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國史≫는 공민왕 6년(1357) 李齊賢이 白文寶·李達衷 등의 사관과 함께 집필을 분담하여 편찬하기로 한 紀傳體의 고려시대사이나 완성되지 못하였다. 게다가 집필된 원고마저도 홍건적의 침입으로 대부분 분실되고 이제현이 집필한 부분만이 남아≪高麗史≫ 편찬에 이용되었다. 그러나 오늘날에는≪국사≫를 편찬할 때 쓴 史贊과 宗室傳序 및 諸妃傳序가 전해지고 있을 뿐 역사서술 부분은 남아 있지 않다.
≪국사≫ 편찬에 앞서 이제현은 충목왕 2년(1346)에 왕명에 따라 安軸·李穀·安震·李仁復 등과 함께 閔漬의≪本朝編年綱目≫을 증수했고, 충렬·충선·충숙왕의 三朝實錄 편찬에 참여하기도 하였다. 뿐만 아니라 충혜왕 3년(1342)에는 曺頔잔당의 횡포를 꺼려 정치일선에서 물러나 있으면서≪櫟翁稗說≫을 편찬한 바 있기도 하다. 하지만 그는 완전한 당대사가 없음을 늘 유감으로 여겨왔던 것 같다.
이제현은 일찍부터 國史가 갖추어지지 않았다는 것을 유감으로 여겨왔다. 그리하여 白文寶·李達衷과 함께 紀年傳志를 만들기로 하였다. 이리하여 이제현은 태조로부터 숙종에 이르기까지, 백문보와 이달충은 예종 이하를 편찬하기로 하였는데, 백문보는 겨우 예종·인종의 두 왕조에 대한 원고를 필하고 이달충은 원고를 착수하지도 못하였다. 그러나 왕이 남방으로 피난할 때에 모두 흩어져 없어지고 오직 이제현이 편찬한 太祖紀年만이 현존한다(≪高麗史≫ 권 110, 列傳 23, 李齊賢).
이와 같이 관직에서 물러나 있던 공민왕 6년 71세의 이제현은 紀年傳志, 즉 기전체의 당대사인 고려국사를 계획하고 그 스스로는 태조로부터 숙종 때까지를, 백문보와 이달충은 예종 이하를 분담하였다. 비록 관직에서 물러나 있던 그였지만 공민왕 6년이란 공민왕의 반원정책을 추진한 이듬해였다는 사실에서 원의 간섭 이전 고려시대사를 정리하여 고려왕조의 재건을 희망한 것은 아닌가도 싶다.0582) 卓奉心,<李齊賢의 歷史觀-그의 史贊을 중심으로->(≪梨花史學硏究≫17·18, 1988), 332쪽.
한편 왕조가 아직 멸망하지 않았는데도 왕조사의 정리를 서두른 것은 아마도 당시의 사회가 불안하였으므로 實錄의 유실을 염려한 데서 나온 것으로 보기도 하였다(鄭求福,<李齊賢의 歷史意識>,≪震檀學報≫51, 1981 ;≪高麗時代 史學史硏究≫, 西江大 博士學位論文, 1985). 하지만 이 국사 편찬계획은 이제현 외에는 책임을 완수하지 못하였다. 백문보는 겨우 예종·인종의 두 왕대를 초했고, 이달충은 역사서술을 시작도 하지 못한 상태였는데 그마저 홍건적의 침입으로 집필된 대부분의 원고는 흩어지고 다행히 이제현의 원고가 남아서≪고려사≫ 편찬에 자료가 되기도 했다. 따라서 이제현의 또 하나의 저서처럼 보이는≪史略≫은≪국사≫의 편찬을 위해 그가 분담해서 집필했던, 태조로부터 숙종 때까지의 草稿에 붙였던 이름인 것으로 생각된다. 물론≪국사≫와≪사략≫의 관계가 명확한 것은 아니다.0583) 邊太燮은 “史略은 紀年傳志와 동일한 것이거나 아니더라도 그의 초고를 가지고 약술한 史書일 것”이라고 한 바 있다(邊太燮,≪「高麗史」의 硏究≫, 三英社, 1982, 163쪽). 그러나 “이제현이≪국사≫를 편찬하여≪사략≫이라 이름붙여 흥망성쇠의 대개를 약술하였으니 당세의 귀감을 삼고자 함이었다. 초고를 갖추었지만 책이 완성된 것은 아니었다”는 실록의 기록과0584)≪世宗實錄≫ 권 80, 세종 20년 3월. “≪사략≫이 肅王에 그쳤고 소략했다”는 평가0585) 鄭 摠,<高麗國史序>(≪東文選≫ 권 92, 序). 등으로 이 두 사서의 연관성을 짐작할 수 있다.
