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려시대의 관리들은 일단 5품 이상 관직을 가짐으로써 그 자손에게 음서 의 혜택을 줄 수 있는 권리를 확보하게 되었다. 그러면 그 권리는 몇 번이나 행사할 수 있었는가 하는 문제가 생겨나게 된다. 즉 「1인 1회」로서 1인의 자손에게 혜택을 주었는가 아니면 그 이상으로 「多子」에게 줄 수 있었는가 하는 문제이다.
≪高麗史≫선거지의 음서관계 기사에는 ‘許一子蔭職’1130)≪高麗史≫권 75, 志 29, 選擧 3, 銓注 蔭叙 숙종 5년 2월 詔.·‘無職子許入仕’1131)≪高麗史≫권 75, 志 29, 選擧 3, 銓注 凡叙功臣子孫 숙종 즉위 詔. 등의 기록만이 나올 뿐 구체적 회수나 인원은 명시해 놓고 있지 않다. 다만 공신음서의 경우 태조공신이나 삼한공신 등에 대하여 여러 차례 음서를 시행하였다는 사실이≪高麗史≫기사에 나타나므로, 이러한 공신의 자손들은 동일 탁음자에 의하여 여러 차례에 걸쳐 음서를 받을 수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1132)이러한 사례는 실제로 여러 차례 나타나는데, 특히 공신으로 책봉된 張元之에 의탁하여 그의 자손 2명이 음서의 혜택을 받은 사례를 꼽을 수 있다(<張文緯墓誌銘>,≪韓國金石文追補≫, 96∼97쪽 및<張忠義墓誌銘>,≪朝鮮金石總覽≫上, 396쪽 참조). 그런데 일반 음서 즉 문음의 경우에는 어떠하였을까. 이에 관하여 기존의 연구는 현재 「一人 一子」를 규정짓는 명문이 남아 있지 않을 뿐만 아니라, 한 관료가 5품직에 승진한 뒤에도 수십 년 동안 재임하는데 한번만의 음서 기회를 준다는 것은 납득하기 어려운 일이라고 보고, 실제로 음서 시행의 사례를 볼 때에도 1인의 관료가 여러 사람의 자손에게 음서를 준 사례가 다수 나타나고 있기 때문에 「一人 多子」 또는 再蔭, 三蔭의 가능성은 충분히 있을 수 있는 일이라고 보았다.1133)朴龍雲, 앞의 책, 102∼113쪽. 그러나 이 문제 역시 구체적 명문이 남아 있지 않기 때문에 일단 실제의 시행 사례를 통하여 검토해 볼 수밖에 없다고 생각한다. 예컨대 부음의 경우, 음서의 시행에서 이 음서를 제수받는 것이 가장 유리하였다는 사실은 규정에 나타나고 있다. 그런데 이 부음의 탁음자들은, 앞에서도 언급하였듯이 2품 이상 고위관리가 압도적으로 많이 나타나며, 또 父가 이미 3품의 고위 관리가 되었는데도 불구하고 상대적으로 불리한 공신음서를 받으려 한 경우도 실제로 나타나고 있는 것이다.1134)예컨대 參知政事 李作仁은 太祖功臣蔭을 사칭하여 그의 子에게 음서를 받게 하다가 탄핵되기도 하였다(≪高麗史≫권 5, 世家 5, 현종 21년 11월 기사 참조). 또 祖蔭의 경우에도 사후에 탁음자가 많다는 사실도 앞에서 언급한 바 있다. 그리고 실제 사례에서 볼 때에 같은 인물이 재음, 삼음의 혜택을 주는 경우도 있지만 그러나 전체 사례에서 찾아지는 것은 그다지 많다고는 생각되지 않는다. 즉 실사례에서 75명의 탁음자가 있는데 그 중 5명만이 2회 이상 탁음자가 된 것으로 나타나고 있기 때문이다.1135)金龍善, 앞의 책, 85쪽. 물론 새로운 자료가 찾아지면 이러한 숫자는 바뀔 수도 있겠지만, 지금까지의 사례로 볼 때 재음 이상의 경우는 오히려 예외적인 현상으로 여기는 것이 더 합리적인 해석이 되지 않을까 할 정도이다.
또 형제 간에 여러 명이 음서를 받는 경우에도, 여러 형제가 과거에 급제한 것 만큼이나 다양하게 나타나는데, 주의해서 보면 이들이 받은 음서의 명칭이나 내용이 서로 달랐던 경우가 오히려 더 많았던 것으로 나타난다. 또 관리 한 명이 여러 차례 음서의 혜택을 주는 것이 가능하였다면 부음·조음 등의 음서만 가지고도 충분히 음서제도를 운영해 나갈 수 있었을 터인데, 숙부음, 외숙부음과 같은 종류의 음서도 존재하고 있는 것이다. 이러한 사실은 5품 이상의 관리는 1회의 음서 기회를 가질 뿐이었지만, 자손들의 입장에서는 여러 종류의 음서를 적절히 이용함으로써, 여러 형제가 음서의 혜택을 입을 수 있었던 것이 아닌가 생각해 볼 수 있게 한다. 즉 음서는 이러한 운영 원리를 가짐으로써 비교적 혼란스럽지 않게 시행될 수 있었던 것이 아닌가 생각이 든다.
이와 관련하여 또 하나 생각해 보아야 할 문제는 음서에 대한 사회적 필요성에 관한 문제이다. 음서라는 것이 일정한 자격만 갖추면 누구나 자동적으로 관리가 되는 것이기 때문에, 이 제도가 고려의 문벌귀족 계층에게 유리한 입사로가 된 것은 틀림이 없다. 따라서 고려사회에서는 음서를 통하여 관계에 조기 진출하여 많은 특권을 누릴 수 있었으며, 이 음서 출신자들은 限品의 제약없이 누구나 고위관리로 승진할 수 있었다. 그런데 음서 출신의 인물 가운데 41.9%나 되는 인물들이 과거에 다시 급제한 것으로 나타나고 있었다.1136)金龍善, 위의 책, 96∼104쪽. 이러한 사실은 음서를 받아 관리가 된 이후에 다시 과거에 급제하는 것이 관리 생활을 하는 데 있어서 훨씬 유리하다는 것을 말해 주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 그리고 실제로 상당히 많은 관리들이 음서를 제수받을 수 있는 조건을 충분히 갖추고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음서 대신에 과거로 진출하려 하였으며 음서를 통하여 고위 관리가 된 이후에도 과거에 급제하지 못하였음을 후회하는 관리들도 있을 정도였다.
그러므로 음서가 시행되는 원리를 제대로 이해하기 위하여서는 규정이나 시행 사례에 대한 면밀한 검토와 아울러, 좀더 넓은 시각에서의 검토도 필요하지 않을까 생각된다. 이러한 검토가 여러 각도에서 이루어질 때 고려 음서제도의 역사적 의의도 제대로 찾을 수 있는 것이 아닌가 한다.
<金龍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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