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신편 한국사
  • 고려 시대
  • 16권  고려 전기의 종교와 사상
  • Ⅰ. 불교
  • 2. 대장경의 조판
  • 1) 초조대장경의 조판
  • (2) 조판의 경위 및 규모

(2) 조판의 경위 및 규모

 북송의 개보칙판에서 찍어낸「印成大藏經」이 성종 10년(991)에 도입된 이후에도 북송에서 불경 한 질이 도입된 기록이 보인다.≪續資治通鑑長編≫에 의하면, 현종 10년(1019) 11월 崔元信이 동·서여진의 수령을 거느리고 중국에 들어가 中布 2천을 주고 불경 한 벌을 요청하여 받아왔다.223)≪續資治通鑑長編≫권 94, 현종 10년 11월. 그러나 현종 13년(1022)에 건립된<현화사비>의 음기에는 그 해 紙墨 값으로 彩色 2천여 냥을 보내 대장경을 구하자 값을 받지 않고,「金文一藏」을 보낸 것으로 되어 있다.224)蔡忠順, 앞의 글, 249쪽. 이 금문일장을 학계에서는 인성이 아닌 金泥寫成의 장경 한 질로 보고 있다. 그런데 이를 차치한다 하더라도, 현종 13년 5월에 韓祚가 송나라에서 돌아올 때 황제가≪聖惠方≫·≪陰陽二宅書≫·≪乾興曆≫과 함께「釋典一藏」을 사급하여 이를 받아온 기록이 있다.225)≪高麗史≫권 4, 世家 4, 현종 13년 5월. 이「석전일장」도 간행·필사의 구분이 확실치 않아「인성대장경」여부는 가늠할 수 없다. 만일 그것이 인성대장경이라면 위에서 든 바 있는 2,500권 이외의 부족을 채우기 위해 청구해 온 것이 아니었던가 여겨진다.

 현종조의 대장경 조판사업은 착수 이후 꾸준히 계속되어 동왕 20년(1029)에는 상당한 양의 대장경이 판각되었으며, 이를 경축하는 藏經道場이 회경전에서 대대적으로 베풀어졌다.226)≪高麗史≫권 5, 世家 5, 현종 20년 하 4월. 이와 같이 대장경 조판이 촉진되어 그가 재위하였던 22년까지 근 20년간, 수사적 표현이긴 하지만 5천 축이라는 많은 수량의 대장경이 조판된 사실이 義天의<代宣王諸宗敎藏彫印疏>에 밝혀져 있다.227)義 天,<代宣王諸宗敎藏彫印疏>(≪大覺國師文集≫권 15).

 현종 다음에는 덕종이 4년 그리고 정종이 12년간 재위하였으나, 대장경의 조판에 관하여는 별로 이렇다 할 기록이 전해지고 있지 않다. 靖宗 7년(1041) 4월 장경도량을 회경전에 베풀었는데228)≪高麗史≫권 6, 世家 6, 정종 7년 하 4월 계사. 춘추 2회 씩, 봄 6일과 가을 7일에 베풀었다는 기록이 있다. 그러나 이것은 장경의 새로운 조판을 경축하기 위한 도량이 아니고 이미 조판된 장경의 수호와 봉안을 위해 전례에 따라 베풀었던 도량으로 여겨진다.

 靖宗 때에는 조정이 과거용으로 經·史·子·集 서적을 간행하여 널리 펴내는 데 힘을 기울였다. 따라서 대장경의 조판사업은 문종 때에 와서야 재개되었다. 그것은 의천이≪대선왕제종교장조인소≫에서, 문종은 천만 송의 契經을 새겼다고 밝힌 것에서도 능히 확인될 수 있다.

