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원의 농지는 공간적인 분포 면에서 여러 양상을 보이고 있었다. 여러 지역에 분산되어 있는 경우도 있었고, 일정한 지역 특히 사원 주위에 집중되어 있을 수도 있었다. 금강산에 위치하고 있던 장안사의 경우, 성종대에 1,050결의 토지가 지급되었는데, 전라도 지방의 咸悅縣·仁義縣·扶寧, 양광도 지방의 幸州·安山縣, 서해도 지방의 白州·平州에 분포하고 있었다.0761)≪新增東國輿地勝覽≫권 47, 江原道 淮陽都護府 佛宇. 고려 중기 龍壽寺의 토지는 古寺田柴 10결, 부근의 閑田 40결, 그리고 사원과 꽤 거리가 먼 新寧郡의 嚮福寺田 40결로 이루어졌는 바,0762)許興植, 앞의 책, 654쪽. 이들 토지는 그 형성과 정이나 토지의 성격으로 미루어 보아 한 지역에 집중되어 있지는 않았을 것으로 판단된다. 나말려초 大安寺의 전토는 전남과 경상도 남부에 여기 저기 흩어져 있었고,0763)태안사의 전토는 아래의 표와 같이 여러 지역에 분산되어 있었다(≪泰安寺誌≫, 亞細亞文化社, 143∼144쪽).
소 재 지 역
전답의 규모
晋州任內 永先縣
同 宣寧
靈光任內 森溪縣
同 年平縣
翼州任內 餘榥縣
寶城任內 五果縣
昇州任內 富有縣
陜川任內 加祚縣 94결 13부 7속
110결 29부 3속
18결 70부 2속
29결 85부
97결 18부
61결 55부
22결 98부 8속
60결 30부 2속
계
495결 2속
人 名
施 納 名 目
施納對象 및 結數
崔 怡
祝聖油香寶
國大夫人宋氏
忌日寶
同生妹氏忌日寶昇平郡 葦長伊村 鐵谷村 新谷村 합 10결 50복
昇平郡任內 加音部曲 40결 30복
進禮部曲 1결
赤良部曲 2결
富有縣地 田畓 합 2결 49복
昇平郡地 田沓 합 80결 30복
盧仁緩
祝聖
光州 田畓 합 15결
綾城郡 田畓 합 28결 50복
和順縣 田畓 합 7결 10복
鐵冶縣 田 1결 30복
金中龜
父母忌日寶
富有縣 田畓 합 17결
徐敦敬
父母忌日寶
宋緖의 토지와 교환하여 시납
長興府 任內 拂音部曲 田畓 합 5결
荳原縣 田畓 합 30결 63복
(利川郡 田畓 합 25결)
計
241결 12복
*備考:① 李基白,≪韓國上代古文書資料集成≫(一志社, 1987), 64∼65쪽을 근거로 위의 표를 작성함. ② 徐敦敬은 利川郡의 전답을 시납하였는데 長興府와 荳原縣에 소재한 宋緖의 전답으로 교환하여 시납하였으므로 통계는 이천군의 전답 대신에 장흥부와 두원현의 전답으로 계산하였음.
사원의 농지를 관리하는 자로서 知莊이 존재하고 있었다. 지장은 사원과 멀리 떨어진 사원의 토지에 파견되었다. 고려 이전에 世逵寺의 전토에는 莊舍가 있었고 이를 관리하기 위해 지장이 파견되었다.0765)≪三國遺事≫권 3, 塔像 4, 洛山二大聖 觀音 正趣 調信. 고려시기에도 사원전을 관리하기 위해 지장이 파견되었을 것이다. 장안사와 같이 사원의 토지가 사원과 멀리 떨어져 있는 경우에는 반드시 지장이 파견되어 농민지배와 수취를 실현해 나갔을 것이다.
사원전이 이처럼 멀리 떨어져 있는 경우에는 그러했겠지만 사원전이 사원의 주위에 있을 때에는 지장을 따로 파견할 필요가 없었다. 이 경우에는 사원의 경제적 살림을 맡은 直歲僧이 그 수취에 대한 모든 책임을 지고 있었다.0766)蔡尙植,<淨土寺址 法鏡大師碑 陰記의 分析>(≪韓國史硏究≫36, 1982). 지장이나 직세승은 사원전을 직접 踏驗하여 풍흉의 정도를 책정하였고 직접 경작농민들로부터 지대나 전조를 수취하였을 것이다.
