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신편 한국사
  • 고려 시대
  • 20권  고려 후기의 사회와 대외관계
  • Ⅱ. 대외관계의 전개
  • 1. 몽고 침입에 대한 항쟁
  • 2) 몽고의 고려 침입
  • (2) 최씨정권의 강화천도

(2) 최씨정권의 강화천도

 고려의 무인집정자 최우가 몽고에 대한 항전을 결의하고 개경에서 가까운 섬 江華로 도읍을 옮긴 것은 고종 19년 7월의 일이다. 이 사건은 이후 여·몽전쟁의 전개에 매우 중요한 전기가 되었거니와 이 문제가 정부에서 공식적으로 논의되기 시작한 것은 고종 19년 2월의 일이었다. 그 후 천도방침이 확정된 것이 6월 중순이며 국왕이 강화에 들어간 것이 7월 초의 일이었으므로 천도문제는 공식적 논의로부터 확정·시행에 이르기까지 불과 반년의 기간도 걸리지 않았던 셈이다.

 한편, 천도론의 공식적 논의가 몽고군의 철수 직후인 고종 19년 2월부터 공식 거론되기 시작했다는 것은 최씨정권이 이미 몽고군의 1차 침입기간 중에 천도에 대한 생각을 가지고 있었다는 것을 의미한다. 고종 18년 12월의 기록에 의하면, 최우는 당시 昇天府의 副使 尹繗과 錄事 朴文檥의 보고에 의거, 피란지로서 강화도의 적합성 여부를 살펴보게 했다고 한다. 몽고군의 침략으로 북계지역이 차례로 공파되고 개경이 포위되던 이 무렵 최우는 몽고군과의 화의를 도모하는 한편으로 몽고와의 대결을 전제로 한 천도에 대한 문제를 구체적으로 고려하고 있었던 것이다. 생각컨대 고종 19년 2월 신미일 대신들이 典牧司에 모여 천도를 공식적으로 거론하였을 때는 이미 집정자 최우의 생각이 굳어져 있었던 것이라고 여겨진다. 이제 천도론의 논의과정을 정리하면 다음과 같다.

① 2월 신미(20일), 宰樞가 典牧司에 모여 도읍을 옮길 것을 의논하였다(≪高麗史≫권 23, 世家 23, 고종 19년 2월 신미).

② 5월 재추가 전목사에 모여 대몽 방어책을 의논하였다(≪高麗史≫권 23, 世家 23, 고종 19년 5월).

③ 5월 계묘(23일), 4품 이상이 또 회의를 하였다. 모두 城守拒敵을 말하였으나 재추 鄭畝와 大集成 등만은 마땅히 도읍을 옮겨 난을 피하자고 하였다(≪高麗史≫권 23, 世家 23, 고종 19년 5월 신유).

④ 6월 신유(16일), 최우가 私第에 재추를 모아 천도를 의논하였다(≪高麗史節要≫권 16, 고종 19년 6월 신유).

 위의 기록을 통해 알 수 있듯이 재추회의에서 공식적으로 논의된 천도문제는 계속된 논의에도 불구하고 결론을 보지 못하고 회의만 거듭되었다. 이처럼 천도논의가 난관에 처하게 된 것은 반대론이 절대적으로 우세했기 때문이었다. 이같은 상황에서 최우는 자신의 저택에서 직접 회의를 주관하는 방법을 택하게 되었는데, 이는 집정자 최우가 천도론을 확정하고자 한 명백한 의도에서였다고 할 수 있다. 그러나 이러한 분위기에서도 여전히 반대론은 제기되고 있다.

 최우 사저에서의 천도 반대론은 몽고와의 소극적 화친론 또는 적극적 대결론의 양론으로 각각 제기되었거니와 이것은 이제까지의 반대론이 집약된 것으로 생각된다. 다음은 兪升旦의 대몽화의론이다.

유승단이 홀로 말하기를‘小로써 大를 섬김이 옳은 것인데, 섬김을 禮로써 하고 사귐을 信으로써 하면 저희가 또한 무슨 명목으로 우리를 곤욕케 하리요. 성곽과 宗社를 버리고 섬에 숨어 엎드려 구차히 세일을 보내면서 백성으로 하여금 壯丁은 다 살상당하고 老弱을 포로로 끌려가게 함은 국가를 위하여 좋은 계책이 아닙니다’라고 하였다(≪高麗史≫권 102, 列傳 15, 兪升旦).

 유승단이 말하는「以小事大」란 필시 의례적 성격이 강한 고려의 對金事大관계를 염두에 둔 것이라 생각된다. 그는 천도론의 문제점으로 그것이 소수 권력층과 관료들의 피란행위로 전락하여 오히려 백성들을 더할 수 없는 질곡으로 빠뜨리는 결과가 될 것을 우려하고 있다. 의례적인 사대관계의 수립으로 전쟁을 방지하는 것이 국가와 백성을 위하는 길이라는 현실주의적 주장인 것이다.

 한편 夜別抄指諭 金世冲은 몽고와의 대결을 전제로 한 개경고수론을 주장하였다.

