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종 18년(1231) 8월부터 44년 8월까지 거의 30년간에 걸친 고려와 몽고간의 전쟁을 통한 무인정권의 끈질긴 항몽정신은 민족사적으로 볼 때 높이 평가해야 할 역사적 유산이다. 그 후 몽고의 압력으로 원종 11년(1276) 5월에 단행된 개경환도와 이에 반대하여 궐기한 삼별초란의 진압 내지 翁壻關係의 성립은 결정적으로 몽고에의 예속을 재촉하였다. 그러나, 고려인의 항몽의식은 쉽사리 사라지지 않고 계속 존속해 내려가다가 공민왕대의 반원정책으로 연결되는 것이 특히 주목된다.
공민왕이 원의 후원으로 충정왕을 물리치고 즉위하던 14세기 중엽은 원에서는 마지막 황제인 순제가 통치하던 시기로서 말기적 증세가 극에 달아 쇠퇴의 기운이 노정되어 있던 때이다. 숙위시절에 직접 이를 목격한 공민왕은 왕권강화를 위한 개혁정치를 표방하고 나섰으니, 그는 즉위교서에서 18조목에 걸친 시정을 밝혀 국가중흥을 들고 나온 것이다.460)≪高麗史≫권 38, 世家 38, 공민왕 원년 2월 병자.
閔賢九,<高麗恭愍王의 反元的 改革政治에 대한 一考察>(≪震檀學報≫ 68, 1989), 52∼57쪽. 공민왕의 이러한 중흥정책은 비단 개혁정치로만 그친 것이 아니라 동왕 5년 5월에 부원배 기철 일당의 숙청과 더불어 단행한 반원정책으로 이어지는 것은 정치외교상의 중요한 문제로서 특히 주목할 필요가 있다.
그러나 공민왕의 개혁정치는 처음부터 어렵고 복잡한 양상을 띠지 않을 수 없었다. 그것의 가장 두드러진 사례는 政房의 폐지에서 찾아볼 수 있다. 정방의 혁파는 즉위 후 4개월만인 1년 2월에 단행한 것이지만 그것이 제대로 실효를 보지 못한 것은 조일신·기철과 같은 권신의 반발이 있어 중흥의 열매를 거두지 못한 데 있었다. 이는 동년 9월 중순에 大護軍 成士達이 정방에서 사사로이 벼슬 40餘소를 수여함으로써 하옥되었다는 기록이 있는 것으로 보아 그 일단을 짐작할 수 있다. 열전을 보면, 조일신이 정방의 복치를 청한데 대하여 왕은 옛제도를 회복한 지 얼마되지 않은데 또 고치면 사람의 웃음거리가 될 것이라고 하며 일단 거절하였지만,461)≪高麗史≫권 131, 列傳 44, 叛逆 5, 趙日新. 그 후 곧 복치했을 것은 성사달의 실례로서 짐작이 간다. 한편, 조일신의 난 직후에 洪彦博이 찬성사로서 洪彬 등과 더불어 政房提調가 된 것을 보면,462)≪高麗史≫권 108, 列傳 21, 洪彬. 정방은 조일신이 난을 일으키기 전에 이미 복치된 것이 분명하다.
조일신은 일찍이 공민왕을 좇아 원에 들어가 숙위하였고, 왕이 즉위하자 參理를 제수받았다가 귀국하여서는 찬성사에 오르고 수종공신 1등으로 녹공되기도 하였다. 그는 수종한 공을 믿고 횡포하고 교만하여 불법을 자행하더니 공민왕 원년 9월 하순에는 왕을 협박하여 스스로 우정승이 되는 등 반란을 일으켰다. 그러나 왕은 李仁復의 密議를 채용하여 행성에 나아가 그를 잡아 斬刑하게 된다.463)≪高麗史≫권 38, 世家 38, 공민왕 원년 10월 을사 및 권 131, 列傳 44, 叛逆 5, 趙日新.
조일신은 자기의 주도하에 기철 등의 부원파를 일소함으로써 정치적 위치를 확고히 하고 가문의 성세를 되찾으려는 정치적 욕망에서 반란을 일으킨 것으로 보여진다. 그러나 오히려 조일신의 난은 반전하여 기철일당의 부원세력을 강화시켜 개혁정치를 일단 중단할 수밖에 없는 결과를 초래하고 말았다. 당시 공민왕의 개혁정치를 저지 또는 제약하려 한 세력은 다름아닌 첫째는 원이고 둘째는 권문세족이었다.464) 閔賢九, 앞의 글, 57∼58쪽. 원이 개혁정치를 방해한 직접적인 자료는 보이지 않는다. 그러나 원 승상 脫脫이 사신을 보내 憸人 즉, 간사한 사람은 쓰지 말라고 하였는데, 승지 柳淑과 金得培가 居中用事하는 섬인으로 지목되어 사신의 요청으로 파직된 일이 있다(≪高麗史≫권 131, 列傳 44, 叛逆 5, 金鏞). 그들은 燕邸隨從功臣에다가 과거급제자로서 왕측근에서 시종하여 공민왕으로 하여금 배원적 성향을 띠는 새로운 조치들을 취하도록 유도하고 권유하였을 가능성이 크다. 이 때문에 원은 두 사람을 섬인으로 몰아 압력을 가한 것으로 보여진다. 그리고 권문세족의 반발 사례로는 田制를 바로 잡으려고 한 田民辨正都監의 혁파를 건의한 印侯의 아들, 印承旦과 안동 김씨 金永煦를 꼽을 수 있다(≪高麗史節要≫권 26, 공민왕 원년 8월).
더욱이 조일신의 난을 行省에 의지하여 진압할 수 있었던 것은 원과 더욱 밀착하게 되는 계기가 되었다. 따라서 고려의 정치에 원의 영향력이 가중됨으로써 부원적 정치세력도 그 활동범위가 넓어지고 강화되어 갔다. 여기서 특히 주목해야 할 것은 부원세력의 대표적 존재였던 기철·권겸·노책이 모두 元室과 혼인관계를 맺고 있었는데 특히 기철은 기황후와 남매간으로 그녀의 소생 愛猷는 황태자로 책봉되기까지 하였다.465)≪高麗史≫권 38, 世家 38, 공민왕 2년 7월 을해.
조일신의 난 후 원의 영향력으로 고려에서 더욱 강력한 지위를 구축한 이들 부원세력은 공민왕의 독자적인 권력질서를 부정하는 전형적 존재로 부각하게 되었다. 심지어 공민왕이 원으로부터 十二字功臣號를 받은데 대하여 기철이 축시를 지으면서 稱臣하지 않음으로써466)≪高麗史≫권 131, 列傳 44, 叛逆 5, 奇轍. 많은 파문을 일으켰던 것은 자주적 성격이 남달리 강했던 공민왕으로서는 더욱 참을 수 없는 일이 아닐 수 없었다.
공민왕은 드디어 동왕 5년 5월 중순에 부원과 기철 일당을 전격적으로 숙청하고 고려에 대한 원의 영향력 배제, 왕권의 집중, 정치개혁의 과감한 실행 등 몇 가지 목표를 내세웠다. 이를 좀더 구체적으로 말하면, 대내외적으로는 반원정책의 깃발을 높이 들어 征東行中書省理問所의 혁파, 동·서북면의 고토회복, 諸軍의 萬戶·千戶·百戶牌의 몰수, 원 연호(至正)의 사용정지, 관제개혁 등을 단행하였던 것이다. 이것은 한마디로 원에 대한 예속관계를 부인하고, 또 원에 의해 강등 변모된 정치제도를 초기의 것으로 환원시킨 것이라는 점에서 주권의 회복운동이었던 것이다.467) 閔賢九,<辛旽의 執權과 그 政治的 性格(上)>(≪歷史學報≫38, 1968), 50쪽.
