먼저 군현 수취의 경우 구체적인 기록이 보이지는 않으나, 고려 전기에는 아마도 丁(丁戶)을 매개로 수취되었던 것으로 여겨진다. 고려 전기 국가의 수취 기반으로서의 민은 丁과 白丁으로 편제되었으며,1143)“顯宗 十九年 正月判 令諸道州縣 每年桑苗 丁戶二十斤 白丁十五斤 田頭種植 以供蠶事”(≪高麗史≫권 79, 志 33, 食貨 2, 豊桑)라 하여 백정도 정호와 마찬가지로 토지소유자였음을 알 수 있다. 그 당시 백정층의 토지 소유 정도를 예측하기는 매우 곤란하나, 의종 때에 서북면 병마사 曹晋若이 烽式을 정하는 상주에서 平田 1결을 지급코자 한 예와 고려 후기 조준의 1차 상소에서 白丁代田 1결의 지급을 건의한 사례들을 보면(≪高麗史≫권 78, 志 32, 食貨 1, 田制 祿科田 우왕 14년 7월), 1결이란 토지는 당시 최소한의 재생산의 적정치로서 관념되었던 것 같다. 따라서 1결이란 收稅의 바탕이 되는 백정에게 삼세를 수취하기 위한 최소한의 토지면적이 아니었을까 생각된다. 정은 당시 군현을 단위로 한 제반 행정조치 즉 공해전·공수시지의 지급, 향리 정원과 기인 선상 및 역의 등급을 정하는 기준이 되었다. 그리고 이렇게 군현 단위로 시행된 행정 조치를 살펴 보면 수조지 분급이나 직역징발과 관련된 경우가 대부분이었다. 특히 직역 징발은 넓은 의미의 수취 범주 속에 포함된다. 이와 같은 상황으로 보아 군현을 대상으로 한 일반적인 수취 역시 군현의 정수를 기준으로 한 것이었다고 보아 큰 무리는 없을 것으로 생각된다.
정의 개념에 대해서는 人丁說, 田丁說, 전과 역의 결합체인 丁戶說 등이 있는데1144)安秉佑,<高麗前期 地方官衙 公廨田 設置와 運營>(≪李載龒博士還曆記念 史學論叢≫, 한울, 1991), 177∼178쪽 참조. 이 중에서는 정호설이 가장 설득력이 있어 보인다.1145)“각 역의 1戶를 나누어 6과로 한다…1과는 75정, 2과는 60정, 3과는 45정, 4과는 35정, 5과는 12정, 6과는 7정이다. 만약 토지가 있는데 丁口가 부족하면 백정의 子枝 중에서 지원하는 자로서 充立한다”(≪高麗史≫권 82, 志 36, 兵 2, 站驛)에서, 고려 전기의 정호는 丁과 통용되며 토지와 丁口로 이루어졌음을 알 수 있다. 물론 정이 인정 또는 전정의 의미로 쓰이는 경우가 없지 않으나, 적어도 고려 전기 읍의 등차를 구분하는 기준이 되었던 법제적 의미의 정이란 전토와 인정의 결합체인 정호를 의미하는 것이었다고 생각된다. 그러나 고려 후기에 오면 이러한 상황에 변화가 나타난다. 우선 고려 전기 군현수취의 근간이 되었던 정의 개념이 변화하고 있음을 주목할 수 있다. 즉 고려 전기에는 수취를 비롯한 군현 단위의 각종 행정조치의 기준이 되었던 전과 역의 복합체로서의「丁」이 후기에는 대부분「田丁」을 의미하는 개념으로 바뀌고 있다.1146)이러한 사례로서 “…其逆賊之田 計結爲丁 亦給募卒”(≪高麗史≫권 81, 志 35, 兵 1, 兵制 공민왕 5년 6월)과 같은 기록을 들 수 있는데, 이와 같은 기사는 고려 후기의 사료에서 흔히 찾아 볼 수 있다. 아울러 足·半丁의 경우도 고려 전기에는 직역을 담당하는 정호층을 일컬었지만, 후기에는 조세 수취와 관련하여 쓰이면서 전정의 규모를 지칭하고 있다.1147)그와 같은 사례로서≪高麗史≫권 78, 志 32, 食貨 1, 功蔭田柴 충렬왕 24년 정월조 忠宣王 卽位 下敎 및 권 78, 志 32, 食貨 1, 田制 租稅 공민왕 11년 密直提學 白文寶가 올린 箚子 등을 들 수 있다.
