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신편 한국사
  • 고려 시대
  • 21권  고려 후기의 사상과 문화
  • Ⅱ. 문화의 발달
  • 3. 문학
  • 1) 설화와 민간전승

1) 설화와 민간전승

 고려 후기에도 많은 설화가 있었음은 물론이나, 설화가 문학에서 차지하는 공식적인 위치는 전례없이 격하되었다. 怪力亂神은 말하지 않겠다는 재래 유학의 합리주의가 상당한 설득력을 굳혔는데다가 한걸음 더 나아가서 新儒學이 등장하자, 효자나 열녀설화가 아닌 것이라면 비판의 대상이 되거나 관심 밖으로 밀려나지 않을 수 없었다. 글을 쓴다면 설화를 정착시키는 것을 우선적 과업으로 삼아서 사상적인 문제까지 다루던 시대가 청산되었고, 설화에 의거하지 않고서 역사나 사회를 거론하고, 인륜도덕을 수립하는 단계로 들어섰다. 그 시대의 사정을 서술한 문헌이 과거 어느 때보다도 많아졌지만, 설화자료는 어디서도 찾아보기 어렵다.

 고려시대에 관한 전반적인 사정을 정리해 준≪高麗史≫가≪三國遺事≫는 물론≪三國史記≫와도 성격이 달랐다는 점도 함께 고려할 필요가 있다.≪고려사≫를 편찬할 때에는 정확한 史料가 비교적 풍부하게 남아 있었던 탓도 있지만, 신유학의 관점에서 합리적이고도 비판적인 역사를 서술하고자 했기에 이념수립을 위해서 부정하거나 긍정해야 할 긴요한 내용을 지닌 설화가 아니라면 관심 밖에 두었고, 그런 것들마저도 원래의 모습을 그대로 남기려고는 하지 않았다. 이런 이유에서 문헌에 남아 있는 고려 후기의 설화자료는 더욱 빈약할 수밖에 없었는데,0446) 張德順,≪韓國說話文學硏究≫(서울大 出版部, 1970)에서≪高麗史≫소재 설화를 분류했다.≪고려사≫편찬에서 보인 사고방식은 조선왕조가 들어서자 비로소 나타난 것이 아니고 그전부터 계속 성장하고 있었다.

 ≪補閑集≫ 끝머리에는 예사롭지 않은 두 편의 이야기가 실려 있다. 그 중 나중 것을 먼저 들어보기로 한다. 어느 노승이 소년으로 변신한 호랑이를 따라서 호랑이굴에 갔다가 죽을 뻔했다. 호랑이무리가 벌을 받게 되었을 때 그 호랑이는 자기가 벌을 감당하겠다고 하고, 약속된 장소에서 노승이 지닌 창으로 자살을 한 다음에, 사람으로 태어나 노승의 제자가 되었다. 그리고는 어디 가서 신통한 술법을 얻었다 한다. 崔滋는 논평을 달아서, 그것이야말로 괴이하고 허탄한 이야기인데, 앞일을 안다는 호랑이스님이 있다는 소리가 세상에 퍼져 있으니, 노승의 제자만 그렇다는 것도 믿을 수 없다고 했다.

 이 이야기는 신라 때의 일이라고 하는<金現感虎>의 변형이라고 할 수 있다. 金現이라는 청년과 호랑이처녀가 노승과 호랑이소년으로 바뀌었다. 그런데 여기서는 호랑이스님의 신이한 자취에 관심을 갖게 한다. 호랑이스님이 머물렀던 절의 이름을 따서 日嚴師라고 불렀는데, 일엄이라는 승려가 도통을 해서 눈먼 자를 보게 하고 죽은 자를 살려낸다 해서 명종까지 숭앙을 했다는 사건이≪高麗史≫의 林民庇傳에 보인다. 이런 자료에서 오랜 전승이 새롭게 이용되어 道僧에 대한 신앙과 연결되었던 사정을 알아볼 수 있는데, 최자는 가벼운 비판을 했을 뿐이고, 그 이상의 의미를 추구하지는 않았다.

