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신편 한국사
  • 조선 시대
  • 22권  조선 왕조의 성립과 대외관계
  • Ⅰ. 양반관료국가의 성립
  • 4. 4군 6진의 개척
  • 5) 행성·읍성·진성의 축조
  • (1) 평안도·함길도·황해도의 행성축조

(1) 평안도·함길도·황해도의 행성축조

 세종대에는 압록강과 두만강을 경계로 하여 새로 넓힌 영토를 지키기 위하여 읍성과 진보에 設柵하거나 축성하는417)≪太祖實錄≫권 4, 태조 2년 8월 을유. 이외에도, 여진족의 빈번한 침입을 막고 이에 따른 부방이나 입보의 폐단을 덜기 위하여 압록강과 두만강 연변에 行城을 축조하였다.418)宋炳基,<世宗朝의 兩界行城築造에 對하여>(≪史學硏究≫18, 1980). 행성이란 적침의 주요한 교통로가 될 만한 평지나 고개를 포함하여 산등성이까지를 연결하여 가로로 지형을 따라 구불거리는 성벽을 쌓아 막은 것이다. 흔히 평지에는 석성을 쌓고 낮고 습한 데는 해자를 파거나 목책을 세우고, 높고 험한 곳은 흙을 깎아 내리고 城堡나 煙臺 등을 요소마다 세워 유사시에 대비하였다. 이와 같이 하여 만든 압록강·두만강 연변의 여러 관방을 행성 혹은 長城이라고 불렀고, 보다 후방지역의 경우 防墻으로도 표현되었다.419)≪新增東國輿地勝覽≫권 47, 江原道 伊川縣. 이민족의 침입에 대비한 행성의 축조는 이미 삼국시대부터 있었으니, 백제가 고구려의 침입에 대비하여 축조한 靑木嶺-八坤城-西海까지의 관방을 위시하여, 고구려가 쌓은 천리장성, 통일신라가 북방 국경에 쌓았던 浿江長城을 거쳐 고려시대의 천리장성 등이 그 역사적 배경이었다.420)車勇杰,<朝鮮前期 關防施設의 整備過程>(≪韓國史論≫7, 國史編纂委員會, 1980), 89∼90쪽.

 조선왕조에서는 일찍부터 명의 遼東長墻이나 만리장성을 알고 있었으며, 여진족에 대비하여 이들 중국식의 관방시설과 비슷한 시설을 만든 사정은 단순하지 않다.421)車勇杰, 위의 글, 131∼134쪽. 행성을 쌓게 된 직접적인 원인은 여진족의 잦은 국경침입에 있었다. 여진의 침입에 대하여는 역대의 전통적인 방어수단으로서의 淸野入保라는 소극적인 방어가 이루어지고 있었다. 국경지역에서는 평소의 농사를 위하여 읍성이나 진보에서 멀리 떨어진 농경지까지 왕래하였으므로 갑작스런 약탈을 당하기가 일쑤였고, 그만큼 불안함을 항상 느끼고 있었다. 또한 농사철 이외에는 보다 안전한 후방의 읍성이나 진성에 입보하였다가 다시 농사철이 되면 자기의 토지 부근에 있는 진보로 이동하여야 하였으므로, 이로 말미암아 엄청난 노동력과 시간을 낭비하는 폐단이 있었다. 이러한 폐단은 유망을 초래하였으므로 보다 안심할 수 있는 방어시설로서 아예 여진족이 침입할 수 있는 모든 통로를 차단하는 장성을 쌓아 그들과 영구히 차단하자고 하면서 엄청난 토목역사를 주장하는 인물이 나타나게 되었다.

 이리하여 입보와 부방에 따른 폐단을 덜어 변방지역 주민들의 도망을 막고, 나아가 보다 방어의 충실을 기하기 위한 조치가 계획·실행되었으니 곧 압록강과 두만강의 南岸에 대한 행성축조였다.

 행성의 축조는 세종 22년(1440) 2월에 당시의 우의정 申槩에 의하여 건의되었다.422)≪世宗實錄≫권 88, 세종 22년 5월 신묘.
≪世宗實錄地理志≫권 154, 平安道.
그는 입보에 따른 폐단을 지적하면서 고려의 북계장성 등이 외적방어

 에 효과가 있었음을 예로 들면서, 서쪽은 압록강 하류의 의주로부터 동으로는 두만강 하류의 경원에 이르기까지 장성을 쌓는다면 만세의 이득이 될 것이라고 하였다. 또 적침 요해처만을 가리어 지형에 따라 혹은 해자를 파고 혹은 목책을 세우고 혹은 돌을 쌓고, 원근을 헤아려 연대를 세워 방비한다면 야인이 침입하지 못할 것이므로, 업보의 제단이 없어져 변방의 주민들이 도망하지 않을 것이고 부방의 폐해도 차츰 없어질 것이라고 주장하였다.