야별초 지유 김세충이 문을 밀치고 들어가 최우에게 힐문하기를,‘松京은 태조 때부터 역대로 지켜 내려와 무려 2백여 년이 되었습니다. 성이 견고하고 군사와 양식이 족하니, 마땅히 힘을 합하여 지켜 사직을 보위할 것인데 이곳을 버리고 장차 어디에 도읍하겠다는 것입니까’하였다. 최우가 수성책을 물으니 김세충이 능히 대답하지 못하였다(≪高麗史節要≫권 16, 고종 19년 6월).

 당시 상하의 일반적 여론이 전쟁을 전제로 한 천도보다는 개경에서의 계속적인 안착을 바라는 것이었음은 의심의 여지가 없다. 유승단·김세충은 이러한 중론을 나름대로의 논리에 의하여 대변하였다고 할 수 있다. 그러나 김세충이 반대론을 개진하면서도 구체적인 개경 방어책에 대해서는 대답이 막혔던 것을 보더라도 개경고수론은 명분의 선명함에도 불구하고 현실감이 부족하다는 한계가 있었다. 몽고의 재침이 있을 경우 현실적으로 개경 방어가 어렵다는 것은 이미 몽고의 1차 침략으로 실증되었기 때문이다. 아마 천도가 단행되지 않았다고 한다면 고려의 항몽전쟁이 그처럼 장기화되었을 가능성은 희박하였을 것이다. 여론의 절대적 반대를 무릅쓰고 최씨정권이 천도론을 강행할 수 있었던 데에는 실로 이와 같은 현실적 명분이 전제되었기 때문이다.

 고종 19년의 천도책은 최우와 그 추종자들에 의해 일방적으로 추진되고 결의되었지만 최씨정권으로 하여금 천도책의 명분을 세우고 실천에 옮길 수 있게 해준 것은 기본적으로 몽고에 대한 의구심과 위기감이 널리 유포되어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것은 우선 고종 6년 여·몽관계의 성립 이후, 몽고의 고압적 태도와 사신들의 무례한 행동이 고려의 정책담당자들에게 거부감과 의구심을 극대화시켰다는 점이다. 이로 인하여 고려에서는 몽고에 대하여 ‘몽고는 오랑캐 중에서도 가장 흉악한 존재’라는 생각을 굳게 하였다. 여·몽관계 성립 이후 몽고의 경제적 징구가 매우 과중한 것이었다는 점도 향후 고려의 대몽관계가 현실적으로 상당한 어려움이 있다는 전망을 갖게 하는 것이었다. 고종 6년 이후 저고여의 피살이 있게 되는 12년까지 공물 징구를 목적으로 하는 사신은 매년 수차례씩 파견되어 고려정부를 압박하였고 1차 침략 이후에도 이러한 일방적 경제적 징구는 계속되었다. 고종 18년 12월 1차 전쟁 기간 중의 첩장에서 몽고는 말 1∼2만 필 분량의 금·은·보석 등의 물품, 백만 명의 몽고군 의복·자색 비단(紫羅) 1만 필·수달피 2만 개·大·小馬 각 1만 필 등 막대한 물량을 요구하고 있는데, 이는 고려의 부담능력을 크게 넘는 것이었다.

 몽고의 고려에 대한 요구는 단순히 경제적 징구로 끝나는 것이 아니었다. 몽고는 동진국 정벌을 위한 고려의 파병을 강요하였으며 각종의 기술자와 노동인력 등 제반 요구가 더하여졌다. 거기에 1차 침략 이후 다루가치를 개경과 국경지역인 북계의 72성에 설치함으로써 정치적 영향력을 강화시켜 나갔다. 이같은 상황은 곧 최씨정권의 정치적 위상에도 타격을 주는 것이었다는 점에서 심각한 국면으로 인식되었을 것임에 틀림없다.

 따라서 천도 반대론이 강하게 대두되었지만 이같은 상황에서 집정자 주변의 천도론자들은 극적인 방법으로 반대론을 위압해 버렸다.

어사대부 大集成이 최우에게‘세충이 아녀자의 말을 본떠 감히 큰 의논을 막고 나서다니 이를 참하시어 中外에 보이십시오’하고, 응양군 상호군 金鉉寶도 집성의 뜻을 따라 또한 그렇게 말하므로 드디어 김세충을 끌어 참하였다(≪高麗史節要≫권 16, 고종 19년 6월).

 고종 19년 상반기의 천도 논쟁은 천도의 가부만이 논의되었을 뿐 천도지의 택정 등 여타의 구체사항에 대해서는 언급이 없었다. 이는 천도론 자체가 많은 반대에 부딪쳐 여타의 문제를 논의할 여지가 없었던 탓도 있었지만 천도지는 이미 예정되어 있었던 것 같다.

 최우의 강화도에 관한 관심은 몽고의 1차 침략 종식 이전인 고종 18년 12월에 이미 나타나고 있다. 당시 최우는 昇天府의 부사 윤린과 녹사 박문의로 하여금 피난지로서의 강화도의 조건을 살피게 하였다. 윤린 등은 도중에 몽고군의 포로가 되었지만 이 무렵 이미 최우는 천도문제를 염두에 두고 있었던 것으로 생각된다. 몽고의 1차 침략 당시 북계의 여러 지역에서는 몽고군에 대한 대응으로 이른바「海島入保」가 활발히 이루어졌는데 몽고군에 대하여 연안의 섬을 전략적으로 활용하는 것은 이미 일반화되어 있었던 것이다.