이러한 대외적인 주권회복을 바탕으로 하여 나타나는 대내적인 권력집중에의 지향은 권문세족의 권부였던 정방을 다시 혁파하는 한편, 5년 6월의 敎에468)≪高麗史≫권 39, 世家 39, 공민왕 5년 6월 을해. 나타나는 바와 같이 방대한 개혁의 시도에서 찾아볼 수 있다. 이 개혁교서는 기철일파의 죄상과 釋器亂에469) 공민왕 5년 6월 을축에 前護軍 林仲甫가 충혜왕 소생인 釋器를 받들어 不軌를 도모한 것이 탄로나 前政丞 孫守卿 등이 斬刑되고 釋器를 서울 밖으로 내쫓았다. 대하여 언급하고는,“이제부터 정신을 가다듬어 다스림을 도모하고 법령을 修明하여 기강을 정돈하고 우리 조종의 법을 회복하여 기필코 온 나라로 더불어 更始(革新)하여 實德을 백성에 펴고 大命을 하늘에 이어받고자 한다”라 하여 혁신정치를 내세워 국가 중흥의 결의를 표명하였다. 그 요체는‘復我祖宗之法’에 최대의 목표를 둔 것으로서 고려 초기의 체제로 돌아가고자 하는 복고적 성격을 다분히 띠고 있었던 것이다.
당시의 개혁내용에 대하여는≪고려사≫의 각 志에 산재해 기록되어 있는데 禮志에 1조, 選擧志에 4조, 食貨志에 7조, 兵志에 11조, 刑志에 1조로 모두 24조에 달하고 있다. 그 가운데에서도 민생에 관한 것이 가장 많은데 특히 권세가의 불법척결과 원에 대비하기 위한 군사문제가 주목된다. 군사문제에 있어서 行省三所와 諸軍萬戶府에 예속된 호구를 추쇄하여 戍兵에 대비하고 역적의 토지를 作丁하여 募卒에게 지급하며, 역적의 노비가 達魯花赤〔다루가치〕라 칭하여 불법으로 빼앗은 土田을 적몰하여 수졸을 모집하고, 賊臣 및 行省이 점유한 인물을 추쇄하되 내력이 명백치 않은 자는 모두 驛戶에 충당케 한 것 등이다. 이는 역적과 행성이 침탈한 인구와 토전을 몰수하여 군비를 충실케 하려고 것으로서 반원정책의 의지를 다시 한번 다짐한 점에서 중요한 의미를 갖는 것이라 하겠다.
공민왕의 개혁정치를 주도한 세력은 이제현을 주축으로 한 유자계열로서 이에는 尹澤·金敬直·白文寶·安軸·李穡 등이 포함되어 있었다. 이들은 ‘誅奇轍功臣’(外戚·燕邸隨從功臣)처럼 기철일당의 숙청에는 직접 참가하지 못했지만, 같은 친왕세력으로서 그 다음 단계의 개혁정치에 적극 참여하여 이제현은 수상으로서 이를 주도하였던 것이다.
그런데 여기서 특히 주목해야 할 것은 위의 3계열 중에는 과거합격자가 포함되어 있어서 유학자라는 공통점을 갖고 쉽게 접근하여 연결될 수 있었던 점이다. 당시 고려의 대표적 유학자였던 이제현은 동왕 2년에 지공거로 과거시험을 주관할 때 외척 洪彦博은 동지공거가 되었고,≪益齋集≫에는 수종공신 柳淑을 언급한 詩가 있으며, 李穡은 부친 李穀과 유숙의 특별한 관계를 회고하고 있는 글 등을 남겨 그들의 관계를 알 수 있다. 이렇듯 공민왕의 정치적 기반을 이룬 3계열이 처음부터 추구한 것은 개혁정치였다. 곧≪益齋亂藁≫권 9의 策問를 보면, 이제현과 홍언박이 함께 시관이 되어 출제한 책문은 역대의 租稅制度와 田制를 거론하여 당시 권문세족의 겸병과 국가재정의 악화에 대한 해결방안을 묻고, 충목왕 때 整治都監이 결국에는 원의 간섭으로 실패에 들어간 것을 개탄하고, 立省策動이 경계해야 할 망발임을 강조하는 내용이 들어 있다. 여기서 특히 정치도감의 개혁활동을 긍정적으로 평가하고 있는 것은 고려의 국가적 독립성에 대한 관심을 환기시킨 것으로서 배원의 필요성을 강조하는 의미도 포함되어 있는 것이라 하겠다.470) 閔賢九, 앞의 글(1989), 66∼68쪽.
공민왕의 개혁정치에 있어서 좀더 깊이 음미해야 할 문제는 정방혁파와 관제의 개혁이다. 정방은 앞서 언급한 것처럼 공민왕이 즉위 직후에 혁파한 일이 있으나 권신의 집요한 반대로 곧 복구한 바 되었지만, 동왕 5년 5월에 반원적 개혁정치의 천명과 더불어 다음달 6월에 다시 혁파되었다. 이 때의 정방 혁파는 이색의 상소로 이루어진 것이다.
이색은 공민왕 원년에도 장문의 상소문을 올려 중흥정책의 단서를 열어준 바 있지만, 이번에도「時政八事」의 개혁의견을 개진하는 가운데 정방폐지를 첫째로 들었으며,471)≪高麗史≫권 115, 列傳 28, 李穡. 왕이 가납한 바 되어“정방은 권신으로부터 설치되었으니, 어찌 사람을 조정에 벼슬시키는 본 뜻이 되겠는가. 이제 마땅히 영구히 혁파하여 그 3품 이하는 재상과 더불어 그 진퇴를 의논하고, 7품 이하는 이부와 병부에서 의논하여 보고하라”472)≪高麗史≫권 75, 志 29, 選擧 3, 銓注 選法 공민왕 5년 6월.고 한 교서를 내리게 된 것이다.
그러나 이 때 정방을 영원히 없앤다고는 하였으나 교서의 내용으로 보아 2품 이상은 왕이 전권을 행사하고 3품 이하는 재상과 더불어 진퇴를 의논하였으며, 7품 이하만 이·병부에서 擬望한 것으로 되어 있는 만큼, 비록 銓選權을 이부나 병부에 돌렸다고는 하지만, 하급관료의 전주만 맡은 것이 되므로 아직 전선권이 정방의 권한에서 벗어나지 못한 것을 알 수 있다. 이와 같이 이·병부의 제한된 전선권은 1년 6개월이 지난 공민왕 6년 12월에“다시 전선을 이·병부에 돌렸다”473)≪高麗史≫권 39, 世家 39, 공민왕 6년 12월 병자.고 하는 바와 같이 비로소 전적으로 이·병부에 귀속되었다.≪고려사≫세가와 꼭 같은 내용이 선거지 선법조에도 실려 있는 것은 전선이 이·병부에 완전히 돌아간 것을 확실하게 입증하고 있는 것이라 하겠다.
공민왕이 5년 5월부터 본격적으로 추진해 나아간 반원정책과 개혁정치는 곧이어 전개된 원의 협박과 회유라는 양면정책에 밀려 동요를 면치 못하다가 8년 12월과 10년 10월 두 차례에 걸친 홍건적의 침입으로 아주 무너지고 만다. 제1차 홍두적의 침공을 격퇴한 후 1년 7개월이 지난 10년 9월 중순에 동란으로 막혔던 길이 겨우 열려 호부상서 주사충을 원에 파견하여 제후국으로서의 충성을 다할 것을 다짐하는 한편 정동행성을 복치하였는데,474)≪高麗史≫권 39, 世家 39, 공민왕 10년 9월 계유. 이는 홍적의 재침에 대비하여 반원정책을 포기함으로써 원의 원조를 요청하기 위한 것으로 보여진다.
이 때 고려가 반원정책을 포기한 것은 또한 개혁정치를 단념한 것을 의미하는 것이기도 하다. 이를 단적으로 입증해 주는 것은 제2차 홍적의 난을 평정한 후 두 달이 지난 동왕 11년 3월 중순에 단행한 관제개혁이다. 당시의 개혁은 충렬왕 원년의 관제로 돌아간 것으로서 원 지배하의 체제로 복귀한 것을 의미한다. 그런데 여기서 또 하나 주목되는 것은 이 때 또 정방을 복치한 것 같다는 점이다.