또 한가지 중요한 변화로서 군현의 수취기준이 호구와 전결수로 구분된다는 점을 들 수 있다. 고려 후기의 수취제 운영방식은 원종 10년(1273:己巳)부터 충숙왕 원년까지의 단계와 충숙왕 원년부터 고려 말까지의 단계로 구분할 수 있다.1148)≪高麗史≫권 79, 志 33, 食貨 2, 戶口 충렬왕 18년 10월 敎와 권 78, 志 32, 食貨 1, 田制 貢賦 충숙왕 원년 정월 忠宣王 諭 및 田制 租稅 신우 원년 2월 宥旨. 즉 고려는 원종 10년의 전국적인 호구조사를 통해 공부액을 다시 정하였는데1149)≪高麗史≫권 79, 志 33, 食貨 2, 戶口 충렬왕 18년 10월 敎 및 권 78, 志 32, 食貨 1, 田制 貢賦 충숙왕 원년 정월 忠宣王 諭. 이 戶口計點 방식에 의한 수취제 운영방식은 충렬왕대까지 계속되었다. 그러나 충숙왕 원년 정월에 충선왕이 田民計定使에게 “기사년에 공부를 更定하였는데 그 후로 賦斂이 不均해졌다”라고 한 것을 보면,1150)≪高麗史≫권 78, 志 32, 食貨 1, 田制 貢賦 충숙왕 원년 정월. 당시 호구 파악을 기초로 한 세제 운영방식에는 많은 문제점이 있었던 것 같다. 무엇보다도 12세기 이래 사적 토지 소유가 확대되고 토지를 매개로 하는 수취가 증가하는 추세에서 군현 공부의 수취액을 계점호구 방식에 의해 규정했다는 것은 커다란 모순이 아닐 수 없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호구를 기준으로 수취제를 운영해 나갔던 것은, 당시의 量案이 오랜 전란 등을 거치는 동안 실제의 상황과는 상당한 차이가 생기게 되어 이를 수취 기준으로 삼기 어려웠기 때문이며, 또한 원의 지배방식과도 일정한 관련이 있는 때문으로 여겨진다.1151)朴京安,<甲寅柱案考>(≪東方學志≫66, 1990), 104∼105쪽. 즉 己巳量田이 행해지기 바로 전해인 원종 9년에 ‘供戶籍’하라는 요구가 있었던 것을 보면 기사년의 호구조사는 이러한 원의 요구를 수용한 것이 아닌가 생각된다.1152)호구파악을 통한 원의 경제적 요구 내지는 간섭은 상당 기간 동안 실제로 이어졌던 것 같다. 즉 몽고의 요구에 의한 호구조사는 충렬왕이 동왕 4년에 직접 원으로 들어가서 忽必烈에게 點戶에 관한 것은 왕 자신의 필요와 사정에 따라서 시행하도록 허락을 받음으로써 없어지게 되었다. 또한 이 당시 군현 수취가 호구를 기준으로 운영되었던 것은 당시 권호층의 이해관계와도 깊은 관련이 있었던 것 같다. 즉 당시의 문무 양반 등 권호층들은 모두 良田 점유자였으며1153)≪高麗史≫권 78, 志 32, 食貨 1, 田制 經理 원종 원년 정월. 다소 후대의 사실이긴 하지만 충선왕 2년(1310) 11월의 量田增貢에 관한 논의가 있었으나 토지소유자층인 재추의 이해관계로 인해 무산된 사례가 보인다.1154)≪高麗史節要≫권 23, 충선왕 2년 11월.
호구 파악 방식에 의한 수취제의 운영은 충렬왕 18년(1292) 충선왕 2년 등 몇 차례에 걸쳐 호구와 더불어 토지를 기준으로 한 세제 개정의 시도가 보이나 끝내 성공하지는 못했다.1155)≪高麗史≫권 79, 志 33, 食貨 2, 戶口 충렬왕 18년 10월 敎.
