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신편 한국사
  • 조선 시대
  • 22권  조선 왕조의 성립과 대외관계
  • Ⅱ. 조선 초기의 대외관계
  • 1. 15세기 동아시아 정세
  • 2) 북방민족의 동향
  • (3) 에센의 유목왕국

(3) 에센의 유목왕국

 조선 세종 21년 탈환의 죽음에 따라 그의 아들 也先[에센]이 뒤를 이어「太師淮王」을 칭하였으나 이들 부자는 칭기즈칸의 후예인 이른바 黃金氏族이 아니었으므로 가한의 지위를 차지하는 데는 약점이 있었다. 그러므로 태태불화를 내세워 가한의 자리에 앉혔으나 명에 조공을 할 때는 각자가 사신을 따로 파견하는「主臣幷使」의 양상이었으며, 명도 양편을 함께 고려하지 않을 수 없었다. 태태불화는 단순히 꼭두각시 노릇에만 만족하지 않고 요동방면에까지 세력확대를 기도하며 자신의 즉위를 알리는 몽고문자로 된「몽고황제칙서」를 여진과 조선에 보내기도 하였다. 또한 에센의 명 침입계획을 때로 견제하였으므로 양자는 표면상으로는 제휴관계이나 사실상은 격심한 대립관계에 있었다고 할 수 있다.

 에센은 명이 당시 雲南 麓川의 반란을 진압하는 데 신경을 쓰고 있는 동안, 서북을 향하여 세력을 확장해 나가는 데 전력을 쏟아 드디어 명의 哈密[하미] 衛를 장악할 수 있게 되었다. 하미는 중앙아시아로 통하는 교통의 요충이었으므로 이로부터 명과 중앙아시아와의 교통은 저지당하게 되고, 오이라트는 중앙아시아 여러 나라와의 隊商무역 또는 중계무역을 독점할 수 있게 되어 경제적 토대를 쌓을 수 있었다. 이에 그치지 않고 오이라트는 동쪽으로 몽고 우량하 3衛를 격파하고 요동의 일부 여진까지 영향하에 장악할 수 있는 정도가 되었다. 이 무렵 오이라트의 세력범위는 요동으로부터 오늘날의 新疆 靑海지방에 이르는 광대한 지역에 이르게 되었으며 북방 몽고의 통일세력이 되었다. 오이라트의 급격한 세력확장에 대해 명의 식견 있는 관료들은 에센이 앞으로 반드시 명으로 내침할 것이라고 상소하며 대비를 촉구하였으나, 오이라트로부터 뇌물을 받거나 밀무역을 통하여 사리를 추구하고 있던 환관 王振 일파로부터 도리어 탄압을 당할 뿐이었다.

 오이라트의 하미장악으로 동서간에 대상무역이 활발해지고 동몽고의 제패에 따라 요동으로의 진출이 가능해지자, 오이라트는 명으로부터 무기나 식량을 비롯한 물자를 대량으로 교역해 들여와야 할 필요성이 더욱 증대되었다. 그리하여 종래에 규정된 조공무역의 틀을 크게 넘어서는 오이라트의 경제적 요구와 이를 제한하려는 명과의 사이에 심각한 갈등이 발생하였다. 조선 세종 31년 오이라트의 대거 남침에 명 영종은 관료들의 반대를 무릅쓰고 왕진의 권고에 따라 50만 대군을 이끌고 경솔하게 친정에 나섰다가, 土木堡에서 포위공격을 받아 참패를 당하고 명 영종마저 오이라트의 포로가 되는「土木의 變」이 일어나고 말았다.

 「토목의 변」으로 엄청난 타격을 받은 명은 건국 이래 최대의 위기를 맞았으나, 에센은 우세한 군사력을 지니고 있으면서도 이러한 호기를 살려 중국으로 깊숙히 쳐 내려오지 않았다. 에센은 뜻하지 아니한 대승리가 명의 무모한 군사행동에서 기인하였다는 사실을 잘 알고 있었다. 명의 대패가 결코 예기치 못한

 사태였던 점은, “에센은 車駕가 잡혀왔다는 말을 듣고도 놀라 믿지 않다가 막상 대면하게 되자 예를 다하기를 매우 공손히 하며 宣府 城南으로 받들어 모셨다”는≪明實錄≫의 기사를 보아도 알 수 있다.507)≪明英宗實錄≫권 181, 正統 14년 8월 갑자. 에센과 명 영종은 승자와 패자의 단순한 관계가 아니었다. 화의가 성립되어 북경으로 귀환하기까지 오이라트에 약 1년간 억류생활을 하는 기간에도 명 영종은 늘 융숭한 대접을 받았다.

 결국 에센의 남침 목적은 명 영종을 포로로 사로잡기 위한 것이 아니었을 뿐 아니라 중국을 지배하는 정복왕조의 수립도 아니었다. 이는 에센이 단기간 내에 군대를 철수시키고 약 1년만에 명 영종을 간단히 송환시켜 준 데서도 알 수 있다. 에센은 바로 유목국가의 충실한 건설을 목표로 하고 있었으며, 이를 위해서도 가장 중요한 교역의 대상인 중국이 앞으로 재생산이 불가능해질 정도로 파괴되는 것을 원치 않았다고 볼 수 있다. 그리고 또한 태태불화를 이용하여 에센의 세력을 약화시키려는 의도를 갖고 있는 명의 환심을 사서, 태태불화와의 내부경쟁에서 우위에 서려는 에센의 계획도 작용하였을 것이다.

 사실「토목의 변」이 끝난 후에 에센과 태태불화와의 대립이 격화되어 조선 문종 원년(1451) 마침내 에센이 태태불화를 패사시키고 완전한 승리를 확정지었다. 조선 단종 원년(1453)에 에센은 可汗으로 자립하여「大元田盛大可汗」으로 자칭하였다. 이 무렵이 곧 에센의 유목왕국의 전성기였으며,「토목의 변」이전을 능가하는 조공무역이 명과의 사이에 이루어졌다. 오이라트가 명에 바라는 것은 무역을 통해 경제적 욕구를 충족시키는 것이었고 명이 이를 제한시키려는 과정에서 전쟁이 일어났으며, 오이라트는 결코 군사적 해결에만 매달리지 않았음을「토목의 변」 전후처리과정에서 엿볼 수 있었다.

 전성시대를 구가하던 오이라트에서 내분이 발생하여 조선 세조 원년(1455) 에센이 阿刺知院에게 피살당하였다. 아라지원은 다시 타타르의 孛來에게 타도됨으로써 오이라트는 분열과 쇠퇴의 길을 걷기 시작하고, 대신에 타타르가 다시 강성해지기 시작하였다. 패래는 태태불화의 아들 麻兒可兒를 일시적으로 옹립하여「小王子」로 호칭하였으나, 머지않아 곧 살해하고 다시 馬古可兒吉思를「小王子」로 옹립하는 등 타타르부의 실력자로 떠올랐다. 조선 세조 11년 패래와 소왕자 등은 部衆을 이끌고 속속 오르도스지역으로 진입하였다. 원래 타

 타르는 요동으로부터 宣府·大同·寧夏·甘肅 등지를 왕래하였으나, 이 무렵 오르도스를 점령한 다음부터는 이 지역을 기지로 삼아 이후 명제국의 오랜 두통거리가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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