 위에서 살펴본 바 있듯이, 현종 연간에 북송 개보칙판에 근거한 대장경의 조판이 상당히 진척된 것은 사실이지만, 완전한 조판에는 이르지 못했다는 것을 다음의 기록에서 짐작할 수 있다. 영주 부석사의<浮石寺圓融國師碑>의 명문을 볼 때, 문종 7년(1053) 국사가 문도에게 대장경 한 질을 마련하여 安國寺에 소장케 하였는데, 그것이 인쇄본과 필사본으로 채워졌기229)高 聽,<浮石寺圓融國師碑>(≪朝鮮金石總覽≫上), 271쪽.때문이다. 현종 때에 대장경이 완전하게 새겨지지 못했기 때문에, 문종 7년에 한 질을 마련하고자 하여 아직 조판되지 못한 것은 필사하여 보충했던 것으로 여겨진다. 대장경 조판사업은 그 이후에도 계속되었다. 守其가 엮은≪高麗國新彫大藏校正別錄≫과 초조대장경의 현존본을 볼 때, 초조의 국본이 거란본을 바탕으로 조판했음이 확인되므로 거란대장경이 수입된 이후에도 대장경 조판은 계속되었음을 알 수 있다.

 거란대장경이 고려에 수입된 것은 淸寧 8년(1062, 문종 16) 고려의 조공에 대해 그해 12월 거란대장경 한 질을 문종에게 사급하였다는≪遼史≫고려전의 기록을 통해 알 수 있다.230)≪遼史≫권 115, 列傳 45, 二國外記 高麗 淸寧 8년 12월. 그리고≪고려사≫문종 17년(1063) 3월의 기록에 의하면 거란이 대장경 한 질을 보내주었으므로 법가를 갖추고 서쪽 교외에 나가 맞이하였다고231)≪高麗史≫권 8, 世家 8, 문종 17년 3월 병오. 기록되어 있다. 따라서 거란이 문종 16년 12월에 대장경을 보내주어 이듬해 3월에 받았음을 알 수 있다. 그런데≪요사≫道宗 본기에 의하면 咸雍 8년(1072, 문종 26) 12월에도 고려에 대장경을 사급한 기록이 있다.232)≪遼史≫권 23, 道宗本紀 23, 咸雍 8년 12월. 그러므로 9년 뒤인 문종 26년 12월에 다시 들어온 셈이 되는데, 그에 관한 기록이≪요사≫고려전이나,≪고려사≫문종 세가에는 보이지 않는다. 따라서 대부분의 학자들은 ‘청녕 8년 12월’을 ‘함옹 8년 12월’로 잘못 옮겨쓴 데서 빚어진 잘못이 아닌가 여기고 있다. 이와 같이 거란측 사료의 기록에 차질이 있기는 하나, 거란대장경이 우리 나라에 처음으로 들어온 것은 문종 17년임에 틀림이 없다 하겠다.

 거란대장경은 그 뒤에도 숙종 4년(1099)과233)≪高麗史≫권 11, 世家 11, 숙종 4년 4월 정해. 예종 2년(1107)에234)≪高麗史≫권 12, 世家 12, 예종 2년 정월 경인. 또 다시 들어온 기록이 있다. 초조대장경 조판의 바탕이 된 거란대장경은≪高麗國新雕大藏校正別錄≫권 27,<菩薩本緣經>상권의 교감기를 볼 때, 초조의 국전본과 북송본에 없는 문장이 거란본에만 26항 442자가 있다고 하였다.235)≪菩薩本緣經≫권 上, 校勘記(≪高麗國新雕大藏校正別錄≫권 27). 계산하여 보면 거란본은 한 줄에 17자씩 배자된 17자본 대장경임을 알 수 있으며, 이런 기록이 그 밖에도 또 나타나고 있어 그 사실을 뒷받침한다. 그리고 원종·충렬왕 때의 고승인 宓庵이 쓴<丹本大藏慶讚疏>를 보면 그 뒤에도 거란대장경이 또 들어왔음을 알 수 있다. 그 글에 의하면, “천만 축이나 되는 海藏 가운데 비록 아주 적은 분량으로서 부질이 간결하여 2백함이 되지 못하고 또 종이가 얇고 글자가 빽빽하여 1천 책이 되지 못하지만 그 정교도는 사람의 손에 의한 것이 아니라 신의 기교의 도움으로 이루어진 것 같다”고 감탄하였다 한다.236)宓 菴,<丹本大藏慶讚疏>(≪東文選≫권 112). 이 글로 미루어 보면 이 경찬의 거란대장경은 또 다른 아주 작은 소형본이며 초조대장경의 바탕이 된 대장경이 아님을 알 수 있다. 아마도 이용의 실용성과 경제적인 면을 고려하여 또 다시 판각해 낸 대장경인 듯하다.

