과거에는 그 시험을 주관하는 고시관이 있게 마련이었다. 그들은 물론 시험의 단계에 따라 달랐는데, 먼저 예비고시인 감시의 시관에 대해서는, ①≪高麗史≫권 73, 선거지 1, 과목 1에 예종 16년(1121) 5월의 판문으로 “명경업 이하 제업의 감시는 司業 이상관이 各業員과 함께 試選토록 하였다”고 전하고 있다. 즉, 명경업과 명법업·명서업·명산업·의업·복업·지리업 등 잡업의 監試 시관은 국자감의 종4품인 國子司業 이상관이 각 해당 과업의 관원과 함께 시선토록 했다는 것이다. 이는 국자사업 이상관이 감시를 주관하되 명경업 이하 각 과업의 급제자 선발에는 전문가가 필요했을 것이므로 이들도 시관 대열에 함께 참여시킨 것으로 이해된다.
그런데 한편으로 같은 시험을 의미한다고 생각되는 국자감시의 시관에 대해서는, ②≪高麗史≫권 74, 선거지 2, 과목 2 國子試試員條에 “3品 以下官으로 삼았다”는 내용이 전해지고 있다. 그리하여 혹자는 이같은 시관의 규정에 대한 ①·②사료의 차이점을 들어 각업 감시와 국자감시는 각기 성격이 다른 고시라고 주장하기도 하였다. 그는 ① 사료를 해석함에 있어 사업이 국자감 소속의 관원이라는데 중점을 두어 감시 시관은 국자감 관원으로 한정되었던 것에 비해 국자감시 시관은 관서에 관계없이 ‘3품 이하관’으로 임명되었던 만큼 양자는 같은 성격의 고시로 볼 수 없다는 주장을 폈던 것이다.1051)柳浩錫,<高麗時代의 國子監試에 대한 再檢討>(≪歷史學報≫103, 1984), 16∼17쪽.
그러나 생각해 보면 명경업 이하 제업의 감시를 주관하는 시관을 ‘司業以上官’으로 한다는 ① 사료의 ‘司業以上官’을 반드시 사업이 소속한 관서와 연결시켜 해석할 필요가 있을까는 의문이다. ‘以上官’에 중점을 두어 읽으면 ‘국자감의 사업과 같은 종4품 이상관’으로 주관케 하라는 의미의 판문이었다는 이해도 가능하기 때문이다. 그렇지만 필자가 보기에 그 판문의 중점은 오히려 ‘각업원과 함께 시선토록 하라’는 대목에 있지 않았을까 짐작된다. 4품 이상관이 주관하되 명경업과 잡업의 시험에서는 그 방면의 전문지식을 가진 관원도 함께 시관으로 참여케 한 조처가 바로 이 판문의 근본 취지가 아니었을까 생각된다는 것이다. 이런 관점에 서서 검토할 때 ①과 ②사료는 서로가 판이한 내용을 전하는 것은 아니라고 이해된다. ①에서는 4품 이상관, ②에서는 3품 이하관이라고 했지만 그것은 곧 상·하의 범위를 나타내는데 불과할 뿐 더러,≪高麗史≫권 74, 선거지 2, 과목 2, 國子試之額條에 연대순으로 정리되어 있는 국자감시 시관의 관직 역시 거의 모두가 국자사업을 포함한 3품·4품으로 되어 있는 것이다. 만약 이러한 해석에 무리가 있다고 한다면, ①은 명경업 이하 제업 감시의 시관에 관한 판문인데 비해 ②는 제술업 감시의 시관에 대한 규정이라고 이해하여도 좋다는 생각이 든다.1052)이에 대해서는 朴龍雲, 앞의 글(1990b), 562∼563쪽 참조. 이런 견지에서 일단 제술과를 포함한 각 과업의 감시는 국자사업을 비롯한 3품·4품 관원이 총괄하는 책임을 맡고, 그 아래에 각 과업별로 전문지식을 갖춘 관원들이 추가되어 있었던 것으로 정리하여 둔다.