또한 사원은 농기구를 소유하고 있으면서 경작농민에게 그것을 대여하기도 했다. 사원에는 이미 신라시대부터 소(牛)가 있었던 것이 보이며0767)≪三國遺事≫권 5, 感通 7, 郁面婢念佛西昇. 고려시기에도 현화사, 왕륜사, 석방사는 소를 소유하고 있었다.0768)<玄化寺碑>(≪朝鮮金石總覽≫上, 朝鮮總督府, 1919), 241∼247쪽.
≪高麗史≫권 55, 志 9, 五行 3, 고종 1년 11월·신우 10년 4월. 사원의 소는 사원전을 경작하기 위해 사역되었다고 볼 수 있다. 또한 종자대여를 통해서도 농민의 영농과정에 영향력을 행사할 수 있었다.
사원이 농지경영을 통해 수취하는 양은 토지의 성격에 따라 차이가 있었다. 수조지에서는 수확량 가운데 1/10을 전조로 수취하였다. 당시 국가가 전조를 수취하는 경우 수확량의 1/10을 농민으로부터 징수했기 때문에 사원의 수조지를 경작하는 농민도 수확량 중 1/10을 전조로 국가가 아닌 사원에 납부해야 했다. 사원의 소유지에서는 농민으로부터 소출의 1/2을 수취하였다. 1/2의 수취는 사원의 토지소유의 실현형태로서 지대였다. 이 토지에서는 소작제가 실시되었는데, 고려 후기의 경우이기는 하지만 崔瀣가 만년에 獅子岬寺의 전토를 借耕하고 있는 것은0769)≪高麗史≫권 109, 列傳 22, 崔瀣. 그 좋은 예이다. 차경에 대한 대가로 전호 농민이 지주에게 바치는 지대량은 소출의 1/2이 원칙이었다.
소유지 경영의 구체적인 예는 修禪社에서 볼 수 있다. 수선사에는 1220년대 당시 집권무인들이 寶의 명목으로 240여 결에 달하는 토지를 시납하였다. 이 토지는 수선사의 소유지이므로 지주전호제로 경영하였다.0770)李炳熙, 앞의 책, 52∼56쪽. 사원의 농지경영의 또 다른 형태를 通度寺에서 찾을 수 있다.0771)최길성, 앞의 글.
武田幸男, 앞의 글.
安日煥, 앞의 글.
金潤坤, 앞의 글.
李炳熙, 앞의 글(1988). 통도사의 농지경영은 수선사의 그것보다 한층 철저하고 완벽한 것이었다. 통도사는 장생표 안의 민을 배타적으로 지배하였다.
사원전은 경작농민에게서 지대나 전조만을 수취하였던 것은 아니었다. 사원은 전주, 지주로서 지배자적 입장에 있었고, 이와 같은 사회경제적 관계에서, 고리대나 강제교역을 통해서도 농민의 잉여를 흡수하는 것이 가능하였다. 사원전의 계통이 상이하듯이 사원전을 경작하는 농민도 여러 부류로 구성되어 있었다. 사원전의 경작농민은 크게 양인농민, 노비, 하급승려 등으로 구분된다.
양인농민은 수조지를 경작하는 중심 계층으로서 소유지를 경작하는 농민을 점하였다. 노비가 사원전을 경작했을 것은 쉽게 추측할 수 있지만, 그러나 사찰의 토지를 경작하는 것이 노비들의 주된 임무는 아니었다. 수조지를 지급받은 사원의 경우, 그 토지는 소유자가 곧 경작자였기 때문에 사원의 노비가 경작할 수 있는 것이 아님은 물론이다.