 거란대장경의 본문이 초조대장경에 편입되어 새겨진 것은,≪고려국신조대장교정별록≫의 내용과 재조대장경의 更函에 들어 있는 대장목록의 내용을 두루 조사해 볼 때, 일부 학자가 주장하였듯이 거란본이 모두 조판 편입된 것은 아니었다. 북송본과 국전본에 누락, 착사, 이역 등으로 본문에 큰 차이가 있는 것만을 가려서 새로 편입하거나 대체 편입하였던 것으로 나타난다.

 그 밖에도 의천의<寄日本國諸法師求集敎藏疏>에 의하면 초조대장경에는 송의 신역 경론이 추가되었다.237)義 天,≪大覺國師文集≫권 15. 그리고≪고려사≫세가 문종 37년 3월의 기록을 보면, 임금이 태자인 순종에게 명하여 송조대장경을 맞이해서 開國寺에 안치하고 도량을 베풀게 하였다고 한다.238)≪高麗史≫권 9, 世家 9, 문종 37년 3월 기축. 이 송조대장경은 위에서 든 송의 신역 경론 이외에도≪정원속개원석교록≫을 비롯한≪정원신정석교록≫·≪속정원석교록≫에 편입된 경론으로 송에서 개보칙판 이후에 간행된 것이 포함되어 있음을 주목하여야 할 것이다.