 또 한 가지 괴이설화라 할 수 있는 것은 최자가 열 살 때인 신종 원년(1198)에 있었던 사건으로 전한다고 했다. 李寅甫라는 사람이 산천에 제사지내는 관직을 맡아 浮石寺에 묵었을 때 오래된 우물의 귀신이 아름다운 여자의 모습을 하고 나타나 잠자리를 함께 했으며, 그 뒤에 떼어버리기 힘들었다는 것이다. 최자는 이 이야기에 대한 논평을 하면서, 괴탄하기 그지없는 사건에 말려든 이인보의 처사를 나무랐다. 위에서 든 사례와 합쳐서 생각하면, 사람과 동물, 사람과 귀신이 얽혀서 인연을 이룬다는 이야기가 거듭 형성되었음을 알 수 있고, 그런 이야기가 배격된 사유도 엿볼 수 있다.

 민간에 전해지는 이야기 가운데 상층에서 특히 긍정적으로 평가한 것은 보은담이다.≪보한집≫ 중권에는 개가 술에 취해서 자고 있는 주인을 구출하느라고 몸에 물을 묻혀 끄다가 죽었다는 이야기의 첫 예가 보이고, 거기에 다른 사연이 덧붙어 있다. 주인이 개 무덤을 만들었고, 짚었던 지팡이를 꽂아 두었더니 나무가 되어 자랐다고 했다. 이 일이 전해지자 시를 지어서 개를 찬양한 사람도 있고 집권자 崔瑀는 개의 전기를 지어, 세상사람들로 하여금 은혜를 갚을 줄 알아야 한다는 교훈이 되도록 하라고 했다 한다. 이상과 같은 내용의 설화는 사회질서를 수립하는 데 알맞은 교훈을 포함하고 있다고 보았던 것이다.

 ≪櫟翁稗說≫에도 동물의 보은담이 두 편 실려 있다. 고려 초에 徐神逸이라는 사람이 화살에 꽂혀 도망치고 있는 사슴을 구해 주었더니 꿈에 신령이 나타나 그 사슴이 자기 아들이라면서 보답으로 자손이 재상이 되게 해주겠다고 한다. 과연 그대로 되었으며, 徐熙는 바로 서신일의 손자라는 것이다. 그 다음 이야기는 근래의 일이라고 하면서, 朴世通이라는 사람이 지방의 현령이 되어 나갔다가 거북같이 생긴 큰 생물이 잡혀서 죽게 된 것을 구해 주었더니, 역시 꿈에 어떤 노인이 나타나 자기 아들을 살린 은공에 보답하기 위해서 3대가 재상이 되도록 해준다고 했다는 것이다. 그대로 되었음은 물론이고, 손자대에 와서는 주색에 빠져 기회를 잃고 거북을 원망하는 시를 지었더니, 그날 밤에 거북이 꿈에 나타나 소원이 얼마쯤은 성취될 것이라는 말을 했다는 대목이 보태져 있다.

 이런 이야기는 특정가문에서 자기네의 득세를 합리화하고 자랑하고자 퍼뜨렸을 듯하고, 하층에 이르기까지 널리 공감을 얻기는 어려웠을 것이다. 꿈을 통해서 신령스러운 세계와 관계를 맺는다는 요소는 함께 지니면서도 이와는 반대되는 설화가≪역옹패설≫에 보인다. 어느 권력있는 집안에서 양민을 억지로 종으로 만들자 그 사람이 재판을 담당하는 관서인 典法司에 고소를 했는데, 전법사의 책임자인 金㥠라는 자가 원통한 사정을 알면서도 권력이 두려워 부당한 판결을 했더니, 꿈에 하늘에서 칼이 내려와 전법사의 관리들을 모조리 내리찍었다는 것이다. 그 결과 김서를 비롯한 여러 사람이 병들어 죽었다는 것이 결말이다. 여기서 상하층의 설화가 갈라졌던 사정을 엿볼 수 있다. 李家黨이라는 도적에 관한 이야기는 상층의 입장에서 서술되어 있는데, 하층에서는 아주 다른 말을 했을 것 같다.