사원의 소유지 경작에서도 노비가 중심적인 역할을 하지는 않았다. 艶陽禪 寺와0772)李 穀,<高麗國江陵府艶陽禪寺重興記>(≪稼亭文集≫권 2;≪高麗名賢集≫3, 21∼22쪽). 上院寺에는 토지와 함께 노비가 지급되었는데0773)李 穡,<五臺上院寺僧堂記>(≪牧隱文藁≫권 6;≪高麗名賢集≫3, 838∼839쪽). 경작과 무관한 것으로 보이지는 않는다. 그런데 普光寺는 100경의 토지와 함께 노비 100口가 지급되어0774)<普光寺重創碑>(≪朝鮮金石總覽≫上), 495∼498쪽. 이들 노비들이 해당 토지를 경작하였던 것으로 생각된다. 이처럼 사원의 소유지를 사원노비가 경작했을 가능성도 생각할 수 있지만, 그렇지 않은 경우도 많이 보인다. 乾洞禪寺에는 토지와 함께 노비가 지급되었지만 경작과는 관계없는 使令에 충당되고 있다.0775)李齊賢,<重修乾泂禪寺記>(≪益齋亂藁≫권 6;≪高麗名賢集≫3, 27∼28쪽). 神福寺에는 토지만의 시납이 있었고,0776)李 穀,<大元高麗國廣州神福禪寺重興記>(≪稼亭文集≫권 3;≪高麗名賢集≫3, 27∼28쪽). 看藏寺에는 토지만 언급되어 있을 뿐 노비가 언급되고 있지 않아0777)李承休,<看藏寺記>(≪動安居士集≫雜著 1部;≪高麗名賢集≫1, 583∼585쪽). 노비가 주된 경작인이었다고는 생각할 수 없겠다. 물론 사원의 사유지에서 사원노비가 경작에 참여했을 가능성이 전혀 없는 것은 아니지만, 전적으로 그들에 의해 경작되었다고는 볼 수 없을 것이다.
사원노비의 주요 역할은 사령이었다. 그들이 담당하는 중요한 일 가운데는 薪饌이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사원에 필요한 잡역에도 동원되었을 것이다. 그리고 사원이 필요로 하는 수공업품을 만드는 노비들도 적지 않았을 것이다. 全英甫는 帝釋院의 奴로서 金薄기술을 가지고 있었고,0778)≪高麗史≫권 124, 列傳 37, 嬖幸 2, 全英甫. 충렬왕대에 어떤 비구니는 훌륭한 직조기술을 가진 婢를 두고 있었다.0779)≪高麗史≫권 89, 列傳 2, 后妃 2, 충렬왕 齊國大長公主. 허드렛일을 하는 사원 노비는 많았으리라 생각된다.
사원전은 또한 승려에 의해 경작되기도 했다. 승려가 사원전을 경작하고 있는 모습은 문종 10년(1056) 7월 왕의 制에서, “役을 피하려고 沙門이 된 자가 耕畜을 업으로 하고 있다고”0780)≪高麗史≫권 7, 世家 7, 문종 10년 9월. 지적한 데서 알 수 있다.
고려 초 이래 역을 피하여 승려가 된 자는 적지 않았다. 승려가 되면 역 부담을 면제 받았기 때문에 역을 부담하는 여러 계층은 무거운 부담을 피하고자 승려의 지위를 이용하려 했을 것은 틀림없다. 이들은 하류로 분류되는 승려로서 道衆·山僧·庸僧·無職雜僧으로 불리고 있었다.0781)李炳熙, 앞의 책, 135∼137쪽. 이들 하급승려들은 佛弟子인 승려로서 요구되는 바와는 거리가 먼 활동을 수행하였다. 고려 전기에 隨院僧徒·在家和尙이라 불리는 자들도 이러한 하급승려의 한 부류였다.0782)李相瑄,<高麗時代의 隨院僧徒에 대한 考察>(≪崇實史學≫2, 1984).
李炳熙, 위의 책, 137∼138쪽.
이들은 대체로 몰락한 농민출신일 것으로 보이며, 이들이 경작하는 토지는 사원의 소유지였을 것이다. 그들은 사원에 대한 수확물의 1/2에 상당하는 것을 지대로 납부해야 했다.
이 글의 내용은 집필자의 개인적 견해이며,
국사편찬위원회의 공식적 견해와 다를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