다음 본고시인 예부시의 시관에 대해서는≪高麗史≫권 74, 선거 2, 과목 2, 시관조에 밝혀져 있듯이 책임자는 지공거와 동지공거였다. 광종이 처음 과시를 설행할 때는 이들 가운데 지공거만을 두었다. 그리하여 몇 번의 과시를 치르고 나서 동지공거는 광종 23년(972)에 새로 증치하였으나 곧 폐지되었고, 그 후 문종 37년(1083)에 이르러 다시 설치한 이후부터 常例化되었던 것이다. 그리고 이들 시관의 명칭도 경종 2년(977)의 친시 때는 讀卷官이라 불리기도 했지만, 성종 15년(996)에는 지공거를 都考試官이라 고쳤다가 이듬해에 본래의 이름으로 되돌아가고 있으며, 또 충숙왕 2년(1315)에는 지공거를 고시관, 동지공거를 同考試官으로 고쳤다가 같은 왕 17년에 다시 본래의 이름으로 되돌리고도 있다. 이처럼 동지공거는 얼마 동안 설치되지 아니하였고 또한 시관의 명칭상에도 몇 차례의 변천이 있었지만 대체적으로 지공거와 동지공거가 각기 책임자와 부책임자로서 과거의 본고시를 주관하였다고 할 수 있다.
사료에는 이들 두 칭호 이외에 더 찾아지는 것이 없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지공거와 동지공거를 각기 책임자와 부책임자로 규정한 것은 이들 아래에 실무를 담당하는 시관이 더 있었으리라 짐작되기 때문이다. 물론, 지공거와 동지공거는 제술과의 경우 문제를 출제하고 시험을 감독하며 채점과 함께 科次를 정하는 일까지 담당했던 것 같다.1053)≪高麗史≫권 74, 志 28, 選擧 2, 科目 2, 원종 14년 10월. 그러나 이들이 명경과와 잡과에 있어서의 그같은 일까지 담당했다고는 생각되지 않는다. 역시 명경과와 잡과의 경우는 감시 때와 마찬가지로 그 방면의 전문가들이 같이 업무를 보지 않았을까. 지공거와 동지공거는 그들 업무를 총괄하고 감독하는 책임자였다고 생각하는 게 옳을 듯싶은 것이다.
지공거와 동지공거의 임명에 대해서는 원종 14년 10월의 기사로, “舊制에 二府가 지공거를, 卿·監이 동지공거를 담당토록”했다고1054)≪高麗史≫권 74, 志 28, 選擧 2, 科目 2, 원종 14년 10월.한 사료를 통해 대략 짐작할 수가 있는데, 그러나 실제로 이들 직위에 임명된 사람들에 관하여 검토해 보면 그대로 시행되지 않았던 면도 나타난다. 먼저 지공거의 경우 고려 전기의 상황을 보면 약 반수 가량이 기록대로 宰府와 樞府, 즉 양부(2부)의 재상들로 채워진 반면, 반수 가량은 吏部尙書나 侍郎·翰林學士·國子祭酒·秘書監 등 중요 관서의 3·4품 관원들로 이루어지고 있는 것이다. 그러다가 양부 재상들이 대부분의 지공거직을 차지하는 것은 고려 후기의 일이지마는, 그러나 동지공거의 경우는 전기간을 통하여 3품의 경·감이 임명된 때는 일부분에 지나지 않고 역시 중서문하성이나 중추원·상서 6부·한림원·국자감 등 중요 관서의 3·4품 관원들로 이루어지고 있으며, 말기에는 재상들까지 이 직위에 임명되고 있기도 하다.1055)崔惠淑,<高麗時代 知貢擧에 대한 硏究>(≪崔永禧華甲紀念 韓國史學論叢≫, 探求堂, 1987), 173∼184쪽. 이처럼 지공거와 동지공거의 실제적인 담당자는 각기 양부의 재상과 경·감만으로 구성된 듯이 나오는 사료와 얼마간 차이가 있지만, 그에 상당하는 중요 직위의 고관들로 채워지고 있다는 점은 확인이 된다.
