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신편 한국사
  • 고려 시대
  • 15권  고려 전기의 사회와 대외관계
  • Ⅰ. 사회구조
  • 1. 신분제도
  • 6) 양인농민
  • (3) 세업으로서의 농업생산

(3) 세업으로서의 농업생산

 양인농민은 토지를 떠나 유망해서는 안되는 사람들이었다. 그들은 무엇보다도 경작을 통한 농업생산에 여념이 없어야 할 사람들이었다. 그리고 그러한 일을 대대로 물려야 하는 사람들이 그들이었다. 그들이 노비가 되어 公役을 물지 않는 것은 결코 바람직하지 않았다. 따라서 그들과 노비 사이의 결혼은 인정되지 않았다. 그것은 불법이었다. 농민들은 대대로 양인 신분으로 남아 있어야 하였다. 국가에서는 양인농민의 신분을 양인으로 고정시켜 둠으로써 공역·공과를 부담시키고자 하였기 때문이다. 더욱 본질적으로는 그들을 토지에 묶어둠으로써 대대로 생산자로 남아 있게 하자는 데에 국가의 더 큰 뜻이 있었다. 광종에 의하여 추진된 노비의 안검은 널리 알려진 사실이다.080)≪高麗史≫권 85, 志 39, 刑法 2, 奴婢 성종 원년 6월 崔承老上書. 그에 앞서 태조도 가난해서 남의 집 노비가 된 양인을 1천여 명이나 內庫의 布帛으로써 몸값을 물어준 바가 있었다.081)≪高麗史節要≫권 1, 태조 원년 8월 詔. 태조는 즉위한 지 2개월 뒤에 농민들에게 3년간의 조세와 부역을 면제시켜 주고 유망 농민들을 田里로 돌아가게 하는 조치를 취하기도 하였다. 이러한 여러 조치들은 농민들이 대대로 양인의 신분에서 농업생산에 전념하게 되기를 바랐던 국가의 입장과 관련지어 이해되어야 할 줄로 안다.

 그러해야 하였으므로 양인농민들이 관리가 되어 생산자의 지위를 벗어나는 일도 바람직한 일일 수가 없었다. 그러나 그들이 과거에 응시하는 일을 국가에서 굳이 막았던 것은 아니다. 그들은 제술업을 제외하고 나머지 명경업이나 잡업으로 과거에 나아갈 수 있었다.082)李基白, 앞의 책(1990), 57∼58쪽.
朴龍雲, 앞의 책(1990), 239∼243·571∼572쪽 참조.
그러나 그것은 거의 대다수 양인농민과 는 무관한 일이었다. 일정한 교육을 지속적으로 받고 경쟁이 심한 과거시험에서 성공하기란 경제적으로 사회적으로 열악한 지위에 있던 농민들로서는 여간 어려운 일이 아니었다. 물론 과거에 이르는 문이 열려져 있었다는 점이 농민들의 신분상 지위를 헤아리는 데 중요하기는 하다. 그러나 한편 그것이 현실적으로 별다른 의미가 없었다는 점도 이와 관련하여 간과될 수가 없는 것이다. 이 점에서 전 분야의 과거에 많은 이들이 성공적으로 나아갈 수 있었던 향리들의 경우와는 구별되어야 할 것이다.

 양인농민들의 신분 변동이나 이와 관련한 그들의 신분상의 지위를 이해하는 데에는 그들이 군인이 될 수도 있었다는 점에 유의하는 일이 더 유익할 것이다. 왜냐하면 과거에 성공하기 보다는 군인이 되어 그들의 신분을 상승시킬 수 있는 계기를 마련하기가 더 현실적이었기 때문이다. 고려는 군인을 배출하는 軍班氏族이 따로 있어서 이들이 중앙군의 핵심을 이루었지만, 보충이 필요할 때는 選軍하여 뽑았다. 그런데 이 선군의 주요 대상자들이 양인농민이었던 것이다.083)李基白, 앞의 책(1968), 110∼123쪽.
―――, 위의 책, 289∼294쪽.
군인이 되면 무반으로 진출할 수 있는 기회가 흔히 있었다. 이 길이라고 쉬울 수야 없었지만, 과거를 통하여 문반으로 나아가는 길에 비교하면 좀더 수월한 길이었음은 분명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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