 송나라에서는 태평흥국 2년(977)에 세운 太平興國寺에 譯經院을 마련하는 한편 개보칙판대장경이 완성된 동8년(983)에 또 印經院을 설치하여 傳法院이라 총칭하고 대장경의 새로운 번역과 조판·인쇄 업무를 맡게 하였다. 이 때 신역 경론은 물론 정원 연간에 편입된 경론이 아울러 전법원에서 조판·인쇄되었다. 이러한 번역과 조판·인쇄사업은 그 뒤에도 계속되어 신역 경론을 담은 목록으로≪大中祥符法寶錄≫·≪景祐新修法寶錄≫이 엮어졌으며, 이들 목록에는 태평흥국 8년(983) 이후 景祐 3년(1036, 靖宗 2)까지 사이에 신역·조판된 경론이 987권이나 수록되어 있다. 그 뒤 신종의 熙寧 4년(1071)에 이르러서는 그 사원이 조칙으로 폐지되고 그 기능이 開封府 아래에 있는 崇化坊 顯聖寺의 聖壽禪院으로 이관되어 원주 智悟大師 懷謹이 관장하였다. 그런데 여기에서도 개보칙판의 인출은 물론 신역 경론과 정원 연간 및 그 이후 入藏된 경론의 조인이 11세기 말부터 12세기 초기까지 이루어졌다.239)志 磐,≪佛祖統紀≫권 43, 太平興國 2년·8년.
道 安,<中國大藏經雕印史>(≪大藏經硏究彙編≫上, 1977), 122∼127쪽.
그러므로 문종 37년(1083) 3월 고려에 수입된 송조대장경이란 위에서 언급한 바와 같이 송에서 새로 번역한 경론과 정원 연간에 새로 편인된 경론을 일컬으며 이것들이 수입되어 조판되는 대로 추가 편입되었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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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판 1>신라 경덕왕 10년(751) 무렵 간행의≪無垢淨光大陀羅尼經≫
<도판 1>신라 경덕왕 10년(751) 무렵 간행의≪無垢淨光大陀羅尼經≫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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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판 2>고려 목종 10년(1007) 간행의≪寶篋印陀羅尼經≫
<도판 2>고려 목종 10년(1007) 간행의≪寶篋印陀羅尼經≫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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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그러면 그 조판작업이 과연 언제 마무리되었을까. 문종은 송조대장경이 수입된 지 4개월 후인 그 해 7월에 승하하였다. 따라서 이 조판사업을 그의 제2왕자인 선종이 즉위하여 계속 진행시켰는데, 동왕 4년(1087)의≪고려사≫기록을 살펴보면, 2월 갑오에 임금이 개국사에 행차하여 대장경의 조성을 경축하고,240)≪高麗史≫권 10, 世家 10, 선종 4년 2월 갑오. 3월 기미에 임금이 흥국사에 행차하여 大藏殿의 낙성을 경축하였으며,241)≪高麗史≫권 10, 世家 10, 선종 4년 3월 기미. 4월 경자에는 歸法寺에 행차하여 대장경의 조성을 경축하였다.242)≪高麗史≫권 10, 世家 10, 선종 4년 4월 경자. 이로써 대장경의 조판작업이 여러 사찰에서 이루어지고 이들 경판을 간직할 대장전이 흥왕사에서 낙성되었음을 알 수 있다. 뿐만 아니라 초조대장경의 경판은 그 뒤 符仁寺로 이관될 때까지 이 곳 흥왕사의 대장전에 간직되어 온 사실도 확인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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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판 3>초조대장경판≪大般若波羅蜜多經≫권 249
<도판 3>초조대장경판≪大般若波羅蜜多經≫권 24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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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위에서 살펴본 선종 4년의 기록에 의거하여, 학계에서는 초조대장경의 조판을 여기서 일단락지었던 것으로 보고 있다. 그런데 재조대장경목록을 볼 때, 초조대장경의 간행목록인≪大藏目錄≫이 편입된 갱함 뒤의 함차에 송나라 신역 장론이 추가 수록되어 있고, 또 전존본을 실사할 때도 초조본과 함께 12세기 무렵에 후인한 신역 경론으로서 갱함 뒤의 함차에 편입된 것이 나타나고 있다.243)千惠鳳,<初雕大藏經의 現存本과 그 特性>(≪韓國書誌學硏究≫, 三星出版社, 1991), 433∼438쪽. 이것은 초조대장경의 조판을 일단락지은 후 수입된 것이 조판되어 추가 수록되었던 것으로 여겨진다.

 위에서 초조대장경의 조판 경위를 살펴보았거니와, 요컨대 초조대장경의 조판은 현종 2년(1011)의 거란 침입을 계기로 그 무렵에 착수하여 선종 4년(1087)까지 76년을 걸려 일단락을 보았다고 하겠다. 그러나 그간 계속해서 조판이 이루어진 것이 아니라 주로 현종과 문종 때에 이루어졌고, 문종 말년에 들어온 송조대장경의 조판작업은 선종 4년에 일단락되었으며, 그 뒤에 들어온 것은 추가 형식으로 조판 수록된 것으로 나타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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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판 4-1>≪御製秘藏詮≫권 13 高麗 初雕板
<도판 4-1>≪御製秘藏詮≫권 13 高麗 初雕板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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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판 4-2>≪御製秘藏詮≫권 13 北宋 開寶勅板
<도판 4-2>≪御製秘藏詮≫권 13 北宋 開寶勅板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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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그런데 현종과 문종 때에 대장경이 각각 한 벌씩 조판되었다는 견해가 있어244)小野玄妙,<高麗祐世僧統義天の大藏經板雕造の事蹟>(≪東洋哲學≫18-2, 1969). 논박이 뒤따르기도 했다.245)妻木直良,<三たび高麗大藏經雕造を論ず>(≪新佛敎≫12-4, 1969).
池內宏,<高麗朝の大藏經>上 (≪東洋學報≫13-3, 1923).
金斗鍾,<初雕大藏經板의 雕造>(≪韓國古印刷技術史≫, 探求堂, 1974).
≪高麗國新雕大藏校正別錄≫의 교감기 중에서「國前本」및「宋本」중의 탈락문장을「國後本」·「丹本」에 의해 보충하고,「국전본」과「송본」을 보는 이를 위해 그 본문을 아울러 수록하고 있음을 볼 수 있다.246)傾 函,≪根本說一切有部毘奈耶破僧事≫권 13.
守 其,≪高麗國新雕大藏校正別錄≫권 30.