앞서 정방은 동왕 5년 6월에 영원히 없앤 것으로 되어 있지만, 언젠가 복치되었다는 사실은 신돈의 집권기에 箚子房知印으로 있던 成石璘이 그에게 아부하지 않는다고 하여 미움을 사서 林樸으로 교체한 기록이475)≪高麗史≫권 111, 列傳 24, 林樸. 그 시기에 대하여≪高麗史節要≫에는 공민왕 16년 12월로 기록되어 있다. 있는 것으로 보아 알 수 있다. 차자방은 정방의 별칭이며 知印房이라고도 하였으므로 지인은 정방에서 선법을 맡은 직책이었음을 알 수 있다.476)≪高麗史≫권 77, 志 31, 百官 2, 諸司都監各色 尙瑞司. 그러나≪고려사≫임박의 열전 내용만 가지고는 정방이 언제 복설되었는지 확실히 알 수 없다. 신돈이 권신이었음은 틀림없는 사실이지만 그가 정방을 복설한 확증이 없는 이상 임박전의 내용만 가지고 정방을 신돈이 복치한 것이라고 단정할 수는 없다.
그러면 정방은 언제 복설된 것일까. 제1차 홍두적의 침공을 격퇴하고 1년이 지난 공민왕 10년 2월에 왕이 이부낭중 李岡을 불러 관리임용을 엄정하게 집행할 것을 당부하고 있는 것을 보면,477)≪高麗史≫권 75, 志 29, 選擧 3, 銓注 選法 공민왕 10년 2월. 이 때까지는 아직 이·병부에서 전선을 정상적으로 행한 것을 알 수 있다. 그런데 그 후 정방이 복설된 것을 알 수 있는 기록은≪고려사≫권 111, 柳濯傳에 보인다. 즉 유탁이 시중이 되어 評理 崔瑩, 密直副使 吳仁澤과 더불어 정방의 제조를 맡았다는 것이다. 최영이 평리로 재직한 것은 동왕 12년 3월부터 동년 12월 사이이므로 정방은 공민왕 12년에는 확실히 존재해 있었던 것이다. 그러므로, 정방은 동왕 10년 2월에서 12년 사이에 복치된 것이 확실하다.
전술한 바와 같이 고려는 홍적란을 계기로 하여 다시 원의 지배체제가 강화되어 가는 현실 속에서 동왕 10년 9월에 정동행성의 복치, 원 연호의 재사용 등이 결정되고, 6개월이 지난 11년 3월에는 또 관제를 원 지배하의 체제로 복귀시킨 것은 한마디로 공민왕이 지난 5년 5월이래 추구해 온 반원정책과 개혁정치를 완전히 포기한 것을 의미한다. 그러므로 이강의 고사와 유탁전의 정방에 대한 기사를 감안해 볼 때 고려는 이러한 급격한 정치적 변혁의 소용돌이를 겪으면서 관제개혁과 때를 같이하여 정방을 복치하게 되었다고 보아도 큰 무리가 없을 것 같다.478) 필자는 일찍이<高麗政房考>(≪史學硏究≫13, 1961)에서 林樸傳을 근거로 하여 이 때의 政房復置는 권신 신돈의 作爲로 간주된다고 말한 바 있으나, 이 기회에 정방은 공민왕 11년 3월의 관제개혁과 때를 같이하여 복치되는 것으로 정정하고자 한다.
그런데 공민왕 11년 3월의 관제개혁은 공민왕이 환도하려고 복주를 떠나 尙州에 주류하고 있을 때 단행한 것이다. 고려는 이 해 정월에 이미 홍건적을 평정하고 경성을 수복하였으나, 김용의 간계로 홍적을 격퇴하는데 공로가 가장 큰 정세운 등 4원수가 차례로 살해되는 비운을 만난 때였으므로 민심이 흉흉해져 行在所의 경호가 역시 불안한 때였다. 또 2월 상순에 쌍성총관부의 叛將 趙小生이 納哈出〔나하추〕를 유인하여 三撤·忽面 땅에 들어와 있어 긴장이 고조되어 있었고, 홍적은 압록강을 넘어 달아나기는 했지만 언제 또 침공할지 예측할 수 없는 극히 어려운 시기였다. 따라서 고려로서는 이에 대비하기 위해서는 원에 계속 저자세외교를 취하여 비위를 맞추지 않을 수 없었던 것이다. 그리하여 반원정책의 잔재를 완전히 불식하기 위해서는 원 지배하의 체제로 돌아가는 관제개혁을 하지 않을 수 없으며, 또한 원이 싫어하는 개혁정치를 중지하는 표적을 보이기 위해서도 관제개혁과 함께 정방을 복치하는 것이 현명한 조처였는지 모른다.
이와 같은 고려의 노력은 원이 구원군을 투입하여 遼陽行省同知 高家奴가 요동지방에 잔존하고 있던 흥두적의 잔당을 소탕하고 그 괴수 破頭潘을 사로잡는 전과를 거두는 계기를 마련하였다.479)≪高麗史≫권 40, 世家 40, 공민왕 11년 4월 병신. 이리하여 두나라의 관계가 다시 회복되어 이 해 5월에 원은 太子詹事院僉同 奇田龍을 고려에 파견하였다. 이어 고려는 다음달에 判三司事 金逸逢을 원에 보내 방물을 헌납하게 하였고, 典法判書 李子松에게는 홍적의 평정을 알림과 동시에 전쟁 중에 노획한 玉璽 2개와 金寶 1개 및 金銀銅印 20여 개, 그리고 금은패를 바쳤다. 이러한 일련의 사실은 고려와 원의 관계가 다시 옛날의 우의를 완전히 회복한 것임을 시사해 준다.
그러나 두 나라의 친선관계는 공민왕폐위사건으로 오래 지속되지 못하고 결국 다시 대결 국면으로 접어들었다.
흥왕사의 변이 일어난 공민왕 12년(1363)에는 여러 종류의 많은 공신이 책봉되는 바480)≪高麗史≫권 40, 世家 40, 공민왕 12년 윤3월 을유. 興王討賊功臣(28명) 및 扶侍避難功臣(10명), 建議集兵定難功臣(紅賊亂때 戰略上申, 1명), 辛丑扈從功臣(제2차 紅賊亂 때 호종, 126명), 簽兵輔佐功臣(제2차 홍적란 때 簽兵에 유공, 9명), 收復京城功臣(제2차 홍적란 때 경성수복의 공로, 100명) 己亥擊走紅賊功臣481)≪高麗史≫권 40, 世家 40, 공민왕 12년 11월 임신. (제1차 홍적란 때 참전, 66명) 등이다. 이와 같이 당시 7종의 공신이 집중적으로 녹공된 것은 공민왕이 복주에서 환도하여 흥왕사를 잠시 御宮으로 정한 후 일어난 흥왕사의 변이 최영 등의 민첩한 군사행동으로 진압되자, 14일만에 전격적으로 먼저 흥왕토적공신을 책봉하고, 이어서 홍적관계공신도 소급하여 차례로 封功하였던 것이다. 이리하여 홍적의 난 이후 흥왕사의 변에 이르기까지 난국 타개에 공로가 많은 관인을 공신으로 봉하고 그에 따르는 정치적·물질적 급부가 이루어지게 된 것이다.
위의 7종 공신은 연인원이 346명이지만 중복하여 봉공되는 것을 고려한다면, 실질적인 인원은 약 280명이었고, 그들에게 총 26,300결의 토지와 2,635구의 노비가 지급되었다. 이들 가운데 200결 이상의 收田者를 추려보면 慶千興(신축호종·기해격주공신) 등 29명에 달하고 있다. 이 때 많은 토지를 받은 공신은 그들이 본래 갖고 있던 사회·경제적 기반을 더욱 굳건하게 하고, 이를 바탕으로 그 정치권력을 더욱 확대해 나갔을 것으로 생각된다.482) 閔賢九, 앞의 글(1968), 62∼65쪽.
