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려시대에 국가에서 설행하였던 불교행사에는 飯僧과 齋會도 있었다. 반승은 일명 齋僧이라고도 하여, 신도들이 승려에게 음식이나 물건을 베푸는 것을 말한다. 본래 불교는 보시를 중요한 수행덕목으로 생각하여 왔고, 보시로 인하여 탐욕심이 소멸되고 자비심이 길러진다고 보았다. 석가의 생존시에는 국왕이나 부유한 사람들이 석가와 수도자들을 초대하여 공양을 올렸다는 기록들이 있는데,≪楞嚴經≫의 설법은 부처와 제자들이 반승의 공양을 받은 날에 있었다고 전해지고 있다.
≪고려사≫의 기록에는 ‘一萬飯僧’·‘三萬飯僧’ 등이라 하여 매우 성대하게 열렸음을 알 수 있다. 처음에는 단순히 승려에게 식사를 제공하는 것만으로 그 공덕이 인정된다고 믿었으나, 나중에는 승려에게 법을 베풀어 받았으므로 식사를 제공해야 된다는 상관관계에서 행하여지게 되었다. 고려시대의 반승은 주로 인왕백고좌도량 등의 호국법회와 불탄일, 국왕 생일 등의 경축행사, 그리고 기신도량·우란분재 등의 추모행사 후에 행하여졌다. 이 반승행사는 점차 그 규모가 커짐에 따라 사회 경제적인 문제가 야기되기도 하였다.
고려시대에 가장 빈번히 보이는 반승은 인왕백고좌도량 등의 법회가 있고난 후에 행하여졌던 法會飯僧이다.≪고려사≫세가편의 반승 설행기사 중에, 그 동기를 알 수 있는 것의 대부분이 仁王百高座道場 때의 반승이며, 그 밖에 藏經道場 때에도 열렸다. 예를 들면, 현종 20년(1029) 4월에 會慶殿에서 장경도량을 설하고 나서 毬庭에서 1만 인에게 반승을 베풀었고, 문종 2년(1048) 9월에는 3일간 회경전에서 백좌인왕도량을 열어 구정에서 1만 명에게, 각 지방의 사원에서 2만 명에게 반승을 베풀었다.
이처럼 인왕도량 때의 반승은 거의가 개경의 구정에서 1만, 지방 州府의 여러 사원에서 2만명을 반승한 대규모의 행사였다. 고려 초기부터 전국적인 대규모로 열렸던 반승은 몽고와 항쟁하기 위하여 강화에 도읍을 옮기기 전까지는 유지되었으나, 江都시절에는 한 차례도 베풀어지지 못하였다. 전쟁의 와중에 상당한 지출이 요구되는 반승이 설행되기란 불가능한 일이었던 것이다.
이후 원의 간섭기에 들어와서는 이따금 반승이 시행되기는 하였으나, 그 설행 횟수와 규모가 크게 감소하여 그 양상이 달라졌다. 인왕도량 때 열린 1만 혹은 3만의 대규모 반승은 완전히 자취를 감추었고, 대신 국왕 개인이나 왕실 불교신앙의 차원에서 수백 명 혹은 천여 명의 소규모로, 그것도 전국적인 반승이 아닌 궁궐이나 특정 사원에서만 행하여졌다.
선왕이나 왕후, 공주의 忌日에도 재를 지낸 후에 반승하였다. 의종 8년(1154) 2월에 內殿에서 인종의 기일을 맞이하여 반승을 열었고, 예종 15년(1120) 9월에는 順德王后의 대상일에 常安殿에서 반승을 열었다. 공민왕 19년(1370)에는 왕이 공주의 기일을 맞이하여 魂殿에 행차하여서 3일간이나 반승을 열었다.
왕의 탄일을 경축하거나 석가세존의 성탄을 경축하는 의미에서도 반승이 행하여졌다. 국왕 생일의 경축반승은 공민왕 원년(1340), 5년, 15년, 17년, 18년, 20년과 22년 등 모두 7회에 걸쳐 기록이 보이고 있다. 한편 석가탄일의 반승은 공민왕 원년 4월에 왕이 불탄일에 궁중에서 연등을 설하고 승려 1백 명에게 반승하고 기악을 연주하며 구경하였다는 예가 있다. 그 밖에 국왕이 사원에 행차하여 소규모로 반승한 경우가 몇 차례 있고, 祈雨를 목적으로 인종 4년 5월에, 왕의 질병을 낫게 하기 위하여 인종 24년 정월에 반승하였다.