 그러므로 여기서 말하는 국전본은 개보칙판과 초기에 들어온 송본을 바탕으로 새긴 초조본을, 국후본은 거란본이 수입된 이후 그것을 바탕으로 새긴 초조본을 뜻하는 것임을 알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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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판 5-1>≪御製秘藏詮≫高麗 初雕板
<도판 5-1>≪御製秘藏詮≫高麗 初雕板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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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판 5-1>≪御製秘藏詮≫北宋 開寶勅板
<도판 5-1>≪御製秘藏詮≫北宋 開寶勅板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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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국전본과 국후본의 용어는 대장경의 服字函부터 楚字函까지 중, 뒤에 해당하는 更函에서 한 번 사용하고 주로「舊國本」또는 단지「國本」의 용어를 사용하고 있다. 그런데 그 가운데「舊宋本」을 바탕으로 한 것은「國前本」또는「舊國本」이라 했고, 契丹本을 바탕으로 한 것은「國後本」으로 일컬었음이 분명하다. 단지「國本」의 용어를 쓴 것은 바탕이 된 책에 따라「國前本」과「國後本」으로 가름됨은 물론이다. 그리고「國·丹 二本」또는「東·北 二本」으로 표시된 것은「國後本」·「契丹本」을 뜻하며,「宋本」에 대하여「二本」「他本」「諸本」으로 표시한 것은「舊宋本」에 대한「國後本」·「契丹本」등을 뜻하는 것도 곧 이해할 수 있다.

 국전본과 국후본의 용어가 이렇듯이 쓰여졌다고 하여, 현종 때는 북송본을 바탕으로 하고 문종 때는 거란본을 바탕으로 각각 한 질씩 조판되었다고 주

 장하는 것은, 정확한 고증이 이루어지지 못한 데서 기인함을 지적하지 않을 수 없다. 守其의≪高麗國新雕大藏校正別錄≫의 내용 분석과 전래되고 있는 초조본의 실증적 분석에 의하면, 현종 이후 거란본이 수입되기 이전에는 구송본을 바탕으로 국전본을 간행하고, 거란본 수입 이후에는 거란본을 바탕으로 국후본을 간행하였다고 할 수 있다. 다만 위에서 언급한 바 있듯이 국전본에 없는 것을 비롯하여 국전본·구송본과 본문에 차이가 크거나 착사가 심한 것 또는 이역으로서 내용 차이가 큰 것만을 가려 판각하여 새로 편입하거나 대체 편입하였던 것이다. 그리고 여기에, 그 뒤에 들어온 송조대장경 즉 송의 신역 경론을 비롯한 정원 연간 및 그 이후 入藏된 경론이 새겨지는대로 추가 편입되어 비로소 한 질의 대장경이 갖추어졌던 것이다. 다시 말하면 초조대장경은 1차로 개보칙판대장경을 바탕으로 받아들였고, 2차로 거란대장경에서 가려 받아들였으며, 3차로 송조대장경에서 신역 경론과 정원 및 그 이후 입장된 경론을 받아들였다고 할 수 있다.