 ≪고려사≫는 열전을 편찬하면서 孝友·烈女·方技 조항을 두어 뚜렷한 지위를 차지하지 못한 인물이라도 행실이 문제될 수 있으면 다루고자 했다. 그러나 도술을 부린다든가 하는 신이한 행적 때문에 관심의 대상이 될 수 있는 인물을 방기 항목에다 소개해 놓았으리라는 기대가 적중하지 않고 거기서 사실을 열거한 기사나 찾을 수 있으며, 다른 대목에서도 어디까지나 실제로 있었던 일을 정리하는 가운데 더러 설화가 보여 관심을 끄는 정도이다.

 裵氏니 文氏니 하는 여인네가 왜구에게 몸을 더럽히지 않으려고 목숨을 버렸다는 사연은 이야기 자체야 단순하지만 민족수난의 처참한 현장을 나타내준다는 데서 의미를 찾을 수 있다. 그 가운데 배씨 이야기는 李崇仁이<裵烈婦傳>을 써서 널리 알렸다. 그런가 하면, 효우대목에 들어 있는 金遷이라는 사람이 겪은 일은, 실화로 볼 수 있는 요소가 적지 않게 있으면서도 파란곡절이 중첩되어 흥미를 자아낸다. 몽고병이 쳐들어와서 자기 어머니가 잡혀가자 갖은 고생을 다한 끝에 그 나라로 가서 마침내 어머니를 찾아서는 거듭되는 난관을 물리치고 모셔왔다는 사연이 납득할 수 있는 전개를 갖추고 있다.

 고려 후기에 시작되었던 특이한 설화 한 가지가 李穀의 강원도 금강산 기행문<東遊記>에 언급되어 있다. 이곡은 胡宗旦이 사방을 돌아다니며 비문을 갉아버리고, 사찰의 종 같은 것들을 못쓰게 만들었다는 이야기를 들은 바 있었는데, 현지에서 그 증거를 확인할 수 있었다고 썼다. 호종단은 예종 때인 1110년대에 중국으로부터 고려에 와서 벼슬을 하고 귀화한 사람으로, 이야기에 나타난 바와 같은 짓을 했을 까닭이 없다. 그런데도 200년 정도의 세월이 흘러 충정왕 원년(1349)에 쓴 글에 그런 내용이 상당한 신빙성을 가진 듯이 서술되어 있으니, 배후에 숨은 의미가 무엇인지 궁금하지 않을 수 없다.≪東國輿地勝覽≫을 보면, 제주도 祀廟條에서 말하기를, 호종단이 제주도에서 땅의 정기를 누르고 돌아가는데 한라산 산신의 아우가 매가 되어 돛대 머리로 날아오르니 배가 파선되어 죽었다는 이야기가 전한다고 했다.≪동국여지승람≫을 간행한 해는 조선 성종 17년(1486)이다. 그 사이에 口傳이 이렇게까지 변한 것을 근거로 삼아 원래 의미를 거슬러 짐작할 수 있다.

 巫歌의 모습이 역사서에 남아 있으리라는 기대는 애초에 가질 수 없을 것 같지만, 고려 후기에는 특이한 사태가 조성되어 그렇지 않다. 신유학이 등장하면서 무속을 완강하게 배격하려는 운동이 일어났고,≪고려사≫를 편찬할 때 무속의 폐해를 비판하는 것과 함께 이러한 운동을 평가하는 데 힘쓰자고 필요한 사례를 여럿 들었기에, 뜻밖에도 그런 쪽에 이용할 만한 자료가 있다. 더구나 일반 민중은 난세를 맞이하여 소망을 풀어줄 구원자의 출현을 기대했기에 제석이나 미륵으로 자칭하는 무당 또는 승려가 거듭 출현해 민심을 장악했다. 서로 다른 방향에서 세상을 구하겠다는 구세주 무당과 신유학 강경파 사이의 충돌이 심각히 벌어졌다.