 신개의 건의는 즉각 받아들여져서 병조판서 황보인이 평안·함길도도체찰사로 임명되어 변방으로 파견되어서 행성축조의 후보지를 물색하였다. 신개의 건의가 있자마자 이와 같이 급진전을 보게 된 것은 그의 정치적 비중때문도 있었겠지만, 그보다도 여진의 침입과 입보·부방의 폐단에 따른 변방지역 주민의 도망이 당시에 얼마나 중대한 문제였는지를 잘 말하여 준다.

 이 해 3월에 황보인은 서울을 나서서 7월에「沿邊備禦策 13條」를 건의하였다. 그는 제13조에서 의주·창성·벽동·이산·강계·자성·여연·갑산·길주·경성·회령·종성·경원·경흥 등 여러 읍의 防塞요해처, 즉 행성축조후보지로 124개 처를 들었다.423)≪世宗實錄≫권 90, 세종 22년 7월 기사. 황보인의 건의는 의정부에서도 긍정적인 반응을 보이고, 세종이 승인함으로써 세종 22년(1440) 가을부터 평안도 趙明干口子行城을 필두로 행성축조의 대역사가 시작되었다.424)≪世宗實錄≫권 90, 세종 22년 9월 갑인. 이로부터 황보인의 주도로 봄에는 평안도의 행성을, 가을에는 함길도의 행성을 축조하여 세종 32년 2월 세종이 서거할 때까지 11년간에 걸쳐 행성축조사업이 계속되었다. 이렇게 해서 축조된 행성으로는 평안도 국경지대의 의주행성·定寧行城·벽동행성·碧團口子行城·昌州口子行城·이산행성·渭原行城·滿浦口子行城·虞芮口子行城·조명간구자행성이 있고, 함경도 국경지대의 온성·종성·회령·갑산·삼수행성 등이 있다.

 세종대에 행성축조는 완성되지 못하였는데 그 규모는 다음과 같다.425)≪世宗實錄地理志≫권 154, 平安道 및 권 155, 咸吉道.

*평안도

의주행성:義州邑城北∼九龍淵  6,720 척

정녕행성:玉岡洞口∼獐項奉  석축 3,153척

벽동행성:小波兒松林峴∼非所里坪  15리 50보 2척 (削土 1,500척 ; 석축 14,471척 ; 삭토 8,178척)

벽단구자행성  23리

창성 창주구자행성  14리 150보

이산행성:央土里  10리 270보

위원행성:都乙漢∼朱毛老洞  4리 190보

강계 만포구자행성  14리

高山里口子行城  7리 3보

慈城 池寧怪行城:西解峴∼時反江  1리 108보
         泰日∼北邊洞口岩石  11리 56보

우예구자행성  6리 295보

여연 조명간구자행성  31리 195보

*함길도

· 穩城東 立巖에서 두만강을 소급하여 종성을 지나 회령부성 前坪에서 그친 것  200여 리

· 갑산군 池巷浦洞口東峯에서 古軍營基까지  1리 249보

· 삼수군 魚面江東口∼桑土坪  29리 239보

 구체적인 행성축조상황은≪세종실록≫에 다음과 같이 나타나고 있다.

연 대 명 칭 규 모 동원 인부 축 조 기 간
세종 23년 3월

23년 3월

23년 9월

24년 3월
24년 3월
24년 3월
24년 3월
24년 3월

24년 3월

24년 3월

25년 3월

25년 9월
25년 9월


26년 4월
27년 정월

27년 7월


28년 정월

28년 2월

28년 2월
28년 7월
28년 7월
29년 정월

29년 정월

29년 7월

29년 7월

30년 7월


30년 7월


31년 정월


32년 윤정월
조명간구자행성

벽단구자행성

온성행성

조명간구자행성
우예구자행성
지령괴구자행성
만포구자행성
고산리구자행성

온성행성

종성행성

창주구자행성

온성행성
종성행성


위원행성
자성행성

종성행성


종성행성

벽동행성

정녕행성
종성행성
회령행성
벽동행성

정녕행성

회령행성

삼수행성

회령행성


지항포행성


이산행성


의주행성
(石) 50,947척
(木) 5,807척
(石) 30,795척 6촌
   5,218척 4촌
(石) 85,205척
   46,717척
   24,110척
   10,590척
   3,090척
   15,675척
   12,619척
  
   16,970척
(土) 2,630척
   2,370척
(土) 2,630척
(石) 18,804척
(木) 2,769척
(石) 380척
(石) 19,917척
(木) 175척
(土) 2,219척
   3,598척
   5,308척
(土) 900척
(石) 24,540척
(土) 20,500척
(木) 3,680척
(石) 370척
(土) 2,537척
(石) 37,379척
(土) 8,070척
(石) 2,999척
(石) 11,834척
(土) 55,133척
(石) 14,471척
(土) 8,178척
(石) 3,153척
(土) 1,500척
(石) 8,749척
(土) 41,789척
(石) 3,050척

