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려가 공복제도 실시로 옛 복제를 정비했다는 기록은 광종 7년에 처음 나타난다. 이 해 後周의 사신을 수행했던 雙冀의 진언을 받아들인 것이다. 역시 쌍기가 진언했던 과거제도를 시행하기 2년 전의 일이니, 광종연간에 활발했던 國制정비의 일환이었던 것이다. 그러나 이 때 정비한 공복제도가 어떤 것인지는 알 수 없고 실제 시행되었던 것 같지 않다. 광종 11년에 다시 백관의 공복을 정했다는 기록이 보이기 때문이다.
이 때의 공복은 관료의 직급에 따라 옷의 색깔을 구분하는 4색공복제도였다.1144)≪高麗史≫ 권 2, 世家 2, 광종 11년 3월 및 권 72, 志 26, 輿服, 冠服 公服 광종 11년 3월. 4색공복제도는 신라 법흥왕 때 당에서 들여온 제도로, 중국에서는 五代를 거쳐 송으로 그대로 이어지고 있다. 이를 통해 고려 초기 공복제도 정비의 성격을 짐작할 수가 있는데, 기록상 고려의 복식제도는 의종 때 平章事 崔允儀가 편찬한≪詳定古今禮≫로 집대성되는데 그 내용은 송나라 제도를 따른 것이다.1145)≪高麗史≫ 권 72, 志 26, 輿服, 冠服 公服 의종.
≪三國史記≫ 권 33, 雜志 2, 色服.
그러나 이와 같은 공복제도는 事大의 典禮的인 뜻이 강하기 때문에, 그것이 송과 요·금 등의 북방왕조, 이들과 고려의 관계가 복잡다단했던 당시의 동북아 국제정세의 한 단면을 보여주기도 한다.1146) 중국을 중심한 국제질서는 冊封과 朝貢의 服屬과 附庸의 상징적인 관계로 이루어지며, 이 때 복제의 襲用은 왕조의 정당성을 강화하는 구실을 한다. 그렇기 때문에 宋과 遼·金은 다투어 고려에 官服을 賜與했으며,≪高麗史≫에 의하면 靖宗 9년(1043) 이후 169년 사이 15회에 이르고 있다. 이 사실은 당시 고려의 대외관계가 매우 복잡하고 어려웠음을 드러내고 있다(柳喜卿,≪韓國服飾史硏究≫, 梨花女大 出版部, 1977, 138∼140쪽). 그러나 실제에 있어서는 그 복제가 어느 정도 실행되었는지 확언할 수 없다. 더구나 그 제도가 궁중과 상층지배계급 복식에 어느 정도 영향을 미쳤다 하더라도, 대다수 서민의 복식생활과는 무관했을 것이 당연한 이치이다.
이 점에서 여행자의 관찰기록인≪高麗圖經≫은 이 시대의 실제 복식생활을 말해주는 소중한 자료가 된다.≪고려도경≫에 나타나는 왕과 백관의 공복은≪고려사≫ 輿服志의 기록과 일치하고 있어, 고려가 송나라 제도를 받아들인 실상을 보여준다 하겠으나, 그 밖의 서민 생활복의 다양한 언급은1147) 柳喜卿,<高麗圖經의 服飾史的 硏究>(≪增補 韓國服飾史 硏究≫) . 고려사람들의 실제적인 복식생활이 상고 이래의 國俗을 잇고 있음을 시사한다.
예컨대≪고려도경≫은 국왕도 한가히 있을 때에는 皂巾과 白紵布를 입으며, 그것은 일반 서민의 차림과 다름없음을 적고 있다.1148) 徐 兢,≪高麗圖經≫ 권 7, 冠服 王服. 국왕도 공식적인 자리에서는 송제에 따라 격식을 차리지만, 사사로운 생활복은 전래의 옷을 입었다는 것이다. 또 여자옷에 대해 언급하여, 白紵衣와 黃裳을 귀천의 가림없이 입는다고 한 것이나1149) 徐 兢,≪高麗圖經≫ 권 20, 婦人 貴婦., 여복의 旋裙은 8폭 치마로 이를 휘둘러 입되, 그 일단을 겨드랑에 낀다고 한 것은 모두가 전래의 국속임을 알 수가 있다. 그리고 조선시대 한복의 화려한 치마 색깔과 檀園 및 蕙園의 풍속도에 보이는 치마의 풍만하고 율동적인 착장모습을 연상시키기에 족하다. 고려시대 옷에 외래의 영향이 있었다고는 하나, 삼국 이래 우리 민족의 복식전통이 고려로 이어지고, 그 전통이 다시 조선시대 한복으로 연결됨을 짐작케 하는 것이다.
이 글의 내용은 집필자의 개인적 견해이며,
국사편찬위원회의 공식적 견해와 다를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