여기서 특히 주목해야 할 것은 무장세력이 대거 등장했다는 사실이다. 홍적란의 평정이나 흥왕사의 변을 진압함에 있어서 무장들의 공로가 가장 컸던 것은 두말할 나위도 없거니와 흥왕사란의 경우, 이 반란을 평정함에 당시 군권을 장악하고 있던 최영 등 몇 사람의 힘이 가장 컸다. 그들은 흥왕토적공신으로 봉해진 뒤 곧 다시 별도의 공신호와 고위관직을 받게 되었는데, 최영은 盡忠奮義佐命功臣 判密直司事, 우제는 宣力協保功臣 密直副使, 韓暉는 推誠翊戴功臣 密直副使, 吳仁澤은 端誠亮節功臣 典理判書, 楊伯淵은 推誠翊衛功臣 開城尹, 金漢眞은 純城保節功臣 版圖判書에 제수되었다.483)≪高麗史≫권 40, 世家 40, 공민왕 12년 윤3월 계사. 이들 6인 중 최영은 수복경성공신, 우제는 수복경성공신과 기해격주홍적공신, 한휘는 수복경성공신과 기해격주홍적공신, 오인택은 수복경성공신, 김한진은 신축호종공신과 수복경성공신·기해격주홍적공신을 겸하고 있어 무장으로서의 경력을 잘 나타내 주고 있다. 그러나 이들 중 대표적인 최영이 판밀직사의 고위관직을 받았을 뿐, 侍中이나 贊成事와 같은 최고위의 관직을 이들에게 주지는 않았다. 그러나 그들의 정치적 실권은 대단히 컸다. 곧 흥왕사의 난을 계기로 급성장한 최영과 오인택이 시중 유탁과 더불어 정방제조가 되었을 때,“崔와 吳는 바야흐로 총애가 있었다”는 기록에서 알 수 있듯이 두 사람에 대한 왕의 총애는 대단하였다. 게다가 관원을 제수함에 있어 專恣하여 옆에 사람이 없는 것 같이 행동하므로 유탁이 병을 칭탁하여 참여하지 않았다는484)≪高麗史≫권 111, 列傳 24, 柳濯. 기록이 있는 것으로 보아 그들의 권한은 막강하였다.
그런데, 이들 무장세력은 공통된 속성으로 武才를 가졌고 과거급제가 아닌 門蔭이나 成衆愛馬의 選補를 거쳐 입사하였다. 그들은 대체로 세족출신이기는 했지만 왕과 특수한 관계에 있었던 것은 아니었고, 다만 여러 차례에 걸친 전쟁을 통하여 장수로서 군사적 공로가 있었던 것이 계기가 되어 권력의 중심에 부상하게 된 것이다.485) 閔賢九, 앞의 글(1968), 61쪽. 그 후 2개월 후에 일어난 공민왕 폐위사건과 덕흥군 내침사건은 무장세력을 더욱 강화시키는 결과를 가져왔다. 이러한 사실은 덕흥군과 최유가 거느린 원의 遼陽省兵을 수주의 달천에서 격파하여 승리를 거둔 최영과 경천흥이 개선할 때에 왕을 맞이하는 의식에 좇아 맞아 들이도록 명령한 것을486)≪高麗史≫권 40, 世家 40, 공민왕 13년 2월 무술. 보아도 알 수 있다. 정치적 혼란 속에서 왕의 시해가 계획되고, 원에 의해 폐왕사건이 벌어져 군사적 충돌로 이어지는 국면에 직면하여 공민왕이 취해야 할 현명한 방법은 가능하면 전쟁에서 공을 세운 자를 우대하여 정치적 안정을 유지하는 것이었고 이러한 분위기 속에서 무장세력은 더욱 강화되어 갔다.
당시 공민왕이 시도한 정치적 안정책의 추구는 먼저 군공중심과 무인위주의 관직편성을 들 수 있다.“전쟁에 참전한 장수로서 모두 超遷되지 않는 자가 없으므로 사람들이 從軍하기를 달가워 했다”487)≪高麗史節要≫권 27, 공민왕 12년 5월.고 한 기록은 이를 단적으로 잘 말해주고 있다. 좀 뒤의 기록이기는 하지만 공민왕 14년 3월에 행한 인사를 통해 재상에 오른 자의 가문을 분석해 보면,488)≪高麗史≫권 41, 世家 41, 공민왕 14년 3월 경진.
閔賢九, 앞의 글(1968), 68∼69쪽 표-5 참조. 과거에 의한 경우보다 문음으로 전공을 세워 재상에 오른 자가 훨씬 많은 것이 주목된다. 즉 35인 가운데 가문이 확실한 사람은 문음이 유탁 등 13인, 등제가 李仁復(찬성사) 등 3인, 宦者가 李龜壽(찬성사) 등 2인, 나머지 17인은 가문을 알 수 없지만 문음이었을 가능성이 크다. 그리고, 전체 인원 가운데 25인이 공신출신이었던 것은 이 때의 인사가 공신을 우대하기 위한 것이었음을 확실히 보여주고 있다. 더욱이 이러한 가운데에도 흥왕토적공신으로 최영 등 7명이 포함되어 있는 것은 특히 주목할만 하다.
이상에서 홍건적란, 흥왕사의 변, 공민왕폐위과 덕흥군 내침 등을 통하여 무장세력의 등장한 것을 살펴보았지만, 한가지 이해하기 어려운 점은 덕흥군의 내침을 격퇴한 최영·경천흥 등 무장이 개선한 후 이들을 별도로 녹공한 기록은 보이지 않는 것이다. 공민왕은 흥왕사란을 진압하고 2개월이 지난 12년 5월에 다시 19항목에 걸칠 교서를489)≪高麗史≫권 41, 世家 41, 공민왕 12년 5월 경오 下敎. 공민왕은 여기서“用底中興之理”를 내세우고 있는데, 그 구체적인 조목은≪高麗史≫各志에 산재되어 있다. 내려 다시 중흥정치를 시도했다. 그러나 이와 때를 같이하여 벌어진 원의 공민왕 폐위와 덕흥군의 내침은 왕조의 존망이 걸린 큰 사건이었기 때문에 개혁의 성과를 거두기는 어렵게 되었다. 뿐만 아니라 이로 인해 상대적으로 공민왕의 권위가 크게 실추되고, 개혁과는 거리가 먼 보수적인 무장세력이 권력의 핵심을 이루고 있는 상황 아래서는 개혁의 추진은 거의 불가능하였을 것이다.
이와 같이 무장세력의 정치적 권력이 강화되어 가자 공민왕은 다시 이에 위기의식을 품게 되었고, 덕흥군의 침공군을 격퇴시킨 무장들의 논공은 그들이 세력을 더욱 확대시킬 소지가 컸음으로 보류될 정도였는데, 동왕 13년 10월에 원의 恭愍王復位詔書가 도달함에 따라 공민왕 폐립사건은 일단락되었다. 그 후 원의 정치적 간섭이 사실상 배제됨으로써 공민왕의 정치적 입지는 안정될 수 있었고 따라서 군왕으로서의 권위도 회복될 수 있었다.
그리고 倭寇의 침입도 동왕 13년 말부터 조금씩 줄어 들었는데,490) 李鉉淙,<朝鮮初期 倭人接待考(上)>(≪史學硏究≫3, 韓國史學會, 1959), 28쪽. 이러한 군사적 정치적 변화속에서 공민왕은 새로운 정치적 변혁을 재시도하였다. 이에 따라 이듬해 5월에 辛旽(遍照)이 등장하여 국정을 맞게 됨으로써 제1차로 최영 등의 무장세력이 제거되었던 것이다.
공민왕 12년 5월에 무명의 승 신돈이 갑자기 정계에 등장하여 공민왕으로부터 이례적인 봉작과 높은 관직을 수여받아 국정을 총섭하게 된다. 공민왕은 앞서 반포된 5월의 교서에 바탕을 두고 다시 왕권강화를 위한 중흥정치를 강력히 추진해 나아감에 있어서 새로운 인물의 등용이 무엇보다도 중요하다고 생각한 것이다. 신돈은 공민왕 8년(1359)을 전후하여 외척 金元命의 소개로 왕을 처음 알게 되어 궁중에 드나들게 되었다. 신분은 미천하였으나 총명하고 왕 또한 불교를 독실하게 신봉하고 있었기 때문에 왕의 중망을 받았다. 그러나 鄭世雲·李承慶이 그를 몹시 미워하여 죽이려고까지 하였으므로 한동안 표면에 나서서 활동할 수 없었다. 그러나 그들이 죽은 뒤 동왕 13년에 頭陀僧이 되어 다시 왕을 來謁함으로 비로소 궁중에 들어와서 用事하게 되었는데, 이 때 왕으로부터 淸閑居士의 호를 받고 師傅가 되어 국정을 자문하게 됨으로써 실권자로 등장하게 된 것이다.491)≪高麗史≫권 132, 列傳 45, 叛逆 6, 辛旽.