 李奎報는 무당을 못마땅하게 여기며,<老巫篇>이라는 長詩를 남겼는데, 거기 나타나 있는 굿의 모습도 이와 같은 추측을 뒷받침해 준다.

여자는 무당, 남자는 박수가 되어서는,

‘내 몸에 신이 내렸다’고 스스로 일컫지만,

내가 들으니 우습고 서글플 따름이다.

굴 속에 든 천 년 묵은 쥐가 아니라면,

틀림없는 숲속 꼬리가 아홉되는 여우일세

나무를 얽어 다섯 자 남짓한 감실을 만들어

입버릇처럼 스스로 제석천이라 하지만,

제석천황은 본래 육천 위에 있거늘

어찌 네 집에 들어가 누추한 구석에 머물 것이냐

 

女則爲覡男爲巫

自言至神降我軀

而我聞此笑且吁

如非穴中千歲鼠

當是林下九尾狐

緣木爲龕僅五尺

信口自道天帝釋

釋皇本在六天上

肯入汝屋處荒僻

 (李奎報,≪東國李相國集≫전집 권 2, 古律詩, 老巫篇並序).

 시에 앞서서 序를 써서, 이웃에 늙은 무당이 있어 날마다 많은 사람을 모아 굿을 하니 견딜 수 없었는데, 나라에서는 명을 내려 서울 밖으로 내몰으니 기쁘다 하고, 그런 무리는 모두 없어져야 한다는 생각에서 이 시를 짓는다고 했다. 그런데 비판하느라고 쓴 시에서 굿하는 모습이 확인된다. 인용하지 않은 대목까지 살펴보면, 무신의 그림을 걸어놓고 야단스러운 분장을 하고, 작두를 타기도 하는 것이 거의 다 후대의 무속과 다름이 없으니, 무가의 가짓수나 사설도 크게 변하지는 않았으리라 짐작할 수 있다.

 다음 시기에 이르러서 문제가 된 사례들은, 앞에서 든 일엄의 경우와 상통하는데 탄압이 심해졌다. 충렬왕 때 공주에 지방관으로 나간 沈言昜이 무당을 다스렸다는 이야기다. 즉 錦城大王으로 일컬어지는 巫神이 하강해서 강신무가 생겨나게 했고, 무당은 어느 남자와 간통하고 함께 上國에 간다고 했으며, 따르며 섬기는 무리가 고을마다 가득했다는 사건이 보인다. 安珦이 상주에 가서 무당을 다스리고, 禹倬이 영해에 부임하자 八鈴神이라고 하는, 방울로 상징되는 무신의 사당을 헐어 없앴다는 것은 신유학을 정착시키면서 무속에 대한 투쟁이 더욱 완강하게 전개된 사정을 말해준다. 그 밖에도 상소를 올리거나 하며 무속을 배격한 자료에서 당시의 상황을 더욱 구체적으로 알아볼 수 있으나 긴요하지 않기에 구체적인 검토는 하지 않겠다.

 비슷한 사례가 여럿 더 있지만, 가장 주목할 만한 것은≪고려사≫ 權㫜傳에 딸려 있는 權和의 대목에 나와 있다. 권화는 權近의 형인데, 우왕 때 청주목사가 되어 妖民 伊金을 처단했다. 이금은 고성 출신으로, 미륵불이라고 자칭하면서 민심을 선동해, 지나는 고을마다 수많은 신도를 모이도록 하여 청주에 이르렀다가 권화에게 잡혔다. 이금에 관한 기사는≪고려사≫ 鄭道傳의 열전에서도 찾을 수 있어 참고가 된다. 권화가 맡아서 처단할 때까지 이금이 사방을 다니며 했다는 말이 남아 있기에 들어보기로 한다.