 그러면 이렇게 하여 모아진 초조대장경의 규모는 과연 얼마나 되었을까. 위에서 인용한 바 있는 義天의<寄日本國諸法師求集敎藏疏>에 의하면≪개원석교록≫을 비롯한≪정원석교록≫등에 수록된 경·율·론 그리고 대송 신역 경론 6천 권을 조조했다고 하였다.247)義 天,<寄日本國諸法師求集敎藏疏>(≪大覺國師文集≫권 14). 개보칙판대장경이 근거한≪개원석교록≫의 총 권질수는 위에서 언급한 바와 같이 480질 5,048권이다. 따라서 1천 권에 가까운 경론이란 거란대장경에서 가려 편입시킨 경론을 비롯하여 정원 연간 및 그 이후의 석교록에 입장된 경론과 송 신역 경론의 1부에 해당함은 물론이다. 그리고 그 중 약간에 지나지 않지만 국내 전본에 의해 조판된 것이 들어 있음도 잊어서는 안된다.248)千惠鳳,<初雕大藏經의 現存本과 그 特性>(앞의 책), 451∼453쪽. 재조대장경의 갱함에 들어 있는 대장목록에 의해 조판의 규모를 살펴보면 天函부터 楚函까지 570함이 되며, 그 중에서 재조대장경을 조판할 때 어느 정도의 취사가 이루어졌다. 따라서 그 목록에서 적절한 보탬과 삭제가 이루어져야 그 규모가 밝혀지는데, 현재까지 조사한 바에 의하면249)千惠鳳, 위의 책, 425∼427쪽. 재조대장경의 조판에서 삭제 또는 대체된 것 중 보태야 할 것은 대략 다음의 4종 50권으로 알려지고 있다.

才函:六字神呪經 단권, 菩提流志 역 (중출된 것 중 1은 삭제). 孰函:佛說木樓經 단권, 不空 역. 回·漢函:佛名經 권 제1∼18 (위경). 俊·乂·密函:一切經源品次錄 권 제1∼30, 從梵 찬.

 한편 초조대장경에 없었던 것이 재조대장경을 간행할 때 추가된 것으로서 삭제하여야 할 것은 대략 다음과 같이 10종 15권으로 알려지고 있다.

伐函:佛說般舟三昧經 단권, 支婁迦讖 역. 鞠函:月燈三昧經 단권, 先公 역. 養函:彌勒下生經 단권, 法護 역. 知函:東方最勝燈王陀羅尼經 단권, 闍那崛多 역. 悲函:五佛頂三昧陀羅尼經 권 제 1∼4, 萻提流支 역. 詩函:蘇悉地供養法經 권 제 1∼3, 善無畏 역. 命函:大乘法界無差別論 단권, 提雲般若 역. 容函:受歲經 단권, 法護 역. 若函:舍衛國十夢經 단권, 附 西晋錄. 竟函:佛說受新歲經 단권, 法護 역.

 위에서 든 바의 보탬과 삭제는 守其의≪高麗國新雕大藏校正別錄≫을 비롯한 당·송의 여러 석교록과 小野玄妙의≪北宋官板覆刻金版大藏經目錄(私案)≫을 참고한 것이므로 그 밖에도 취사해야 할 것이 더 있을 것으로 여겨진다. 그리고 동일한 경전의 이름이면서도 구송본에 의한 초조본을 거란본에 의한 재조본으로 대체시킨 것과 전존본의 조사에 의해 삭제·대체·추가·재편 등의 가감이 폭넓게 이루어져야 함은 물론이다.

 이와 같이 모든 것이 가감 정리되어야만 초조대장경의 규모가 올바르게 밝혀지겠지만, 그 종류 수는 그렇게 많지 않으리라 여겨진다. 그 전체의 규모는 대략 570함이 되고 총 권수는 거의 6천 권에 달한다. 그러므로 그 수록 범위로 보아 당시 동양에서 조판한 漢譯 대장경 중 가장 큰 규모임을 주목하여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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