반원적이고 자주적인 의식이 고조되고 있던 공민왕 이후 역사서술에 대한 관심 또한 새롭게 대두되었다. 공민왕 18년(1369)경에 정언 李詹은 史典之法에 대한 문제를 상소한 바 있다. 그는 “실록에 기록한 것이 陰晴의 日歷뿐, 선왕의 행적과 국가가 출척한 법전 등은 잃어버린 것이 많다”고 했다. 또한 “실록의 편찬에 사견이 가미됨에 시비가 엇갈려 세상에서 바로잡지 못한다”고 실록편찬의 문제를 지적하기도 했다. 그 까닭은 사신을 멀리한 때문이라는 것이다. 따라서 그는 “사신을 近侍로 하여 임금의 언동과 시행함을 모두 쓰게 하고 諸司가 사건을 갖추어 보고하여 이를 기록하게 할 것”을 간하였다. 이에 왕은 사관의 근시를 허락하였다.0654)≪高麗史≫ 권 117, 列傳 30, 李詹. 공양왕 원년(1389)에 사관 崔蠲 등은 사관제도의 개편을 건의하기도 했다. 사관의 인원이 적을 뿐 아니라, 그 품계도 낮기 때문에 궁중의 일과 묘당에서 논의한 득실에 관한 일 등을 갖추어 기록하지 못하기 때문에 사초를 충실히 기록할 수 있게 사관제도를 새로이 정비할 것을 건의했고, 이것은 곧 받아들여졌다.0655)≪高麗史≫ 권 76, 志 30, 百官 1, 春秋館 및 권 137, 列傳 50, 신우 원년 3월.
공양왕 3년 왕이 정월 경연관에서 “지금 사람들이 중국 고사만 알고 본조의 일은 알지 못하는 것이 옳은가”라고 개탄하니 鄭夢周는 “근대의 역사도 모두 편찬하지 못했고, 선대의 실록도 자세하거나 충실하지 못하니, 청하건대, 편수관을 두어 通鑑綱目을 모방해서 역사를 편수해 省覽에 대비하소서”라고 하니, 왕은 이를 받아들였다.0656)≪高麗史≫ 권 117, 列傳 30, 鄭夢周.
이상에서 살펴본 바와 같이, 고려 말에 본조사 및 실록 등에 관한 높아진 관심, 사실의 충실한 기록과 직서 등의 문제가 새롭게 제기된 것은, 무신집권기 및 원 간섭기의 역사서술에 대한 반성으로부터 가능했던 것이고, 동시에 이것은 자주의식의 발로였다고 할 수 있다. 고려 말 역사서술에 대한 이같은 새로운 관심은 통사류의 증수, 혹은 개찬에까지 미치고 있었다.
충목왕 2년(1346) 왕명에 의해 이제현 등은 민지의≪編年綱目≫을 증수한 바 있다. 고려를 원과 구별하려는 자주의식의 발로에 의해≪편년강목≫이 증수된 것이라는 견해는 일리가 있을 것이다.0657) 閔賢九,<益齋 李齊賢의 政治活動>(≪震檀學報≫ 51, 1981), 233쪽. 교서에 나타나듯이≪편년강목≫의 증수는 고려의 개국 이래로 역사를 중외에 널리 반포하려는 의도로부터 출발하였기 때문이다.
공민왕 6년 왕명에 의해 李仁復이 편찬한≪古今錄≫은 반원정책 이후의 역사서술로서 주목된다. 이것이 박인량의≪고금록≫이나 권부의≪고금록≫과 어떤 관련이 있는지는 쉽게 판단하기 어렵다. 만약 권부의≪고금록≫ 편찬이 원의 간섭 때문에 박인량의≪고금록≫에 대한 개편이었다면, 이인복의≪고금록≫ 편수는 권부의≪고금록≫에 대한 자주적 입장에서의 개편이었다고 볼 수 있다. 또한 공민왕 10년에 이색·이인복 등이 왕명에 의해≪本朝金鏡錄≫을 증수한 것은 주목된다. 정가신의≪본조금경록≫은 충렬왕의 명으로 민지 등에 의해≪세대편년절요≫로 증수된 바 있는데도 불구하고, 정가신이 그것을 다시 증수한다고 하는 것은≪세대편년절요≫에 대한 불신이었다고 생각해 볼 수도 있기 때문이다. 아무튼 고려 말에 이르러 역사서술에 대한 새로운 인식이 있었고, 이것은 자주의식과 무관하지 않다고 생각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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