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신편 한국사
  • 고려 시대
  • 21권  고려 후기의 사상과 문화
  • Ⅱ. 문화의 발달
  • 4. 역사학
  • 1) 각훈의≪해동고승전≫
  • (1)≪해동고승전≫의 편찬

(1)≪해동고승전≫의 편찬

 ≪海東高僧傳≫은 고종 2년(1215) 무렵 화엄종 승려 覺訓이 왕명을 받아 편찬한 우리 나라 고승들의 전기이다.0454)≪海東高僧傳≫에 관한 연구는 다음과 같은 글이 있다.
黃浿江,<海東高僧傳>(≪新羅佛敎說話硏究≫, 一志社, 1976).
金相鉉,<海東高僧傳의 史學史的 性格>(≪藍史鄭在覺博士古稀記念東洋學論叢≫, 高麗苑, 1984).
金炯佑,<海東高僧傳에 관한 再檢討>(≪南都泳博士華甲紀念史學論叢≫, 太學社, 1984).
金承鎬,<僧傳의 敍事體制와 文學性의 檢討>(≪韓國文學硏究≫10, 東國大, 1987).
章輝玉,≪海東高僧傳硏究≫(民族社, 1991).
현재 그 일부인 流通篇 2권만이 전해지고 있으며, 전체 권수나 편명 등에 관해서는 알 수가 없다.

 오늘날 전하고 있는≪해동고승전≫ 2권은 삼국시대 고승들의 불교유통에 관한 사실을 전하는 중요한 자료인데, 본문 가운데 “順道가 고구려에 들어올 때로부터 지금까지 844년이 지났다”고 한 기록에 의거해 그 편찬시기를 고종 2년경으로 추정하고 있다. 이는 金大問의≪高僧傳≫이 쓰여졌던 시기로부터 대략 500여 년 이후에 해당한다. 이 때문에 500여 년 동안의 역사적 공백을 메워야 했을 뿐 아니라, 불교 자체의 입장이나 국가적 견지에서도 새로운 시각과 체계적인 서술에 의한 고승전의 편찬이 요구되었을 것인데, 이것이 바로≪해동고승전≫ 편찬의 일차적 동기로 생각된다.

 ≪해동고승전≫이 편찬되기 70여 년 전에는 왕명에 의해≪三國史記≫가 쓰여진 바 있다. 유교사관을 토대로 편찬된≪삼국사기≫에는 불교사에 관한 기록이 소략했다. 더구나 불교수용 이래 많은 사람들이 이를 신봉하고, 또한 불법이 끊임없이 전해졌다고 인식하고 있던 입장에서 보면, 고승전의 정리는 당시의 중요한 과제가 아닐 수 없었을 것이다. 그리고≪해동고승전≫이 비록 왕명에 의해 편찬되었지만, 여기에는 기록을 남겨 후세에 전하기를 원했던 각훈 자신의 역사의식이 반영되어 있다.

 각훈은 “불교가 이미 중국 前秦으로부터 우리 나라에 들어와 행해졌기에 송·제시대에 응당 호걸들이 많이 있었을 것이고, 중국으로 가서 불법을 물었던 자 또한 적지 않았을 것임에도 당시의 사가들이 기록을 남기지 않았음은 한이 될 뿐”이라고 애석하게 여겼듯이 그는 우리 나라 불교사편찬의 필요성을 절감하면서 이름을 잃어버린 고구려 승려에 대한 기록을 남기고 있다. 또한 그는 인도에의 求法에 나섰던 승려들의 전기를 서술하면서 “비록 이역 땅에서 몸을 버리고 돌아오지 못했지만, 그 공명은 뛰어남이 이와 같으니, 어찌 그 이름을 죽백에 올려 후세에 보이지 않을 것인가”라고 하기도 했다. 이처럼 각훈은 역사기록의 중요성을 잘 인식하고 있었으므로 고승전을 편찬하라는 왕명은 그 뜻을 펴는 좋은 계기가 되었던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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