고려 후기에 와서는 반승의 설행 횟수와 규모가 줄어들었는데, 이는 승려의 수가 줄었다기 보다는 국가의 재정이 어려워지고, 나아가 대규모 국가적 호국행사였던 인왕백고좌도량이 종전처럼 열리지 못하였기 때문이었다. 원 간섭기라는 시대적 상황에서 진호국가행사인 인왕도량이 열리지 못한 것은 당연한 일이었으나, 공민왕 이후의 고려 말에 와서도 이러한 쇠퇴 현상은 회복되지 못하였다. 즉 공민왕대 이후의 반승은 왕의 탄일이나 공주의 기일에 열려 국가적 차원이 아닌 개인적 차원의 반승으로 변화하였다.
고려시대에 국가에서 베푼 반승은 승려를 수만 명씩 초청하여 반승한 경우가 대부분이어서 그 규모가 전국적이었으며, 그에 따른 소요경비 또한 막대하여 상당한 부담으로 작용하였다. 특히 고려 말에 와서 반승의 의식이 자주 설치됨으로써 사회경제적 문제가 되기도 하였다.
충숙왕 즉위년 10월에는 上王이 승려 108만 명에게 반승하고자 서원하였으며,412)≪高麗史≫권 34, 世家 34, 층숙왕 즉위년 10월. 그 비용이 헤아릴 수 없을 정도라고 하였다. 또 공양왕 3년에는 왕이 檜巖寺에 행차하여 크게 불사를 열었으며 왕이 직접 1천여 명의 승려에게 반승할 때에는 伶官으로 하여금 주악을 올리게 하면서 손에 향로를 들고 이곳저곳을 돌아다니면서 승려들에게 음식을 권하였다고 하니,413)≪高麗史≫권 46, 世家 46, 공양왕 3년 2월. 당시의 반승이 끼친 사회경제적 부담을 능히 짐작할 수 있다.
齋會는 불보살에게 공양을 올리는 행사로서 羅漢齋와 水陸齋등이 널리 성행하였다. 나한재는 16나한 또는 오백나한을 공양하여 찬탄하는 법회를 말하는데, 그 공양의 대상에 따라 각각 16나한재 또는 오백나한재라고도 하였다.
고려 중기에는 국왕이 普濟寺로 행차하여 그 곳에서 오백나한재를 올리는 일이 자주 있었다. 문종 7년(1053) 9월에 神光寺에서, 숙종 7년(1102) 10월에는 神護寺에서, 또 충렬왕 8년(1282) 9월에는 吉祥寺에서 열린 적도 있긴 했지만, 오백나한재는 주로 보제사에서 개최되었다. 숙종 4년(1099) 4월과 6년 4월, 의종 5년(1151) 7월과 7년 3월, 명종 6년(1176) 4월과 8년 3월 등은 다 같이 보제사에서 열린 예이지만, 의종 5년 7월에 있었던 오백나한재에서는 비오기를 아울러 기원하였었다. 또 신종 6년 2월에 있었던 오백나한재에서는 당시 국내를 시끄럽게 하였던 지방의 농민반란을 진압하기 위한 기도를 아울러 그 목적으로 하였는데 이는 오백나한재가 오백나한을 공양하는 순수한 뜻에서만 열리지 않았음을 보여준다.
나한재와 함께 물과 육지에서 헤매는 외로운 영혼과 아귀를 달래며 위로하기 위하여 불법을 강설하고 음식을 베푸는 의식인 수륙재가 있었다. 수륙재회는 일찍이 광종 때에도 때때로 성대히 열린 적이 있었는데, 선종 때 太史局事로 있었던 崔士謙이 수륙재의 의식절차를 적어 놓은 水陸儀文을 송으로부터 얻어 가지고 돌아오니 왕이 보제사 경내에 水陸堂을 새로 세우게 하여 수륙재를 더욱 크게 격식에 맞도록 하는 계기가 되었다. 또한 후에 一然의 제자인 混丘가≪新編水陸儀文≫을 찬술한 일은 수륙재를 더욱 널리 성행하게 하는 계기가 되었다. 충목왕 4년(1348) 11월에는 왕의 몸이 편치 않아 이를 물리치기 위해 공주가 前■成事 李君侅를 天磨山에 보내어 수륙회를 설하기도 하였다.
<洪潤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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