 해도입보 차원에서의 천도지라면 제반 조건에 있어서 강화도만한 것을 달리 찾을 수 없을 것 같다. 강화도의 지정학적 조건에 대해서는 일찍부터 지적되어 왔지만 이를 종합하면, 첫째 물에 약한 몽고군의 약점을 이용할 수 있는 섬이라는 점, 둘째 육지에 가까우면서도 조석 간만의 차가 커 방어효과가 크다는 점, 셋째 개경과의 근접성, 넷째 조세의 운송과 관련된 漕運의 편의성 등으로 요약된다.247) 李丙燾,≪韓國史―中世篇―≫(震檀學會, 1961).
朴廣成,<丙子亂 後의 江華島 防備構築>(≪畿甸文化硏究≫3, 仁川敎大, 1973).
李龍範,<江華島 방어의 歷史的 考察>(≪江華島學術調査報告書≫, 1977).
그리하여 천도론이 전개될 때 천도 예정지에 대한 보다 상세한 여건 조사도 병행되었을 것으로 추측된다.

 최우는 자신의 집에서 천도책이 전격적으로 결의되자 곧 고종에게 이 사실을 통보하고 그 시행을 촉구하였다. 그러나 이에 대한 왕의 태도 역시 소극적인 것이었다.≪고려사절요≫는 이에 대해“왕이 머뭇거리고 결정하지 못했다”고 하였는데, 이 때문에 위협적 방법도 불사하게 되었다. 그날 최우는 자신의 家財를 100여 량의 수레를 동원해 강화도로 옮기도록 하고, 각 기관으로 하여금 그 시행을 독려하는 한편, 백성들에게도 이주시한과 처벌사항까지 정하여 공시하였다. 이처럼 천도책의 결의와 동시에 최씨정권의 선발대가 바로 강화도로 출발할 수 있었다는 것은 미리 천도의 준비가 일정하게 진전되어 있었음을 말해준다.

 이들 선발대는 개경 출발 직후 곧 교외의 敬天寺에서 1박을 하였는데 이들에게는 특별한 포상조치도 시행되었다. 6월 병인일 최우는 2천의 병력을 동원해 강화에 궁궐을 조영토록 조치하고, 7월 초하루에는 천도이후 개경 관할을 위한 후속조치를 취한 다음 같은 달 을유일에 국왕 역시 개경을 출발, 다음날 강화에 도착하였다. 그러나 강화로의 천도는 그것이 급하게 이루어진 데다 우기까지 겹쳐 혼란이 가중되었다.

을유일에 왕이 개경을 출발하여 승천부에 머물고 다음날 강화의 객관에 들었다. 이 때 장마비가 열흘이나 계속되어 진흙길에 발목이 빠져 人馬가 쓰러져 죽어갔다. 고관이나 양가의 부녀들로서 맨발로 업고 이고하는 자까지 있었다. 鰥·寡·孤·獨으로서 갈 바를 잃고 울부짖는 자가 이루 헤아릴 수 없었다(≪高麗史節要≫16, 고종 19년 7월).

 당시 傳國의 佛寶로서 궁중에 보관되어 있던 석가의 치아(佛牙)를‘총망 중에 잊어버리고 거두어 챙기지 못하여’분실한 사실도248)≪三國遺事≫권 3, 塔像 4, 前後所將舍利. 천도로 인한 혼란을 말해주는 것이다. 이러한 북새통에 개경에서는 어사대의 皂隷 李通의 반란이 일어나 경기지방의 유민과 개경 성중의 노예를 불러모아 앞서 개경 진수군으로 잔류한 王京留守兵馬使의 군대를 축출하고 여러 사찰의 승려까지 불러 모으는 등 반란이 확대됨으로써 혼란은 이루 말할 수가 없었다.

 최씨정권이 이처럼 천도를 서둘렀던 것은 몽고가 곧 내침할 것이라는 일련의 정보 때문이었다. 즉 몽고에 파견되었던 宋立章이 구류상태에서 탈출, 몽고군의 내침이 곧 있게 되리라는 제보를 하였고 이에 자극받은 최우는 전격적으로 천도를 단행하였던 것이다.249) 金庠基,<三別抄와 그의 亂에 대하여>(≪東方文化交流史論攷≫, 乙酉文化社, 1948). 이로써 고려의 서울은 개경에서 강화로 옮겨져, 이후 강화는 39년간 고려의 전시수도로서 그 기능을 담당하게 되었다.250) 강화천도 문제와 관련해서는 다음 글들이 참고된다.
金潤坤,<江華遷都의 背景에 關해서>(≪大丘史學≫15·16, 1978).
尹龍爀,<高麗의 對蒙抗爭과 江都>(≪高麗史의 諸問題≫, 三英社, 198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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