≪高麗史節要≫권 28, 공민왕 14년 5월. 공민왕의 개혁정치에 영향력이 컸던 普愚와도 이 무렵부터 자연히 접촉할 기회가 생겼으리라고 보여지지만, 신돈이 사부로서 집권하게 되면서 공민왕과 왕사 보우와의 관계는 점차 소원해졌다. 이리하여 보우는 신돈을 邪僧으로 급히 탄원하는 상소문을 올리고 드디어 동왕 15년 10월에 국사를 사임하고 왕의 곁을 떠나고 말았다.492) 兪瑩淑,<國澄國師 普愚와 恭愍王의 改革政治>(≪韓國史論≫20, 국사편찬위원회, 1990), 176쪽.
신돈이 막강한 권력자로 등장하자 먼저 최영 등의 무장세력과 이인복·이공수 등 일부 유신세력이 제거 되었다. 공민왕 14년 5월부터 9월에 이르기까지 유배 혹은 파직되거나 封君되어 거세된 사람은 모두 25명에 달하고 있는데 이를 앞서 거론한 바 있는 공민왕 14년 3월의 인사이동에 결부시켜 보면, 35명의 고위관인 중에서 15명이 정계에서 밀려 났으며, 재신의 경우는 14명 가운데 9명이 제거되었다.493) 閔賢九, 앞의 글(1968), 74쪽.
공민왕이 신돈을 등용한 배경은 평소 世臣大族·草野新進 및 儒生들의 파당적인 행동에 불만을 가져왔던 터이므로「離世獨立之人」을 크게 등용하여 정치개혁에 박차를 가하려 하였는데 마침‘욕심이 없고 賤微하여 親黨이 없어 큰 일을 맡길만하다’하여 그를 발탁하였던 것이다. 그러나 신돈만을 등용한다면 최영·경천흥 등 주요 무장세력을 제거한 뒤의 권력관계 재편성기에 나타나는 정치공백을 갑자기 메울 수는 없으므로 고심끝에 權適과494)≪高麗史≫권 107, 列傳 20, 權㫜 附 適. 權適은 權㫜의 손자로서 당시 고려 최고의 문벌을 이루고 있던 安東 權氏에 대하여 공민왕은 즉위 초기에‘族黨滿國’이라 하며 증오한 적이 있었는데, 이 때 그를 贊成事로 임명한 것이다. 같은 세신대족도 끌어들이게 되었다.
따라서 새로이 구축된 권력의 구조는 무장집권 하에서 비주류를 이루고 있던 세력과 새로이 재등장하는 구세력의 연합으로 이루어지게 되었다. 대체로 공민왕 14년 9월 중순에 일단락되는 권력구성을 보면,495)≪高麗史≫권 41, 世家 41, 공민왕 14년 9월 경오. 권적과 같은 세신대족, 안우경·池龍壽 등과 같은 비주류무신, 김원명과 같은 외척, 이색과 같은 유신, 李仁任 등과 같이 방관적 태도를 취하며 관직에 계속 머물러 있으려 한 자 등으로 잡다하게 구성되어 있었다. 이와 같은 권력재편은 큰 변동없이 동왕 16년 10월에 오인택 등의 신돈제거 모의사건이 일어날 때까지 계속된다.
그 후 신돈은「權王」·「假國柄」496) 원에서는 權王으로 알려져 있었고, 명덕태후는 공민왕에게 假國柄하는 이유를 추궁한 일이 있었다(≪高麗史≫권 89, 列傳 2, 后妃 2, 明德太后洪氏).의 위치에서 정방을 통한 인사권 장악을 비롯하여 내외의 권력을 총괄해 나아갔다. 이와 더불어 그의 미움을 받거나 반대세력으로 지목된 자들은 숙청을 당하여 고려 정계는 상당한 세력교체가 이루어진다. 그리하여 신돈에 밀착 아부하는 무리가 늘어갔으나 끝내는 공민왕 20년(1371) 7월에 신돈은 역모를 꾀한다는 혐의를 받아 몰락하고 만다.
이상의 사실에서 특히 유의해야 할 점은 신돈의 집권기에 보여준 신돈과 공민왕과의 관계이다. 신돈을 끝까지 부정적으로 서술하려고 한≪고려사≫찬자는 그를 우왕·창왕과 관련시켜 廢假立眞을 내세워 조선 건국의 합리적 명분을 찾으려 하였고, 당시의 정치전반이 신돈에 의하여 주도되었다고 하며 신돈의 영향력을 지나치게 강조하고 있다. 한편, 공민왕은 노국공주가 돌아간 후 실의에 빠져 모든 국사를 그에게 위임하고 영전을 지나치게 호화롭게 조영하여 재정을 어렵게 하였으며, 말년에는 子弟衛를497)≪高麗史≫권 43, 世家 43, 공민왕 21년 10월 갑술. 만들어 미소년을 소속시켜 변태성욕을 즐겼다며 그의 실정을 강조하고 있다. 그러나 이 점 역시 조선 초기 사관들의 부정적인 기술 때문이라고 보아야 할 것이다.
공민왕이 신돈에게 이례적으로 대권을 위임한 것은 틀림없는 사실이지만, 공민왕과 신돈은 같은 입장에 서서 국사를 주도해 나갔으므로 신돈의 영향력이 컸을 것은 당연하다. 곧 신돈이 기도한 변혁에 대해 공민왕은 스스로가 모든 조치에 주의를 기울였고, 또 적극적인 입장에서 정치변화에 간여하였던 것은 여러 기록에서 쉽사리 찾아볼 수 있다.498) 공민왕 14년 9월에 신돈의 참소에 의해 金普가 제거된 다음 다시 신돈이 任君輔까지 내쫓고자 했을 때 이를 거절한 것이든지 (≪高麗史節要≫권 28, 공민왕 14년 9월) 그 후 신돈을 제거하려는 오인택의 모의가 있었을 때 공민왕이 신돈의 주장을 믿고 따른 것도 이를 잘 뒷받침하고 있다(≪高麗史節要≫권 28, 공민왕 16년 10월). 그런데 중요한 것은 이 시기에 신돈에 의하여 활발하게 추진된 개혁정치에는 더욱 그러한 면이 충분히 간취된다는 점이다.
신돈집권기의 개혁정치 가운데 중요한 것으로 먼저 田民推整都監의499) 최영이 貶出되고 4일 뒤인 공민왕 14년 5월 갑술에 刑人推整都監을 설치한 바 있는데, 閔賢九는 이것이 1년이 지난 15년 5월에 기능이 확대되어 田民辨正都監으로 재출발한 것으로 보고, 비록 辛旽傳에 田民辨整都監으로 칭하였지만≪高麗史節要≫·≪高麗史≫林樸傳에 보이듯이 田民推整都監으로 하는 것이 사실상 옳을 것이라고 했다(閔賢九,<辛旽의 執權과 그 政治的 性格(下)>,≪歷史學報≫40, 1968, 63쪽). 설립을 들 수 있다. 전민추정도감 설립에 관하여 당시의 상황을≪고려사≫신돈전에 의해 요약하면 豪强之家들이 公私田을 점탈하고 양민을 노예로 삼는 한편, 驛吏·官奴·百姓 등 有役者를 漏隱시키는 등의 부정을 저질러 이렇게 빼돌린 田·民을 가지고 農莊을 경영하고 있기 때문에 都監을 만들어 전·민을 추쇄해야 한다는 것이다.500)≪高麗史≫권 132, 列傳 45, 叛逆 6, 辛旽.
농장의 확대는 충렬왕 이래 내려온 因循之弊로서 문제가 많았다. 더욱이 홍건적의 난으로 정치적·경제적 대혼란을 겪고 있는 데다가 공민왕 12년(1363)의 대대적인 封功으로 인한 대규모의 토지급여는 당시의 정치적·경제적 상황과 맞물리어 고려 말의 농장발달에 획기적 계기가 되었다. 이러한 시점에서 볼 때, 토지제도의 혼란과 有役人口의 감소는 고려의 존립을 크게 위협하는 것이었다. 그러므로 즉위 초부터 개혁정치를 지향해 왔던 공민왕은 홍건적의 난과 원의 지배체제 복구로 한때 중단됐던 개혁정치를 신돈의 등장과 더불어 다시 강력하게 밀고 나갔고, 이러한 상황은 당연한 일이었던 것이다. 그러므로 전민추정도감의 설립은 공민왕 원년 2월에 설치한 田民辨正都監과 동왕 5년 6월 및 12년 5월에 반포한 교서의 연장선상에 놓고 보아도 큰 무리는 없으리라고 본다.