이 밖에도 그의 사학과 관련있는 저작으로<忠憲王世家>,<威烈公金公行軍記> 등이 전해지고 있다.0586) 鄭求福, 앞의 글. 따라서 고려 후기 최고의 지성이며 역사가인 이제현에 의해 주도된≪국사≫의 성격과 그 역사인식을 살피기 위해서는 비록 한계가 있으나 현재 남아 있는 사료 즉,≪국사≫를 편찬할 때 쓴 史贊을 중심으로 그의 역사인식을 짐작해 보지 않을 수 없을 것 같다.0587) 李齊賢의 史論은 왕의 世家에만 붙여졌다는 점과 각 왕의 정치를 총평한 것만이 남아 있기 때문에 그의 사상을 연구하는 데에는 한계가 있다. 따라서 고려왕조사에 대한 그의 인식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이 사론 이외에<忠憲王世家>와≪櫟翁稗說≫기록을 보완적으로 이용하여야 할 것이다(鄭求福, 앞의 책, 198쪽).
사찬이란 각 왕의 정치적 업적을 평하는 총평으로 이제현이 쓴 태조로부터 숙종에 이르는 15왕에 대한 사론은≪고려사≫에 14편,0588)≪高麗史≫ 숙종 세가에는 이제현의 贊이 없다. ≪高麗史節要≫에 17편,≪益齋亂藁≫에 15편0589) 李齊賢,≪益齋亂藁≫ 권 9 하, 史贊.이 전해지고 있다.0590) 李齊賢의≪益齋亂藁≫와≪高麗史節要≫의 사찬을 비교하면 내용에 약간 차이가 있는데, 특히 성종과 현종에 대한 찬에서 차이가 있다. 이를 내용별로 구분하면 ① 왕실기강에 관한 기사를 포함하여 왕위계승에 관한 사론 ② 역대 왕의 치적 및 군신과의 관계에 대한 사론 ③ 거란과의 관계를 비롯한 대외관계에 관한 사론 ④ 기타 토지 및 과거제도와 불교관계에 관한 사론이 단편적으로 들어 있다.0591) 이하의 李齊賢의 역사인식에 대하여는 주로 卓奉心, 앞의 글 및 鄭求福, 앞의 책을 주로 참고하여 서술하였다.
이제현의 사찬 가운데 왕위계승에 관한 기사가 실려 있는 것은 태조·혜종·정종·성종·목종·문종·헌종·숙종에 대한 찬이다. 특히 그는 태조 왕건이 포악한 궁예 밑에 있으면서도 민심이 기울어 將士들의 추대를 받아 왕위에 올라 고려를 창건한 사실을 宋太祖가 後周의 선위를 받은 것에 비유하여 고려 태조의 건국과 송의 건국을 동일시하여 정통성을 부여하고자 하였다.0592)≪高麗史≫ 권 2, 世家 2, 태조 25년 말미 李齊賢贊曰. 그리고 혜종대 왕위계승을 둘러싼 분쟁에 대하여는 그 책임을 신하 즉, 王規에게 돌림으로써0593)≪高麗史≫ 권 2, 世家 2, 혜종 2년 9월 말미 李齊賢贊曰. 왕권을 손상시키려 하지 않았다. 특히 문종의 경우를 예로 들면서 순조로운 왕위계승을 하였기 때문에 전후 80년 동안 국가가 눈부신 발전을 할 수 있었다고 보았다.0594)≪高麗史≫ 권 9, 世家 9, 문종 37년 7월 말미 李齊賢贊曰.
그런데 왕위계승의 방법에 있어서는 형제상속보다는 부자상속을 보다 정통적인 것으로 인식하였다. 그러나 그 계승방법의 정당성보다는 왕실의 안정을 우선적으로 중시하여 강력한 왕권을 중심으로 한 국가질서의 회복을 열망하였다.0595)≪高麗史節要≫ 권 7, 숙종 10년 10월 말미 李齊賢贊曰.