나는 석가부처를 불러올 수 있느니라.

신령에게 빌고 제사를 올리는 자,

쇠고기·말고기를 먹는 자,

재물을 사람들에게 나누어 주지 않는 자는

누구나 죽으리라.

내 말을 믿지 않으면

삼월이 되자 해와 달이 모두 빛을 잃으리라…

내가 손을 쓴다면

풀에서 푸른 꽃이 피어나고,

나무에 곡식이 열리리라.

한 번 심어 두 번 거두기도 하리라

내가 산천의 신령들을 보내면

왜적을 잡을 수 있으리로다.

 이금을 무당이나 승려라 하지 않고,「요민」이라고만 했다. 이금이 기존의 신앙을 오히려 타파하고 나선 예언자이고 구세주임을, 스스로 했다는 말에서도 알아볼 수 있다. 자기는 석가를 불러올 수 있다고 했으니, 석가보다 높은 자리에 있다는 말이다. 자기가 아닌 다른 신령에게 빌고 제사를 올리면 징벌을 받는다고 했다. 무당들도 다른 신령에게 빌고 제사를 올리면 징벌을 받는다고 했다. 무당들도 이 말에 따라 다른 신들을 버리고 이금을 받들었다고 한다. 위에서 인용한 바와 같은 예언은 예사말로 하지는 않았을 것이다. 곡조를 붙여 노래로 읊어야 높이 숭앙될 수 있는 위엄을 차리고, 신령스러운 분위기를 조성할 수 있었을 것이다. 그래서 한문으로 남아 있는 말을 노래 형태로 되돌려서 풀어 보았다.

 고려시대의 연극에 관해서는 자세하게 알 수 없다. 국가에서 공연하는 歌舞百戱에는 연극이라고 할 것이 포함되지 않았던 것 같다. 연극은 민간연희로 전승되고 창조되었을 듯하다. 민간연극의 모습을 나타내주는 소중한 자료를≪고려사≫ 廉興邦傳에서 찾을 수 있다. 염흥방은 혹독한 수탈을 일삼은 벼슬아치였는데, 어느 날 길거리에서 어떤 사람이 優戱를 하면서 세력이 대단한 집 종이 백성을 괴롭히며 소작료를 거두는 장면을 보고서도 뜻하는 바를 알아차리지 못하고 즐거워하기만 했다는 것이다. 간략한 기록이나 길거리에서 하는 민간연극이 있었음을 입증해 줄 뿐만 아니라, 풍자의 수법을 사용했다는 증거도 갖추고 있다. 염흥방은 자기와 같은 무리에 대한 반감을 나타내는 연극을 보면서도 뜻하는 바를 알아차리지 못했다고 하니, 겉 다르고 속 다른 풍자적 수법을 택하지 않고서야 그럴 수 없다.

 기록에는 전혀 남아 있지 않은 민간연극의 더욱 깊은 층위는 농촌마을에서 전승되는 탈춤이었을 것이다. 후대의 자료를 통해서 그 예를 찾아보자면, 경북 안동군 河回마을의 탈춤을 주목할 필요가 있다. 이 마을에는 고려 중엽까지 許氏, 그 후에는 安氏, 조선 초기부터는 柳氏가 살았다고 하는데, 지금까지 보존된 탈은 허도령이 만들었다 한다. 평소에는 마을 신당에 모셔 놓고 신을 나타낸다고 숭상을 하고, 탈춤을 출 때는 꺼내 쓴다. 그 중 양반·선비·중·이매 등의 탈의 경우, 만든 수법을 보아도 무척 오래 되었으리라고 인정된다. 대사에도 높은 벼슬을 ‘門下侍中’이라고 하는 부분이 있는데, 이는 고려시대의 용어이다. 이런 근거에서 하회탈춤의 역사는 거슬러 고려 후기까지 올라간다고 할 수 있다.