정민추정도감은 신돈이 判事, 임박이 使가 되어 의욕적으로 추진되었는데, 서울은 15일, 지방은 40일을 기한으로 자진 신고토록 하여 권귀들이 점탈한 전·민을 본주에게 돌려 주도록 독려하였다. 이에 천예로서 양민이라고 호소하여 양인이 된 자는 聖人이 출현하였다고 칭찬하였다 한다.501) 위와 같음. 그러나 전민추정도감의 성과는 주로≪고려사≫·≪고려사절요≫등에 단편적인 기록만 남아있을 뿐이어서 그 사실을 구체적으로 알 수는 없다. 뒷날 전제개혁론자의 계열에 속하는≪고려사≫찬자가 신돈의 정적을 악평하려는 입장에서도 이 정도의 기록을 남긴 것은 이 때의 田民推整이 매우 광범위하게 이루어져 상당한 영향을 미쳤음을 반증하고 있는 것이라 하겠다.
다음으로는 정치제도의 개혁이다.502) 閔賢九, 앞의 글(下), 66∼70쪽. 田民推整 다음 해인 16년에 諸道散官의 赴京侍衛를 법제화하여503)≪高麗史≫권 82, 志 36, 兵 2, 宿衛 공민왕 16년 8월. 국방병력을 강화함으로써 왜구 및 원명교체기의 군사적 압력에 대비하였다. 공민왕대에 관인계층의 양적 증가로“官類積薪, 前職滿國”의 현상이 이미 초기 기록에 나오고,504)≪高麗史≫권 75, 志 29, 選擧 3, 選法 공민왕 원년 3월. 그 후 전쟁으로 군공을 포상하기 위하여 첨설직이 양산된 바 있는데, 이들 외방 산관들을 직역으로서의 부경시위를 법제화하여 통제하려 한 것은 주목할만 하다. 또 공민왕 17년에는 당 현종대의 循資格을 채용하여 관료체제의 혼란을 막기 위하여 超遷을 규제하려고 하였다. 이것은 병란 혹은 정치적 혼란에 편승하여 관료체제의 불균형을 초래하고 정상적인 왕 중심의 권력질서의 확립을 저해하는 일을 막기 위한 것이었다.
여기서 우리가 또 하나 주목해야 할 것은 교육문화의 개혁이다.505) 閔賢九, 앞의 글(下), 70∼74쪽. 공민왕 16년에 임박의 건의에 의하여 성균관을 중건하고 생원의 수를 늘리는 한편, 五經四書齋를 분리하는 조처도 아울러 취하였다.506)≪高麗史≫권 111, 列傳 24, 林樸. 공민왕이 처음부터 교육에 각별한 주의를 기울였던 사실은 중흥정책을 펴는 교서에 누차 언급된 사실에서 살필 수 있다. 홍적란으로 타버린 성균관을 중건한 사실은 다시 교육중흥의 강한 의지를 천명한 것이라고 할 수 있다. 그리하여 당시 經學을 중시하여 사서오경재를 분리하는 조치를 취한 것은 과거제도에도 변화를 가져와 元制에 따라 鄕試·會試·殿試의 3試制를 실시하였다.507)≪高麗史≫권 73, 志 27, 選擧 1, 科目 1 공민왕 18년. 이보다 2년 전에는 中朝의 搜撿通考法을508) 공민왕 16년 搜撿通考法은 과거시험에 수험자의 신체를 검사하여 소지품을 조사하고 신분을 확인한 뒤에 시험장에 입장시키는 법으로서 당나라 때에서부터 비롯되었다(위와 같음). 채용함으로써 과거에 경전 중시와 엄격한 시험관리에 중점을 두었는데 이는 성균관의 중흥과 연결되는 괄목할 만한 조처라 하겠다.
신돈이 공민왕의 전폭적인 지지 아래 개혁정치를 활발하게 추진하고 있을 때 주목되는 사실은 함께 개혁에 참여했던 신진문신세력의 성장이다. 그들의 등장을 잘 말해주는 자료는 임박의 건의로 성균관을 중건하였을 때 판개성부사 이색을 兼大司成으로 삼고, 經術에 뛰어난 金九容·鄭夢周·朴尙衷·朴宜中·李崇仁 등을 택하여 모두 兼學官으로 임명한 것이다.509)≪高麗史節要≫권 28, 공민왕 16년 5월. 임박 등 7인은 모두 과거에 급제한 신진문신이며 이 밖에도 金齊顔·李存吾·鄭道傳·李穡·尹紹宗 등을 꼽을 수 있다. 이들 중에는 임박과 같이 신돈에 밀착하여 정치개혁에 적극 참여한 자가 있는가 하면 이존오는 신돈을 논핵하다가 貶出되고,510)≪高麗史≫권 41, 世家 41, 공민왕 15년 4월 갑자. 김제안은 신돈 제거모의에 참여했다가 피살되기도 하였다.511)≪高麗史節要≫권 28, 공민왕 17년 10월. 그러나 이색·정몽주·정도전·박상충·박의중·김구용 등은 중도적 입장에서 현실을 인정하며 개혁에 참여하였던 것이다. 이와 아울러 당시의 상황에서 눈에 띄는 것은 공민왕 18년(1369) 4월 明使 偰斯가 처음 고려에 옴으로부터 두 나라의 외교관계가 시작되었는데 공민왕이 적극적으로 친명정책을 천명하게 되자, 신진문인세력도 이에 동조하여 향후의 정치 변화에 지대한 영향을 미치게 되었다는 점이다.
명 태조 朱元璋은 원 문종 원년(1328)에 淮河유역의 濠州(安徽省 鳳陽)에서 가난한 농민의 아들로 태어났다. 17세 때 회북지방이 크게 가물고 전염병이 돌아 부모·큰형이 모두 죽으니, 游方僧이 되어 사방으로 떠돌아 다니다가 25세 때 남방 군웅의 하나인 郭子興의 부하로 들어갔다(1352;공민왕 원년). 공민왕 4년에 곽자흥이 사망하자 독립하여 34세 때인 공민왕 10년에 吳國公이 되고 3년 뒤에 應天府(南京)에서 吳王에 올랐다. 그러나 그 동안에 고려와 직접적인 교섭은 없었던 것 같다. 공민왕 16년에는 張士誠·方國珍을 차례로 평정하여 국력이 크게 떨치게 되자 徐達을 征虜大將軍으로 삼아 北伐의 대군를 일으키는 한편, 다음해 정월 응천부에서 황제를 칭하고 국호를 明이라 하였다.
주원장이 稱帝建元하던 날 北征軍은 山東 濟南부근에 주둔하고 있었는데, 바로 이 때 遼陽省平章 洪寶寶가 고려에 사람을 보내 명군의 위세가 크게 떨치고 있음을 알려왔다. 또 동년 8월 하순에 燕京의 위급한 사실이 전해지자 고려에서는 곧 좌상시 曹敏修를 義靜州等處安慰使로, 전 전리판서 林堅味를 安州巡撫使로 삼아 서북경의 방어에 대비하기도 했으나512)≪高麗史≫권 41, 世家 41, 공민왕 17년 8월 을미. 이 때는 이미 원의 수도 연경이 함락된 다음이었다.
연경은 공민왕 17년 8월 2일에 함락되었는데 이 소식은 2주 후에 在元高麗人 金之秀에 의하여 고려에 전해졌다. 이 소식을 들은 공민왕은 백관을 소집하여 명과의 통교여부를 논의했으나 회의 결과에 대하여는 기록에 나타나지 않는데 이는 좀더 관망하는 것이 현명하리라는 판단 때문이라고 추측된다.513) 필자는 오래전에<高麗와 元·明關係>(≪한국사≫8, 국사편찬위원회, 1976), 183쪽에서 공민왕 17년 11월 정미에 禮儀判書 張子溫이 사신으로 吳王의 후대를 받은 사실을 末松保和의 논문<麗末鮮初に於ける對明關係>(≪史學論叢≫2, 1941, 21∼22쪽)에 의거하여 吳王은‘吳王朱元璋’임이 틀림없다 하고, 대륙의 정세에 민감했던 고려가 명과의 국교가 정식으로 성립되기 이전에 먼저 손을 써서 명의 동정을 살피기 위해 장자온을 보낸 것이라 했으나 잘못된 생각이었다. 吳王은 北元系의 吳王도 있고 또 그와 여러 번 통교가 있었으므로 閔賢九의 앞의 글(下), 91쪽에 의하여 정정하고자 한다. 그러나 명과의 교섭은 비교적 빨리 추진되었다. 앞서 언급한 바와 같이 고려는 이미 장사성·방국진 등 여러 남방군웅과 빈번한 교빙을 해왔기 때문에 명나라도 일찍부터 고려의 존재를 잘 알고 있었을 것이 틀림없다.