이러한 왕권강화에 대한 인식은 이제현이 살던 당시의 여원관계와 무관하지 않은 듯하다. 즉 충선·충숙·충혜·충목왕대에 가해진 고려왕의 교체와 입조요구 및 吐蕃으로의 유배와 같은 원의 횡포를 체험한 그로서는 하늘로부터 정통성을 부여받은 고려왕실의 왕권확립과 이에 의한 왕실기강의 확립과 왕조의 지속을 갈망하지 않을 수 없었을 것이다.
또한 이제현은 사찬을 통하여 역대 왕들의 치적을 평가함으로써 유교적 왕도정치이념을 강하게 드러내고 있었다. 군왕의 덕정에 대한 평으로는 태조·성종·현종·덕종·문종·순종·선종의 찬이, 군신과의 관계를 통한 통치 결과를 평한 것은 혜종·광종·성종·경종에 대한 찬이 있다. 이제현이 주장한 유교이념에 입각한 왕권의 덕목으로는 첫째 浮誥를 버리고 독실을 힘쓰며, 둘째 옛것을 좋아하고 마음으로 백성을 새롭게 하며, 셋째 정치에는 게으름과 조급함을 경계하며, 넷째 몸소 행하고 마음속으로 깨달아 덕화가 남에게 미치게 할 것을 제시하였다. 즉 “인군이 천명만 믿고 욕심을 멋대로 부려 법도를 파괴하면, 비록 나라를 얻었을지라도 반드시 잃고 만다. 그러므로 군자는 세상이 다스려졌을 때에 장차 요란하게 될까 생각하고, 편안할 때에 장차 위태하게 될까 생각하여 끝을 삼가하기를 처음과 같이하여 일으켜 준 천명을 보답하는 것이다”0596)≪高麗史節要≫ 권 3, 현종 22년 말미 李齊賢曰.라고 하며, 왕위에 오른 후에 정치를 잘하려는 노력이 왕위 유지에 중요한 요인임을 강조하였다. 이러한 강조는 비록 그의 직접적인 표현은 없으나 왕위를 지키지 못한 충혜왕과 충정왕의 경우를 직접 체험한 것과 관련이 있을 듯하다.
국가통치를 군주가 혼자서 할 수 없으므로 군주는 신하를 발탁해 써야 하는데, 이제현은 인재의 발탁이 정치에 아주 중요한 것임을 강조하고 있다. 그는 광종의 경우를 들면서 광종이 과거제를 실시하여 선비를 뽑은 일 등 즉위 초에 베푼 선정에도 불구하고 훈신들에 대하여 잔혹한 살상을 가한 군왕으로 변하게 된 것은 임금을 선한 길로 이끌지 못한 신하의 잘못 때문이라고 비판하였다.0597)≪高麗史節要≫ 권 2, 광종 26년 말미 李齊賢贊曰. 이러한 이제현의 입장은 경종찬에서도 나타난다. 그는 경종이 시행한 토지제도에서 폐단이 일어나게 된 것은 당시 신하 가운데 성현의 말로써 임금을 독려한 자가 없었기 때문이라고 파악하였다.0598)≪高麗史節要≫ 권 2, 경종 6년 7월 말미 李齊賢贊曰.
이처럼 이제현은 왕권의 존엄을 강조하면서 덕정의 효과는 그를 보필하는 신하의 자질에 따라 다르게 나타난다고 보았다. 이러한 그의 君臣觀은 당시 원의 위협을 받고 있던 왕권을 보호하기 위하여 왕을 지고한 존재로 부각시키고, 신하는 인군을 정성으로 섬겨야 한다는 소극적인 군신관을 남기게 되었다고 평가받고 있다. 이러한 소극적인 군신관은 국가의 주권이 상실되고 瀋王派의 국왕폐립 음모가 끊이지 않았던 충숙왕∼충목왕대의 시대적 상황을 체험한 그로서 고려국왕의 수호가 곧 국권의 수호로 인식되었기 때문으로 보인다.0599) 金泰永,<高麗 後期 士類層의 現實認識>(≪創作과 批評≫ 44, 1977), 331쪽.