 하회탈춤 같은 것은 농사가 잘되게 하기 위해 마을사람들이 정기적으로 거행하는 마을굿에서 유래했다. 원래는 마을 수호신이 하강했다는 것을 나타내기 위해서 탈을 쓰고 춤을 추었었는데 그런 관습이 미처 청산되지 않은 채 탈이 양반을 풍자하고 하층민의 생활을 문제삼는 데서 함께 쓰여서, 굿에서 극으로의 이행을 입증해 주고 있다. 마을굿에서 유래하여 굿의 한 절차로 공연된 연극은 아주 오래 전부터 있었으리라고 생각된다. 물론 고려 후기에도 전국적으로 널리 분포되었으리라고 상상해 볼 수 있으나, 그 이상의 증거는 없다. 어쩌면 고려 후기에 이르러서 농촌탈춤이 지배층에 대한 반감을 나타내고 풍자를 하려는데 뚜렷한 진전을 보였으리라고 볼 수도 있지만, 그것은 추정으로 그칠 수밖에 없다.

 우리 민속극은 탈춤과 꼭두각시놀음으로 이루어져 있다. 이른 시기부터 그 둘이 구비되었으리라고 짐작되고, 고려의 꼭두각시놀음도 행방을 추적해 볼 만한데, 마침 적절한 자료가 발견된다.≪高麗史節要≫를 보면 의종 17년(1163) 2월에 송도 거리에서 꼭두각시놀음인 듯한 놀이를 벌이더라고 한 기사가 있다. 두 패로 나뉘어서 풀각시 같은 것을 만들어서 비단옷을 입히고, 계집종도 꾸며 서로 재주를 다투니 구경꾼들이 잔뜩 모여들었다는 것이다. 그러나 대사까지 갖추었는지는 알 도리가 없다. 그런가 하면, 이규보의 시에서는 의심할 바 없이 꼭두각시놀음을 보고 지은 다음과 같은 시가 전한다.

조물주가 사람 놀리기를 꼭두각시처럼 하는데,

달인은 꼭두각시를 제 몸인 듯 보는구나.

인생살이는 꼭두각시놀음과 한가지라,

끝내 누가 옳고 누가 그르다고 하겠느냐.

위아래 보고, 찡그리고 펴며, 신체의 미묘함 갖추니,

누가 마음의 장인이라 하늘 재주를 빼앗았는가

사람도 기운 하나로 꿈틀거리며 살아가다가

기운 빠지면 꼭두각시놀음 마친 것과 같게 되나니.

 

造物弄人如弄幻

達人觀幻似觀身

人生幻化同爲人

畢竟誰眞復匪眞

俯仰嚬伸具體微

孰將心匠奪天機

人緣一氣成蚩蠢

氣出還同罷幻歸

 (李奎報,≪東國李相國集≫ 후집 권 3, 古律詩 觀弄幻有作).

 시에 나타난 바를 정리하면, 꼭두각시는「幻」이라고 하며 꼭두각시놀음은「弄幻」이라고 하고, 놀이꾼은「巧人」이라 했다. 이규보가 관심을 가지고 살핀 바는 놀이꾼의 재주가 놀랍다는 것이다. 꼭두각시가 움직이는 모습이 하나하나 교묘하다고 했으며, 다른 시에서는 “단청을 모았다가 순식간에 거두어버리네”라고 하여, 후대의 꼭두각시놀음에서 절을 짓고 허는 장면 같은 것을 묘사하면서 그 재주에도 감탄했다. 그러나 연극적 내용에 관해서는 아무런 언급이 없고, 인생살이도 생각해 보면 꼭두각시놀음과 다름없다는 말만 하고 말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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