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신편 한국사
  • 조선 시대
  • 22권  조선 왕조의 성립과 대외관계
  • Ⅱ. 조선 초기의 대외관계
  • 2. 명과의 관계
  • 2) 사신의 왕래
  • (4) 명사의 왕래

(4) 명사의 왕래

 보통 勅使라고 불리던 명의 사신은 조서나 칙서 또는 예부자문이나 요동도사자문을 가지고 조선에 왔다. 明使의 사명은 조선의 국왕·왕비·왕세자를 책봉하거나 誥命과 冊曆을 하사하기 위한 목적으로부터, 우마의 교역과 火者(고자)·처녀나 鷹犬의 진헌을 요구하거나 표류인·도망인의 송환을 요구하는 등 참으로 다양한 목적이 있었다.

 명사는 朝官이 오는 경우도 있지만 대부분은 조선출신의 환관이 파견되어왔다. 조관들이 대체로 조선에 와서 문학의 교류에 힘쓰는데 비하여, 조선출신의 환관들은 황제권력을 배경으로 온갖 행패를 부리며 무리한 요구를 일삼는 경향이 많았다. 그 대표적인 인물로서 尹鳳은 자신의 친족에게 관작을 내려주도록 요구하는가 하면 고향인 瑞興에 새로운 저택을 지어주도록 요청하기도 하고 각종 뇌물을 끊임없이 요구하였다. 그러나 이들은 또한 명의 각종 정보를 조선에 알려주거나 조선의 이익을 위해 명의 황제를 설득하는 로비스트의 역할을 담당하기도 하였다.

 조선 초기에 명사가 조선에 파견되는 횟수를<표 2>로 나타내어 보면, 연평균 1.13회로서 명에 파견되는 조선사절의 횟수보다 1/6이 채 되지 않는다. 각종의 현안문제가 중첩되었던 태종연간에는 연평균 2.77회로서 매년 거의 세 차례의 명사가 파견되어 왔으나, 세종연간을 지난 다음부터는 연평균 1회 이하로 줄어들고 있는 점을 알 수 있다. 명에서 조선에 사신을 파견하지 않고 조선사절이 귀국하는 편에 그냥 문서만 보내는「順付」라는 형식이 있었는데, 이는 물론 명사의 파견횟수에 포함시키지 않았다.

시 대(재위연대) 재 위 연 수 사 절 횟 수 연 평 균
태 조(1392∼1397)
정 종(1398∼1399)
태 종(1400∼1417)
세 종(1418∼1449)
문 종(1450∼1451)
단 종(1452∼1454)
세 조(1455∼1467)
예 종(1468)
성 종(1469∼1493)
7
2
18
32
2
3
14
1
25
9
0
50
36
2
3
9
1
8
1.28
0
2.77
1.12
1
1
0.64
1
0.32
합 계 104 118 1.13

<표 2>조선 초기 明使의 파견횟수

 명사일행은 上使와 副使 외에 序班·頭目·軍官·醫員·寫字官·廚子 등으로 구성되었다. 서반은 會同館의 通事序班을 의미하며 통역의 일을 맡았다. 물화의 운반과 관리를 담당하는 두목은 대개 북경과 요동의 상인들로서 조선상인들과 교역을 하는 데 힘썼다. 요동도사에서 파견된 指揮는 보통 200명 정도의 병력을 이끌고 명사일행을 의주까지 호송하였다.

 명사일행도 대개 조선사절과 같은 길로 왕래하였다. 명사가 의주에 도착하면 의주부윤이나 평안도병마사가 일행을 영접하였다. 의주부로부터 연락을 받은 조선조정은 즉시 2품 이상의 대신을 遠接使에 임명하여 의주로 보내 명사를 맞아 안내하게 하였으며, 돌아갈 때도 마찬가지로 의주까지 동행시켰다. 세종 32년(1450) 조선을 다녀간 명사 倪謙이 남긴≪朝鮮紀事≫를 보면, 의주로부터 한양까지 다음과 같은 경로를 거쳤다.525)倪謙,≪朝鮮紀事≫景泰 원년 정월 갑오∼윤 정월 병오.

義順館(義州)-所串館(定寧)-良策館(龍川)-車輦館(鐵山)-林畔館(定州)-雲興館(郭山)-新安館(隨川)-嘉平館(嘉山)-安興館(安州)-肅州館(肅州)-安定館(順安)-大同館(平壤)-生陽館(中和)-黃州-鳳山-劍水館-龍川館(瑞興)-安城館(平山)-寶山館(遂安)-金岩館(新溪)-興義館(瓮津)-金郊館(牛峰)-開城-東坡館(楊州)-原平-碧蹄館-慕華館-太平館.

 명사일행은 의주로부터 한양에 이르는 도중에 설치되어 있는 驛館에 유숙하며 수령과 道伯이 베푸는 대접을 받았다. 조선은 명사가 의주·정주·안주·평양·황주·개성에 이르게 되면 특별히 2품 이상의 대신을 宣慰使로 보내 왕이 내려준 宣醞을 가져가 접대하게 하였다. 명사의 일행이 평양이나 개성에 이를 때도 마찬가지이지만 특히 한양에 도착하면 鼓樂·雜戱·鰲山·綵棚을 베풀어 열렬히 환영하였다. 한양에서 칙사를 맞이할 때는 왕이 왕세자 및 백관을 거느리고 모화관까지 행차하였으며, 궁궐에 이르면 茶禮를 행한 다음 황제가 내린 조서나 칙서를 받았다.

 칙사일행이 태평관에 이르러 여장을 풀면 왕이 몸소 태평관에 거둥하여 下馬宴을 베풀었고, 이튿날에는 翌日宴을, 5일이 지나면 溫斟宴을 베풀었다. 명사가 귀국하기 1, 2일 전에는 왕이 태평관에서 上馬宴을 베풀고, 떠나는 날은 역시 백관을 거느리고 모화관까지 전송하였다. 그 밖에도 거의 매일같이 크고 작은 연회를 열어 이른바「칙사대접」을 하였으며, 칙사의 접대를 위한 迎接都監이 별도로 설치되어 이를 관장하였다. 명사는 대개 한양에 20∼25일 정도 머물렀으나 환관출신의 칙사는 보통 이보다 더 오래 머물며「人情物件」이라는 예물을 더 많이 요구하거나 교역을 요구하며 조선의 접반사를 괴롭히는 일이 많았다.526)李鉉淙,<明使接待考>(≪鄕土서울≫12, 196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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