기에서 확인된다. 즉 신라 헌덕왕 11년(819) 왕은 당나라의 요청에 따라 李斯道의 반군을 토벌하기 위한 응원군을 출동시켰다고 하는데 이 때 반군토벌군 사령관에게 부여된 직함이 「順天軍大將軍」이었던 것이다.0654)≪三國史記≫권 10, 新羅本紀 10, 헌덕왕 11년 7월. 물론 신라에는 순천군이라는 편제부대가 없었다. 따라서 「순천군」은 반군토벌을 위해 출동하는 병력에 대해 대의명분으로 붙여진 임시적이고 상징적인 명칭이었다. 이같은 예에 따라 지천군대장군 등의 칭호들을 해석해 볼 때, 그것들 역시 「天命」을 받은 태조의 명령에 따라 「賊子」인 신검의 반군을 토벌하기 위해 출전한 여러 병력의 지휘관들에게 부여된 임시적이고 상징적인 직함들이었다고 판단된다.0655)鄭景鉉, 앞의 글(1992), 37쪽. 그러므로 태조대 경군의 편제는 병력수의 경우와 마찬가지로 보다 믿을만한 다른 근거에 입각해 추론하지 않으면 안된다.

 태조대 경군의 편제를 파악하기 위해서는 당대 무관들의 직제를 살펴 봄이 좋을 것이다. 중앙군의 부대편제는 무관직제와 상호 표리관계에 있었을 것이기 때문이다. 예컨대 성종대 이후 무관의 관직체계는 중앙군의 6위편제에 대응하여 제정된 것이었다. 마찬가지로 태조대 무관들의 직제 역시 당대 경군와 편제에 대응하여 제정되어 있었을 것이다.

 태조대 무관직제에 대해서는≪高麗史≫권 77, 百官志 西班條에 “태조 초에 馬軍將軍·大將軍이 있었으니 이것이 武職이었다”고만 기록되어 있을 뿐 더 이상의 해설은 없다.0656)≪高麗史≫권 77, 志 81, 百官 2, 西班. 그러나 당대의 연대기에는 마군장군과 마군대장군의 구체적인 예들이 나올 뿐 아니라 海軍將軍·內軍將軍 등의 무관직을 지닌 장수들의 예도 확인된다.0657)鄭景鉉, 앞의 글(1988), 134∼142쪽. 보군장군의 직은 사서에는 비록 그 구체적 예가 보이지 않지만 마군장군과 해군장군의 직제가 있었던 점으로 미루어 보아 실재했었을 것이다. 마군·보군·해군은 전투를 위한 병력이었던 반면 내군은 왕의 신변을 경호하는 병력이었다.0658)李基白, 앞의 책, 56쪽. 이같이 태조대의 장군급 무관직제가 마군, 보군, 해군, 내군의 네가지 병력에 따라 설치되었다면, 경군의 편제 또한 기본적으로 이 네 가지 병종별로 이루어졌으리라고 추정할 수 있다.

 이상에서 고찰한 바를 종합하면 다음과 같다. 태조대의 경군은 개경 일원을 본거지로 하는 정부직속군이었다.≪高麗史≫에는 태조 19년 9월의 후백제와의 결전(일리천 전역) 당시 고려측 출전병력의 규모와 편제에 관한 기사가 실려 있다. 그리고 종래의 대부분의 연구에서는 이 기사를 근거로 하여 태조대 경군의 규모와 편제를 주장해 왔었다. 그러나 그 기사가 전하는 병력수와 부대편제의 내용은 당대의 역사적인 여러 여건이나 구체적 사실들에 비추어 볼 때 너무나 거리가 멀거나 모순된 것이었다.

 그 기사는 태조대 경군의 규모를 6만3천 명이었다고 주장하였으나 그 숫 자는 하나의 전설로서 지나치게 비현실적으로 과장된 것이었다. 태조대 경군의 규모를 제약했던 결정적 요인은 당시 개경 일원의 인구 규모였을 것이다. 고려시대 수도권 인구에 대한 통계기록은 전해지지 않지만 조선조 세종대 수도권 인구가 2만 호였음을 감안할 때 결코 그보다 많지는 않았을 것이다. 더욱이 태조대 개경 일원의 인구는 2만 호를 훨씬 밑도는 규모였을 것이다. 그러므로 태조대 경군의 규모는, 가령 3家戶당 1명의 정규군인이 차출되었다고 하더라도, 최대 6천 명을 초과할 수가 없었을 것이다. 이같은 추정치는 비록 이론적이긴 하나 일리천 전역 이전 고려와 후백제의 통상적인 출전병력 규모가 5천 명 미만이었다는 사실과 부합된다.

 ≪高麗史≫에 의하면, 대후백제 결전 당시 고려 경군이 두 개의 마군부대와 다섯 개의 보군부대(지천군·보천군·우천군·천무군·간천군)로 편성되어 있었다고 했다. 그러나 이같은 부대편성과 명칭은 상설적으로 제도화되어 있었던 것이 아니라 신검 토벌을 명분으로 한 일리천 전투 당시에 임시적으로 사용된 것이었다. 하나의 제도로서 경군의 기본편제는 무장들의 관직제도와 표리관계를 이루고 있었을 것이다. 태조대 무장들의 관직은 장군급 이상에만 병종별로 설치되어 있었으니 마군장군·보군장군·해군장군, 그리고 내군장군 등이 그것이다. 따라서 경군 또한 마군·보군·해군, 그리고 내군 등의 네 가지 병종별로 구분되어 있었다고 판단된다. 마군이나 해군은 나름대로의 전업적 전투기술이 필요한 군인들이었다. 그리고 국왕의 신변경호와 궁궐경비의 병력인 내군 또한 별도의 특수임무를 수행하는 군인들이었다. 태조가 그의 직속병력을 이같이 병종별로 구분하여 운용한 것은 무엇보다도 후백제 군과의 전투 및 영토확장을 보다 효율적으로 수행하기 위해서였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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