명은 건국 후 10개월이 지난 공민왕 17년(1368) 11월에 符寶郎 偰斯를 고려에 보내기로 결정하였다. 설사는 곧 명의 건국과 洪武帝의 즉위사정을 고려에 알리는 국서를 갖고 고려로 출발하였다. 그러나 그는 도중에 풍랑을 만나 모진 고난을 겪고 다음해 4월 하순에야 겨우 개경에 도착하였고 이로써 두 나라는 정식으로 통교의 길이 열리게 되었다. 동년 5월 중순에는 예부상서 洪尙載 등을 명에 보내어 홍무제의 등극을 칭하하고 봉작을 청하였다. 이에 명은 동왕 18년 8월에 다시 설사를 시켜 金印·誥文 및 大統曆을 가지고 고려로 떠나게 했다. 그러나 그는 또 풍랑을 만나 다음해 5월 하순에야 겨우 개경에 도착하여 공민왕을 봉하여 고려왕으로 삼았다. 그리하여 고려는 동년 7월에 이르러 洪武 연호를 사용하게 되고514)≪高麗史≫권 42, 世家 42, 공민왕 19년 7월 을미. 이로써 고려와 명은 정식으로 국교를 수립하게 되었다.
이와 같이 고려와 명과의 관계는 명이 건국된 지 1년 3개월만에 정식으로 교섭의 길이 열려 평화적이며 순조롭게 진척되었다. 비록 원이 북쪽으로 쫓겨가기는 했지만 아직 몽고지방에서는 물론 요서·요동지방에 만만치 않은 세력을 구축하고 있어서 명이 완전히 북원을 제압하기 위해서는 고려의 협력이 필요했고, 고려 역시 원의 압력에서 완전히 벗어나기 위해서도 명의 후원을 필요로 했기 때문에 두 나라는 서둘러 국교를 맺었던 것이다.
한편, 원은 北奔한 후 6개월이 지난 공민왕 18년 2월 中書省右丞 豆利罕을 고려에 파견하고, 다음달 상순에 또 사신을 보내어 공민왕을 우승상으로 봉하는 등 성의를 표하였다. 그러나 이에 대하여 고려는 동지밀직사사 王重貴를 聖節使兼謝恩使로 파견하였으나 형식에 지나지 않았다. 그것은 이 해 4월에 명사 설사가 고려에 다녀가자 곧「至正」연호를 정지하였을515)≪高麗史≫권 41, 世家 41, 공민왕 18년 5월 신축. 뿐만 아니라, 동년 12월 중순에는 제1차 요동정벌을 단행하면서 북원과의 관계를 단절한 것으로516)≪高麗史≫권 41, 世家 41, 공민왕 18년 12월 신미. 보아 짐작이 간다. 이로써 여·명관계는 더욱 우의가 돈독해져 고려는 명의 책봉을 받고 그 연호를 사용하기 시작하였다.
원·명교체에 따른 고려와 명의 정상적 외교관계 수립은 그 후 대외, 대내적으로 적지 않은 문제를 야기시켰다. 대외관계에 있어서 먼저 지적해야 할 것은 요동지역을 거점으로 한 親元勢力, 즉 반공민왕세력을 분쇄하기 위하여 2차에 걸쳐 단행한 東寧府征伐이다.517)≪高麗史≫권 114, 列傳 27, 池龍壽條에 의하면 奇轍의 아들 奇賽因帖木兒가 원에서 平章 벼슬을 지내고 있다가 원이 망하자, 이곳에 웅거하여 遼瀋官吏 金佰顔 등과 더불어 변방을 침범하려고 한 때문이었다 한다. 제1차 동녕정벌은 공민왕 18년 12월에 이성계를 동북면원수, 池龍壽를 서북면원수, 楊伯淵을 부원수로 삼아 동녕부를 공격한 것이고,518)≪高麗史節要≫권 28, 공민왕 18년 12월,≪高麗史≫에는 18년 11월에 단행한 것 같이 보이지만,≪高麗史節要≫와 비교해 볼 때 12월 신미일의 일로 여겨진다. 제2차 동녕부정벌은 공민왕 19년 8월 중순에 공격명령이 내려졌지만,519)≪高麗史≫권 42, 世家 42, 공민왕 19년 8월 기사. 실제로 압록강을 거쳐 군사행동에 들어간 것은 이 해 11월 2일이며, 마침내 이틀후에는 遼陽城을 함락시켰다. 제2차 정벌은 사실상 제1차 정벌에 연속되는 것으로서 같은 편성 아래 이루어졌지만 보다 본격적인 것이었다. 공민왕이 동녕부정벌에서 추구한 것은 적극적인 반원책을 통하여 원세력과 연결되는 遼瀋 지역의 영향력을 완전히 차단함으로써 대내적인 안정을 꾀하는 데 있었다. 다음으로 대내문제로서 중요한 것은 공민왕 18년 6월 초순에 단행한 관제개혁이다. 이 때의 관제개혁은 공민왕 5년(1356)의 개혁, 즉 문종대의 체제로 복고하는 것을 의미한다. 앞서 언급한 바와 같이 1차로 공민왕 18년 4월에 고려에 사신으로 왔던 설사가 귀환하자 곧 원의 지정 연호를 정지한 데 이어 다시 원의 지배체제에서 완전히 벗어나는 관제개혁을 단행한 것이다. 이어 동왕 20년 5월 하순에는 監春秋館事 李仁復, 知春秋館事 李穡 등에게≪本朝金鏡錄≫을 증보케 하여 자주적인 역사의식을 높이려고 하였다. 이 책은 현존하지 않기 때문에 자세한 내용은 알 수 없으나 鄭摠이 지은<高麗國史序>에 의하면 靖宗 때까지의 초기 통사로 생각된다.
이와 같이 고려는 원·명교체기라는 대륙정세의 급격한 변동에 효과적으로 대처하기 위하여 대외적으로는 동녕부에 출병하고, 대내적으로는 관제개혁과 국사편찬 등을 통하여 자아의식 내지 자주정신을 자극하였다. 그리하여 공민왕은 점차 신돈의 집정에 회의를 품게 되어 親政의 뜻을 표명하였던 것이다.520)≪高麗史≫권 42, 世家 42, 공민왕 19년 10월 기묘일 기록에 의하면, 왕이 侍中 李春富에게 天道不順의 이유를 들어 그 태만을 책하면서 스스로 親政할 뜻을 보이고 있다. 여기에 또 주목되는 것은 田民推整都監에 대한 왕의 비판을 들 수 있다. 공민왕이 앞장서서 추구한 적극적 친명정책은 오랫동안 추구해 온 반원정책과 직결되는 것이지만, 공민왕의 친명 성향에 가장 먼저 접근할 수 있는 계층은 앞서 언급한 바 있는 신진문신세력이었다. 이러한 상황 아래 공민왕과 신진문신세력은 더욱 밀착되어 갔으니, 공민왕 19년 11월에 李詹이 올린 상소문은 그들의 자기반성 위에 기초를 둔 강력한 현실비판이 체제에 대한 비판으로 옮겨졌음을 뜻하는 것이다.521) 閔賢九, 앞의 글(下), 101∼102쪽. 그리하여 신진문신세력의 현실비판은 마침내 신돈의 존재를 부인하는 결과로 이끌어가 공민왕에게 많은 영향을 미쳤던 것이다.