다음, 이제현의 대외관이 나타나 있는 사찬은 태조·성종·덕종·정종찬으로 주로 대거란과의 관계가 대부분이다. 이는≪국사≫ 편찬에서 이제현이 담당한 부분이 대거란과의 관계가 복잡하게 나타났던 시기였기 때문으로 보인다. 이제현은 충선왕과의 대화를 통하여 태조가 거란에서 보낸 낙타를 굶겨 죽인 것은 오랑캐의 간사한 계책을 꺽으려 한 것이거나, 혹은 후세의 사치를 막으려 하였거나 어떤 은미한 뜻이 있었을 것이라고 하면서 충선왕으로 하여금 그 본뜻을 알아낼 것을 권하고0600)≪高麗史≫ 권 110, 列傳 23, 李齊賢. 있다. 또한 태조가 후삼국을 통일하기 이전부터 여러 차례 서도에 가서 북변을 순수한 의도는 고구려의 옛 영토를 다 석권하기 위함이었다고 논하였다.0601)≪高麗史≫ 권 2, 世家 2, 태조 25년 말미 李齊賢贊曰. 태조가 유훈으로 남긴 회복에 대하여 주목한 이제현은<東明王篇>에 보인 李奎報의 고구려 계승의식을 비롯하여≪帝王韻紀≫와≪三國遺事≫에서 드러낸 자기 역사에 대한 자부심과 궤를 같이하는 것이라고 평가할 수 있다.
이제현의 사찬 가운데 대외관이 가장 잘 나타난 것은 靖宗贊이다. 정종에 대한 찬은 모두 대외관계 기사로 되어 있다. 태조로부터 정종에 이르는 대외정책을 개괄하면서 태조가 거란에 대하여 욕심이 많고 사나우므로 깊이 경계하고자 그랬을 것이라 하여 崔承老의「五朝政績評」과 같은 입장을 나타내고 있다. 하지만 현종이 거란과의 우호를 파기한 사실에 대하여는 최승로의 환난을 미리 방지하는 조치로 평가한 것과 달리 바람직한 계책이 아닌 것으로 간주하고 있었다. 이에 대하여 최승로의 입장을 자주적인 외교관으로, 이제현의 입장을 사대적인 대외관으로 구분짓는 경우가 있지만 이는 시대적 상황을 고려하지 않은 결과로 보인다. 즉 거란의 침입을 받기 이전에 살았던 최승로의 입장과 원의 정치적·경제적 간섭하에 살았던 이제현의 입장은 다르게 나타날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 따라서 그는 거란과 단교해야 한다는 강경론보다는 화친을 국가안녕의 기본조건으로 파악하였으며 원만한 관계 유지만이 고려를 지킬 수 있는 최선의 방책이라고 생각하게 되었던 것이다.
그렇다고 해서 거란을 정통으로 인정하고 있는 것은 아니었다. 어디까지나 그는 송을 정통왕조로, 요와 금을 오랑캐로 인식하였다. 반면 그가 접했던 원에 대해서는 고려와 마찬가지로 本朝로 인식하고 고려가 원과 同文의 나라가 된 것을 다행스럽게 여기고 있었다. 이렇게 이제현의 대외관에는 자주적인 면과 현실유지를 위한 명분 위주의 소극적인 면이 병존하고 있는데, 이는 나라를 유지하기 위한 평화적인 외교관계 정립의 중요성을 강조하였기 때문이었다. 아울러 고려의 문화가 중국과 대등한 나라라는 문화의식을 표방함으로써 북방민족의 낮은 문화에 대한 우월감을 강조하고 있었다. 또한 고려의 문화에 대한 자존의식은 왕조가 400여 년이나 지속되었다고 역사의 유구성으로도 확인시키고 있었다. 그는 吐蕃에 유배되어 있던 충선왕을 구제하기 위하여 올린 상소문이나, 立省策動에 반대하여 올린 상소문에서도 한결같이 고려왕조가 개국 후 400여 년이나 되었다는 점을 누누이 강조하였다.0602)≪高麗史≫ 권 110, 列傳 23, 李齊賢.
끝으로 그는 왕들의 지나친 불교신앙을 비난하였다. 물론 그는 개인적으로 불교와 관련을 맺고 있었듯이 불교신앙 자체를 부정한 것은 아니다. 단지 불교가 일반 백성에게 끼칠 수 있는 현실적 병폐를 지적하고 있었던 것이다. 왕의 지나친 불교신앙이 복을 구하는 올바른 길이 아니었다는 것과 국가경제를 위축시켰다고 보았기 때문이다.0603) 李齊賢,≪益齋亂藁≫ 권 9 하, 定王贊·文王贊.
이제현의 사찬에는 이외에도 토지제도와 과거제에 대하여 자신의 견해를 단편적으로 언급하고 있었다. 이에 대한 자세한 서술은 鄭求福, 앞의 글 및 卓奉心, 앞의 글 참조
이 글의 내용은 집필자의 개인적 견해이며,
국사편찬위원회의 공식적 견해와 다를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