그것은 지공거와 동지공거가 그만큼 중요하면서도 영광된 자리였다는 사실의 반영일 것이다.1056)曺佐鎬, 앞의 글(1958), 148쪽. 고위 관원들이 앞을 다투어 이 직위를 차지하려 한 것도 그 때문으로 생각된다. 한 연구에 의하면 지공거와 동지공거에 임명되었던 사람들은 대체적으로 고려기의 명문으로 알려진 집안 출신들이었다고 하거니와1057)崔惠淑, 앞의 글(1987), 184∼197쪽. 이 역시 그와 밀접한 관련이 있다고 여겨진다. 그리고 이러한 사실은 고려시대의 과거제를 이해하는 데 하나의 중요한 시사를 준다는 점에서 주목할 필요가 있을 듯하다.
이들 掌試者는 흔히들 學士라고도 불리었다. 그리하여 당해 학사 밑에서 급제한 사람들은 그의 문생이 되었지마는, 이들은 그 학사를 恩門이라 부르며 座主와 門生의 관계를 맺었다.1058)≪高麗史≫권 74, 志 28, 選擧 2, 科目 凡試官 충숙왕 2년.
李齊賢,≪櫟翁稗說≫後集 2, 唐楊嗣復率門生宴先僕射於里第. 한데 이러한 좌주·문생의 관계는 매우 각별하여 부자와 같은 예를 취하였다는 것이지만, 그런 가운데에서 서로 서로 도와 가는 하나의 학벌을 형성하였다.1059)曺佐鎬, 앞의 글(1958), 162∼164쪽. 그러나 이렇게 과거를 통하여 형성된 좌주와 문생이 공고한 유대를 가지고 학문의 전통을 이어갈 뿐 아니라 정치적·사회적으로 많은 영향을 미친데 대해서는 서로 다른 엇갈린 반응을 보이고 있다. 한편에서는, “좌주·문생간의 은혜와 의리가 온전함은 족히 국가의 원기를 배양하는 일이 되는 것이며, 詩書의 넉넉함과 詞翰의 빛남은 비록 백년이 지나더라도 바뀌지 않을 것이라고1060)李穡,≪牧隱詩藁≫권 26, 詩 門生掌試圖歌幷序. 긍정적으로 평가하는 입장이 있는가 하면, 다른 한편으로 공민왕 때의 신돈 같은 이는, “儒者들은 좌주·문생을 칭하며 中外에 포열해 서로 干請하여 하고자 하는 바를 자행하는데, 이제현 같은 사람은 문생의 門下에서 문생을 보게 되어 드디어 나라에 가득찬 도적이 되었으니 유자의 해됨이 이와 같다”1061)≪高麗史≫권 110, 列傳 23, 李齊賢.고 하여 매우 부정적으로 평가하고 있는 입장도 찾아지는 것이다. 후자는 과거제에서 비롯되는 폐단의 일면을 지적한 말로 생각이거니와, 앞서 설명했듯이 복시·친시를 시행하여 과시에 왕권이 개입함으로써 고시관의 영향력을 축소시키고자 했던 것도 이런 문제와 관련이 깊었다고 할 수 있다.1062)許興植,<高麗 科擧制度의 成立과 發展>(≪韓國史硏究≫10, 1974;앞의 책, 37∼43쪽). 하지만 이와 같은 좌주·문생의 관계가 제도적으로 단절되는 것은 조선조에 들어 와서야 이루어진다.1063)李楠福,<麗末鮮初의 座主·門生關係에 關한 一考察>(≪鄭在覺古稀記念 東洋學論叢≫, 고려원, 1984), 211∼213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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