≪高麗史節要≫권 23, 충선왕 2년 11월.
호구 파악에 의한 수취제 운영방식은 충숙왕 원년(1314)에 와서야 개정된다. 충숙왕 원년(甲寅)에 전국적인 양전사업이 완결되어 전적이 만들어지고 이에 근거하여 당시의 田口를 기준으로 공부가 갱정되고 잡공이 詳定되었던 것이다.1156)≪高麗史≫권 78, 志 32, 食貨 1, 田制 貢賦 층숙왕 원년 정월 忠宣王 諭.
朴京安, 앞의 글 참조. 그리고 갑인양전과 이를 토대로 한 수취제 개정은 물론 호구중심의 수취제 운영에 대한 모순의 근본적 시정과 국가 재정확보에 목적이 있었던 것이었다. 그런데 그 결과는 두 가지 방향으로 나타났던 것 같다. 즉 “新舊의 공부가 크게 고르지 못하여 民이 살기가 어려워졌다”1157)≪高麗史≫권 108, 列傳 21, 蔡洪哲.라 한 기록을 보면 민의 입장에서는 수취가 강화되는 방향으로 귀결되었던 것 같다. 그러나 국가의 입장에서 볼 때는 “國用을 넉넉하게 하여 백성을 安集토록 하는 데 요긴하였다”1158)≪高麗史≫권 78, 志 32, 食貨 1, 田制 貢賦 충숙왕 원년 윤 3월.라 하여 당시 수취제의 모순을 해결하고 국가재정을 확보하는데 일정하게 기여하였던 것으로 보인다. 따라서 이 갑인년의 양전과 수취개정은 그 후 고려 말 기사년(공양왕 1년) 양전 때까지 대체로 이 시기 수취체제의 기준이 되고 있었다.1159)朴京安, 앞의 글 참조.
요컨대 고려 후기 군현 수취의 변화로 주목되는 것은 고려 전기 田과 役의 복합체로서의 丁이 단순히 전정을 의미하는 내용으로 변하고 군현 수취의 기준이 정(정호수)에서부터 호구, 전결의 이중 기준을 채택하게 되었다는 점인데, 이는 곧 고려 전기의 정호체제가 붕괴되어 전과 역이 분리된 결과였다고 할 수 있다. 그러나 호구와 전결의 이중 기준에 의해 운영되는 수취구조는 실제 운영상의 문제점이 적지 않았다. 가령 당시 권호층들이 대농장을 경영하고 지방관들과 결탁하여 수취를 거부하는 현상들을 보면 실제로는 耕田의 많고 적은 것보다는 호구에 입각한 수취가 강요되는 경우도 적지 않았으리라 생각된다.1160)≪高麗史≫권 78, 志 32, 食貨 1 田制 租稅 신우 3년 8월 및 권 79, 志 33, 食貨 2, 신우 14년 8월. 따라서 고려 말의 전제 개혁론자들은 경전의 다과를 바탕으로 3등호제에 입각한 수취를 주장하였으며, 조선 세종대 이후로는 경전의 다과에 따른 등호제의 실시가 가능해진다.
다음 군현에서 면에 대한 공물 수취의 기준을 살펴 보면, 전조는 토지를 매개로 수취하였던 만큼 전결수가 기준이 되었을 것이다.
그러나 調에 해당하는 포세와 잡공, 庸에 해당하는 역역 징발과 상요에 대해서는 확실한 내용을 알기 어렵다. 다만≪朝鮮經國傳≫賦稅條에는 “戶가 있으면 某物을 내어 調라 하고, 身이 있으면 某物을 내어 庸이라 한다”라고 하여 調(잡공)는 戶, 庸(상요)은 身을 대상으로 수취하였음을 보여 준다. 그러나 어떤 기준을 적용하여 戶와 身을 대상으로 수취하였는지는 전혀 알 수 없다. 戶가 대상이었던 만큼 호등제가 적용되었음직한데, 전기의 호등제가 人身을 기준으로 한 9등호제였던 데 반해1161)“國制民年十六爲丁 始服國役 六十爲老而免役 州郡每歲 計口籍民 貢于戶部 凡徵兵徭役”(≪高麗史≫권 79, 志 33, 食貨 2, 戶口).