(石) 12,662척
(土) 17,812척
(木) 800척
(石) 3,046척

(土) 250척
(石) 7,478척
(土) 11,660척
(木) 400척
   6,720척
평안 8,390

평안 8,263

함길 15,000
강원 8,000
평안 10,000
평안 4,200
평안 300
평안 9,000
평안 300
황해 2,000
함길 5,300

   5,300

평안 3,000
황해 6,000
함길 8,000



평안 6,000
평안 5,390

함길 14,900
황해 2,500

함길 1,070

평안 15,470
황해 2,000
정녕 300
함길 10,000
   10,000
평안 5,740

정녕 400

함길 8,526

갑산·삼수
1,000
함길 11,750


갑산·삼수
1,000

평안 12,987


평안 6,570
2. 15.∼

2. 15.∼

8. 15.∼

2. 10.∼3. 10.
2. 10.∼3. 10.
2. 10.∼3. 10.
2. 10.∼3. 10.
2. 10.∼3. 10.

2. 10.∼3. 10.

2. 10.∼3. 10



8. 20.∼




2. 10.∼3. 10.

8. 15.∼9. 15.


1. 11.∼2. 10.

2. 10.∼3. 10.


8. 20.∼9. 18.
8. 20.∼9. 18.
2. 15.∼3. 15.

2. 15.∼3. 15.

8. 15.∼9. 14.

8. 5. ∼9. 5.

8. 15.∼9. 15.


8. 5∼8. 26.


2. 10.∼3. 6.


30일간
합 계   672,134척
373리 122보 2척
193,356명  

<표 1>평안도·함경도 행성축조 상황

 행성의 총 연장은 평안도가 144리 27보, 함길도가 231리 188보 2척으로서 함길도의 두만강 행성이 압록강 행성보다 훨씬 길었다. 이들의 전장은 376리에 가까워 지금의 길이로는 약 140㎞에 이른다. 행성은 평지는 석축하였으며, 산지의 높은 곳은 삭토하였고, 지대가 낮거나 습지대는 참호를 파거나 나무말뚝을 박은 木杙 혹은 가지달린 나무의 가지를 날카롭게 만들어 비스듬히 박아 세운 鹿角城으로 만들어졌다.

 북쪽 국경지대의 행성축조는 세종이 서거하자 일단 중단되었다가 이후에 보완적인 축조가 계속되었다. 성종대와 중종대에도 행성축조가 논의되고 또 한 일부지역은 보완적인 축조가 이루어졌으나, 끝내 강의 남쪽을 따라 전구간이 이어진 완성된 행성은 실현되지 못하였다.426)≪新增東國輿地勝覽≫권 48부터 권 55까지에 걸쳐 行城의 양상이 나타나 있음을 참조. 그러나 행성이 완성된 것은 아니더라도 그 성과는 적지 않았다. 우선 여진족의 변방침입이 현저하게 줄어들었다. 축성이 시작된 세종 22년 9월을 중심으로 세종대의 여진족 침입상황을 살펴보면, 평안도에서는 그 이전에 17회나 침입하였던 것이 그 이후에는 3회로, 함길도에서는 그 이전에 8회나 침입하였던 것이 1회로 줄어들었음을 기록을 통해 알 수 있다.427)宋炳基, 앞의 글(1980), 192∼193·202∼206쪽. 물론 여진족의 세력이 줄어들고 있었던 것도 있어서 전혀 행성축조만이 그 이유가 된 것은 아니었다. 가령 여진족에 대한 회유책이라든지 국방상의 여러 가지 다른 조처 등도 침입이 줄어든 이유이지만 행성축조에 크게 힘입은 바가 있었다고 할 수 있다.

 이와 같이 행성이 축조되면서 여진족의 침입이 줄어들게 되자 赴防軍土의 감축도 가능하게 되었다. 그러나 여진의 변경침입 감소나 부방군의 감축이 가능하여졌음에도 불구하고 入保가 여전히 문제로 남아 있었기 때문에 행성축조의 효과가 그렇게 큰 것만은 아니었다. 행성의 축조에도 불구하고 입보문제가 해결되지 못한 것만이 아니라 축성으로부터 받은 두 변경지역 주민들이 겪은 고통은 여간 심각한 것이 아니어서, 축성에 동원되었던 평안·함길·황해·강원 등 북방 제도민 특히 변방지역 주민들이 노인과 어린아이를 끌고 유리 전전하는 경우가 많았다. 이와 같이 축성 그 자체가 원인이 되어 유리 도망을 유발하였다고 하는 것은, 변민을 안거케 한다는 축성 본래의 목적과는 크게 어긋나는 것이었다.

개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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