이 시기의 신돈제거 모의사건 중 가장 큰 것은 공민왕 16년 10월에 일어난 吳仁澤사건이다. 오인택은 비주류 무장이었던 만큼 제2차 무장세력의 제거라고 할 수 있다. 이 사건은 경천흥처럼 신돈의 대두로 거택된 사람뿐만 아니라 신돈의 집권으로 유배에서 풀려나 知都僉議가 된 오인택을 비롯하여 신돈과 결탁하여 승진하였던 외척 金元命 등 많은 현직관인이 가담한 큰 규모의 것이었으나 실패로 돌아갔다.522)≪高麗史節要≫권 28, 공민왕 16년 10월. 동일한 정치세력간의 분열로 일어난 사건이었으나, 그들이 몰래 모의할 때“신돈은 사특하고 아첨하며 음험하고 교활하여 사람을 참소하고 헐뜯기를 좋아하며 勳舊를 내쫓고 죄없는 사람을 무찔러 죽였다”고 한 기록으로 보아, 신돈이 세력을 강화하기 위하여 黨與를 요소에 배치하고 있는 것을 보고 몸소 위기감을 느꼈기 때문에 발생한 사건으로 생각된다. 공민왕 17년 10월에는 또 前密直副使 金精 등에 의한 신돈 제거 모의사건이 일어났으나 역시 실패하였는데,523)≪高麗史節要≫권 28, 공민왕 17년 10월. 앞서의 오인택사건과 같은 성격의 것으로 보여진다. 다만 특이한 것은 신진문신 金齊顔이 가담하여 유배 중 교살된 사실이다.
위의 두 큰 사건은 신돈의 집권체제가 아직 강력하지 못했던 것을 단적으로 입증하고 있다. 또한 왕과 신돈 사이에 틈이 벌어지는 사건으로 눈길을 끄는 것은 신돈이 사심관을 복설하여 스스로 五道都事審官이 되고자 하여 諸道州縣事審奏目을 갖고 왕에게 갔다가 거부당한 일이다.524)≪高麗史≫권 132, 列傳 45, 叛逆 6, 辛旽 공민왕 18년 및 권 75, 志 29, 選擧 3, 事審官 공민왕 18년. 사심관 제도의 복설은 집권적 개혁정치와는 거리가 먼 것으로서 이 때 신돈이 스스로 5도도사심관이 되려고 한 것은 자신의 정치적 입지를 강화하기 위하였을 것으로 여겨진다. 신돈의 이러한 노력은 그후에도 계속되었으나, 몰락할 때까지 별도의 독자적 세력권을 형성하지는 못했던 것으로 보여진다.
5도도사심관 문제와 전후하여 본래 승려로 親與인 判少府監事 高仁器가 신돈의 역모를 고발하였으나, 신돈이 스스로 왕에게 변명하고 오히려 그를 祝髮시켜 금강산으로 쫓아버렸다.525)≪高麗史節要≫권 28, 공민왕 18년 11월. 고인기의 고발내용을 사실로 받아들이기는 어렵다 하더라도 이 사건은 신돈에 대한 공민왕의 불신을 자극했다는 사실은 다시 신돈의 역모사건이 발생했을 때 주살한 것을 보아도 짐작된다. 이러한 와중인 공민왕 19년 7월 全羅道體察使 崔龍蘇가 서울로 돌아와 신돈을 먼저 보고 나중에 왕을 알현하였다 하여, 유사로 하여금 加杖케 하였다는 기록은 많은 시사를 주고 있다.526)≪高麗史≫권 42, 世家 42, 공민왕 19년 7월 계사. 즉 위에서 거론한 사건들은, 앞서 최영 등 무장세력에 위기의식을 느끼고 이례적으로 신돈을 등용하여 이들을 제거했던 경우처럼 공민왕이 신돈에 대해서도 차츰 위기의식을 느끼게 하기에 충분하다. 그리하여 공민왕은 드디어 19년(1370) 10월에 이르러 이춘부에게 친정의 뜻을 밝히게 된 것이다.
최용소사건이 있은 지 1년이 지난 공민왕 20년 7월 신돈은 드디어 모역죄에 걸려 하루아침에 실각되었다. 選部議郎 李靭이 익명의 글을 올려 신돈의 모역을 고발하자, 당여 奇顯 등을 잡아 죽이고 신돈을 수원에 유배하였다가 곧 주살하고 말았는데, 기일은 겨우 5일밖에 걸리지 않는 전격적인 것이었다. 신돈의 모역사건은≪고려사≫신돈전에 비교적 자세히 기록되어 있다. 곧 지난 3월 왕이 憲·景의 두 능을 참배할 때 당여로 하여금 시해토록 하였으나 실패로 돌아가자, 하수자들이 그를“怯懦無用者”라 비난하고 그 때부터 신돈이 공민왕을 살해하려고 계획하였으나 결국 문객 이인에 의해 탄로난 것이다.
신돈의 모역은≪고려사≫찬자의 강한 부정적인 시각때문에 여러 가지 면에서 의심나는 점이 많다. 한마디로 조작되었을 가능성마저 배제하기 어렵다. 그러나 여기서는 그 진상을 밝히는 것보다도 몰락 후의 사태 진전에 관심을 기울이는 것이 더 중요하리라고 본다. 신돈의 실각으로 공민왕이 오랫동안 추구해 온 개혁정치는 사실상 실패로 돌아가고 정치 상황은 새로운 국면을 맞게 되었으며 정치세력 역시 재편되지 않을 수 없었다. 즉 신돈의 중용으로 제거되었던 무장세력이 다시 등장하게 되는 것이다. 경천흥·최영 등 전형적 무장세력이 貶所에서 소환되어 경복흥은 좌시중, 최영은 문하찬성사로 임명되는 등 그들은 다시금 고위관직으로 진출하게 된다. 이것은 곧 신돈의 집권기간이 부정적으로 평가되는 것을 뜻하며, 지배세력 편성에 있어 신돈집권 이전으로의 복귀를 의미하는 것이기도 하다.
한편, 신진문신세력은 대체로 종전의 관직을 유지하였으나 그들은 아직 정국을 주도해 나갈 만한 힘을 결집하지 못하고 있었다. 신흥국가인 명의 국력이 점차 요동방면까지 미쳐 오고 있었지만, 북원은 아직 요서·요동방면에 여전히 상당한 세력을 보존하고 있었다. 따라서 고려는 북원 및 그 계통의 독립세력으로 吳王·淮王·東平王 納哈出·遼陽省官吏 등과 교통하였지만, 그로 인하여 대내적으로는 친명파·친원파가 생겨 대립하기 시작하였다.
물론 공민왕은 신돈이 몰락하고 6개월이 지난 12월에 내린 교서를 보면,527)≪高麗史≫권 43, 世家 43, 공민왕 20년 12월 기해. 개혁을 중단한 것은 아니다. 그러나 19조에 달하는 개혁의 조서였지만 지난 5년 6월 및 12년 5월의 개혁 내용과 비교해 보면 의욕이 많이 감퇴된 것을 알 수 있다. 특히 경제문제 즉 田制에 관한 사항은 언급도 되지 않았으며, 武學 설치와 같은 새로운 조치가 없는 것은 아니나 添設職이 다시 복설되는 것은 무장세력의 강한 입김이 작용한 것으로 보여진다. 또한 경복흥이 政房 提調를 맡고528)≪高麗史≫권 111, 列傳 24, 慶復興. 있는 현실 속에서 개혁정치는 제약을 면치 못하였을 것이며, 또 공민왕 21년 6월 관제를 개혁하여 다시 원지배 하에서처럼 名號를 격하한 것은 명의 압력에 의한 것 같기는 하지만, 자주의식의 상실이라는 점에서 개혁의지의 후퇴라고 할 수밖에 없다.
한편, 이즈음부터 심해지는 왜구와529) 李鉉淙, 앞의 글, 28쪽. 대명관계의 진전에서 오는 긴장 내지 濟州叛亂은 무장들의 활동무대를 넓혀 주었고, 실추된 왕권을 강화시키기 위하여 공민왕은 子弟衛를 만들어 권력의 중심을 궁중으로 끌어 들이려고 하였으나,530) 閔賢九, 앞의 글(下), 112쪽.
李用柱,<恭愍王代의 子弟衛에 관한 小硏究>(≪素軒南都泳博士 華甲紀念史學論叢≫, 1984). 명의 고자세외교와 이에 따른 친원파와 친명파의 갈등 속에서 파생된 모순을 극복하지 못한 채 시해당하고 말았다.
<金成俊>
이 글의 내용은 집필자의 개인적 견해이며,
국사편찬위원회의 공식적 견해와 다를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