“編戶 以人丁多寡 分爲九等 定其賦役”(≪高麗史≫권 84, 志 38, 刑法 1, 戶婚). 고려 후기에는 다음의 기사와 같이 3등호제를 실시한 기록이 보인다.
1) (충렬왕 9년) 3월 諸王·百官 및 工商·奴隷·僧徒들에게 군량을 차등있게 내도록 하였는데…賈人 大戶는 7석, 中戶는 5석, 小戶는 3석을 내도록 하였다…(≪高麗史≫권 82, 志 36, 兵 2, 屯田).
2) 공민왕 31년 9일에 調度가 넉넉하지 못하여 백성들로부터 增斂하였는데 大戶는 米豆 각 1석(?), 中戶는 米豆 10석, 小戶는 米豆 5석으로 하였다. (이를) 無端米라고 하는데 백성들이 심히 괴로워 하였다(≪高麗史≫권 79, 志 33, 食貨 2, 科斂).
3) 신우 원년 2월에 敎하기를, ‘백성을 부리는 도리는 관대하기를 힘써야 한다. 금후 外方 각처의 民戶들은 모두 京中의 현재 행하고 있는 법도에 따라 대·중·소 3등으로 구분하여, 中戶는 둘로 하나를 삼고 小戶는 셋으로 하나를 삼아 差發하는 데 힘을 합해 서로 도와서 그르치지 않도록 하라’고 하였다(≪高麗史≫권 84, 志 38, 刑法 1, 戶婚).
위의 기사 1), 2)에서는 각각 商賈와 일반민을 대상으로 대·중·소 3등호의 구분에 따라 차등을 두어 과렴하고 있으며, 3)에서는 외방 각 처의 민호를 모두 京中의 예에 따라 대·중·소 3등으로 구분하여 差發하였음을 보여 주는 데, 이러한 사실에서 3등호에 의한 등호제가 실시되었음을 알 수 있다. 또한 호등의 구분은 고려 전기에는 인신을 기준으로 하였지만, 후기에는 자산을 대상으로 하였던 것 같다. 가령 위 3)의 기사에 의하면, 외방 각처의 민도 경중의 호등법에 의거하여 3등호로 구분하라고 하였는데, 도성 오부의 호등제는 가옥의 間架를 기준으로 하고 있었다.1162)이러한 사실은≪高麗史≫권 81, 志 35, 兵 1, 兵制 五軍 신우 원년 8월조에 보이는데, 비록 이 기록이 고려 말의 사료라고 하지만 3등 호등법은 이미 충렬왕대에도 보이므로, 가옥의 間架를 기준으로 한 京中의 호등법은 고려 후기의 일반적인 현상으로 보아도 좋을 듯하다. 일반 민호의 호등 구분의 기준은 분명히 밝힐 수는 없으나, 우왕 14년(1388) 8월 趙浚이 경작의 다과로써 호구를 3등으로 구분하라고 건의한 것으로 미루어 보아, 계전법에 의한 완전한 자산과세를 행했던 것 같지는 않다. 조선 세종대 이전까지 대체로 計田法과 計丁法이 절충되었던 것으로 미루어 보면, 고려 후기에도 민에 대해서는 양자를 절충한 호등법이 채택되었던 것으로 생각된다. 또한 1)의 기사에 보이듯이 상인에 대해서도 3등호로 구분하였는데, 이것 또한 그들이 소유한 자산을 기준으로 하였으리라 생각된다. 이와 같이 군현 수취의 기준을 충숙왕대 이후부터는 군현의 전결과 호구수에 의하였지만, 민에 대한 호등의 기준 속에 전결이 포함됨으로써 점차 전결에 대한 수취가 강화되고 있었던 것으로 생각된다.
이 글의 내용은 집필자의 개인적 견해이며,
국사편찬위원회의 공식적 견해와 다를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