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라의 목판인쇄기술은 9세기 후반에는 많이 보급되어 일반 학문서까지 판각하게 되었다. 그러나 그것은 아직도 규모가 작은 것들이었다.
그러던 것이, 고려 초에 목판인쇄는 대규모로 전개되기 시작했다. 불교가 융성해지면서 사찰의 불경간행이 활발해진 것이다. 그리고 국가적인 사업으로서의 대장경의 조판사업으로 더욱 확대되었다. 현종 2년(1011) 무렵에 고려는 6천여 권에 달하는 대장경판을 만들기 시작하였는데, 그것은 성종 10년(991)에 송에서 수입된 開寶版대장경에 자극된 것이었다. 고려학자들은 이 대장경 판본의 아름다움에 끌렸고, 한편으로는 대장경판을 가짐으로써 고려의 높은 문화수준을 과시하고 싶었다. 그런데 그러한 목적보다도 더 크고 절실한 동기는 대장경을 조판함으로써 불력에 호소하여 거란으로부터 침략을 막아 국난을 타개하려는 열망이었다. 이 사업은 선종 4년(1087)에 이르러 일단락을 보게 되었다. 이렇게 국력을 기울인 대규모의 목판제작으로 고려의 목판인쇄기술은 송의 수준에까지 이르게끔 되었다. 그것은 그 시대 최고의 기술수준이었다.
이로부터 고려의 목판인쇄기술은 더욱 발전하게 되었다. 마침내 유학서적도 차츰 목판으로 간행되기 시작하였는데, 그것은 광종 15년(964)에 시작된 과거제도에 의하여 유학서적의 수요가 늘어나는 것과 이어지고 있다. 이리하여 11세기 말에는 의학 및 본초학서를 포함한 많은 책들이 중앙과 지방에서 인쇄되어 秘書閣을 비롯한 궁중의 전각들에 보존되었고 문신들에게도 배부되었다. 이 무렵에 고려는 중국과 일본 등지에서 사 모은 4천 권에 달하는 서적을 모두 간행하였다고 한다.
그런데 11세기에 만들어진 1만여 권에 달하는 대장경은 고종 19년(1232) 몽고군의 침략으로 모두 불타버렸다. 고려정부는 강화도로 옮겨가게 되어 적을 몰아내기가 점점 어려워지는 듯했다. 고려사람들은 현종 때 대장경을 만들어 부처와 하늘에 호소했던 것 같이, 다시 대장경을 조판하기로 했다. 고종 23년에 시작된 이 거창한 사업은 전후 16년에 걸쳐 81,258판의 대장경을 만들어 냈다. 이것이 지금 해인사에 보존되어 있는 팔만대장경이며, 재조대장경이라고도 한다.
이 대장경은 11세기의 초조대장경을 비롯한 송의 대장경과 거란의 대장경과 대조·교정하고 다듬어서 복각했다. 그래서 동양의 어느 漢譯 대장경보다 훌륭하다는 평가를 받고 있다. 그러나 목판 판각의 정교한 정도는 11세기 대장경보다 오히려 떨어진다고 한다. 초조대장경의 목판제작기술이 어떠했는지 알 수 없으므로 비교하기는 어려우나, 해인사의 팔만대장경 즉 재조대장경의 목판제조기술은 여러 가지 점에서 매우 훌륭한 기술상의 특징을 가지고 있다.
목판의 자재는 주로 산벚나무(山櫻)를 썼다.0418) 지금까지 제주도·완도·거제도에서 나는 후박나무를 썼던 것으로 알려져 왔으나, 최근의 조사연구로 산벚나무를 썼음이 밝혀졌다. 크기는 가로 72.6㎝, 세로 26.4㎝, 두께 2.8∼3.7㎝이고 무게는 2.4∼3.75㎏이다. 판목은 양쪽에 편목을 끼어 붙이고 네 귀에는 구리판으로 된 직사각형의 띠를 둘러쳤다. 이것은 판목이 뒤틀리지 않게 할 뿐만 아니라, 보존할 때 판목의 양쪽 면이 다른 판목의 표면과 밀착하지 않고 사이가 뜨도록 해서 통풍이 잘 되어 새긴 글자가 늘 깨끗이 되도록 한 것이다. 이런 제작수법은 다른 목판에서는 볼 수 없는 기술이다. 이것은 목판을 온전하게 오래도록 보존하기 위한 방책이었다. 한 번 인쇄를 하고 나서 다음 번에 또 인쇄를 거듭할 수 있게 하는 방식, 즉 시간의 간격을 두고 여러 번, 여러 벌의 인쇄를 거듭하는 재생산의 인쇄기술은 처음부터 계획하고 있었던 것이다. 그 재료로 산벚나무를 썼다는 사실도 그런 배려에서 나온 것이다.
전하는 바에 따르면, 이 산벚나무를 수년 동안 바닷물에 담갔다가 소금물에 쪄서 진을 뺀 뒤 다시 수년 동안 그늘에 말렸다고 한다. 그리고 판목의 크기대로 다듬어서 글자를 새겼다는 것이다. 이러한 방법은 조선시대까지 이어진 한국의 가구용 목재의 전통적 처리방법과 같다. 그래야만 목판이 단단해져 뒤틀리지 않고 새겨놓은 글자가 갈라지지 않는다. 거기에다 또 전면에는 얇게 옻칠을 했다. 벌레가 먹지 않도록 하고 목판이 부식하지 않게 한 것이다. 또 판의 한쪽 끝에는 작은 글자로 된 경전의 이름과 권수·장수 및 천자문 순서로 된 함수의 번호가 새겨 있다. 인쇄의 능률을 높이고 판본을 조직적으로 관리·보존하기 위한 분류기술인 것이다. 8만여 장의 방대한 목판의 보존관리와 필요에 따라 인쇄를 할 수 있도록 정리하는 작업이 이루어지고 있었다.
목판의 조판형식은 주변에는 세로 24.5㎝, 가로 52㎝의 테를 둘렀다. 그러나 괘선은 치지 않았다. 한면에는 23행의 글을 새기고 한줄에는 14자를 새겼다. 글자의 크기는 약 1.5㎝이고 앞뒷면에 경문을 새겼다. 그러나 경판들 중에는 판본 및 뒷면의 가로·세로 길이와 행수, 자수, 글자의 크기들이 꼭 같지 않은 것들도 있다. 또 윤곽과 괘선이 있는 것, 한면만 조각한 것도 있다. 16년이란 장기간 동안 제작하면서 나타나는 제작상의 차이가 아닌가 생각된다.
재조대장경은 그 내용이 정확하고 글씨가 아름다우며 목판제작기술이 뛰어난 세계에서 가장 훌륭한 판본이다. 그래서 그것은 고려대장경으로 널리 알려져 있다. 고려의 목판인쇄는 팔만대장경의 제작과정에서 최고의 기술수준에 도달한 것이다. 이렇게 고려의 목판인쇄기술은 불교경전의 인쇄반포에 고무되어 발전하였다. 그리고 그것은 시대에 따라 발전되어 나갔다기보다는, 그 규모와 사업의 주체, 官板과 私板 등에 따라 차이가 심하게 나타나, 기술의 발전을 단계적으로 보기는 어렵다.
이 글의 내용은 집필자의 개인적 견해이며,
국사편찬위원회의 공식적 견해와 다를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