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신편 한국사
  • 조선 시대
  • 23권  조선 초기의 정치구조
  • Ⅳ. 군사조직
  • 2. 5위체제의 확립과 중앙군제
  • 5) 수도방위의 실제
  • (2) 행순

(2) 행순

 行巡은 입직과는 달리 부단히 궁궐 내외나 도성 내외를 순찰하는 것을 말한다. 이러한 행순의 기능은 5위군이 평시에 가지고 있는 큰 기능 중의 하나이다. 먼저 궁궐 안에서의 행순을 살펴보면 5위의 위장과 분장은 군사 10명을 인솔하고 시간을 나누어 순찰한 뒤에 이상 여부를 직접 왕에게 알리도록 하였다. 그리고 가장 중요한 도성 내외의 순찰에는 사실상 군사적 기능이 거의 없는 충의위·충찬위·충순위·족친위와 왕의 금군인 내금위를 제외하고 군사기능을 가진 5위의 각 1부씩의 입직에서 교대한 출직군사를 병조가 두 곳으로 나누어 정하고 행순하도록 하였다. 또한 그때그때 왕의 지명을 받은 巡將과 監軍 혹은 出入番將 등이 궁궐에 들어가 왕에게 숙배한 후 대궐 안에서 순찰패를 반납 및 수령하게 했으며 각 순찰분단의 領官이 받는 패는 순장이 전부 맡아 나누어 주도록 하였다. 여기에서 보는 바와 같이 그날그날 행순의 모든 책임은 사실상 순장이 지게 되어 있는데 이 순장은 고유의 직책이 아니고 왕의 지명에 의하여 책임을 지게 되어 있었다. 순장은 대개 중추부의 知事(정2품, 6인) 이하 同知(종2품, 7인), 僉知(정3품 당상, 8인) 이상의 관이 추천 임명되었고, 부족할 때에는 품계는 높으나 관직이 첨지 이하로 낮은 行職 당상관을 추천·임명하였다. 행순의 실제적인 책임을 지는 영관은 상호군·대호군·호군을 임명하고 부족할 때는 별시위 가운데서 6품 이상의 관을 임명하였다. 순찰 감독에 임하는 감군은 선전관이나 병조 및 도총부의 당하관을 추천하여 임명하였다.

 그리고 궁성 4문 밖에 숙직하는 일도 병조에서 각각 상호군이나 대호군·호군 중의 한 사람을 정하고 부족하면 행직인으로 충당하였으며 그들에게는 正兵 5명이 배정되었다. 도성 내외에는 警守所가 있었는데 이 경수소에는 보병 두 사람이 그 부근의 주민 5명을 거느리되 그들이 가지고 있는 弓·劒·杖 등을 휴대하게 하여 나무로 만든 경수패의 하나인 更籤을 받아 숙직하게 하였다. 그러나 주민 가운데 노인이나 질병, 과부 등의 부양하는 자가 없는 사람들은 이 경수소 근무에서 제외되었으며 산골짜기에 있는 경수소에는 정병 5명이 배치되었다.

 궁궐의 정문인 광화문을 지키는 호군은 초저녁에 병조에서 요령인 鐸과 병조의 참의나 참지가 만든 야간순찰의 암호인 軍號, 즉 말마기[言的]를 받고 통행금지 시간인 人定이 되면 정병 2명으로 하여금 요령을 흔들면서 궁성을 순찰하게 하였고 4면의 경수소와 각 문도 차례로 이어받아 계속 순찰하다가 통행금지가 해제(罷漏)되면 그치도록 하였다. 이 사이에 경비를 더욱 강화하기 위하여 실제 순찰운용의 영관인 巡官은 매 시[更]에 궁궐을 순회하면서 4면의 경수소와 각 문에 나아가 경청을 회수하여 날이 밝으면 병조에 반납하였다. 뿐만 아니라 순장도 경비를 더욱 튼튼히 하기 위하여 불시에 직접 경수소에 나아가 검찰하는 등 이중 삼중으로 단속하고 경비를 강화하였다.

 이와 같이 경비를 더욱 강화하는 한편으로 통행금지 시간이 되면 볼일 없는 사람의 통행이 금지됨은 물론 궁궐이나 도성의 문들을 일제히 닫아 외 부와의 접촉을 단절하고 행순하는 장졸만의 통행이 가능하게 하였다. 궁성문은 병조의 注書와 도총부 당하관 그리고 열쇠를 관장하는 司鑰에 의하여 개폐되었으나 그 열쇠는 승지에게서 받고 개폐 후에는 다시 반납하였다. 그리고 도성문은 호군과 장교인 五員이 각각 자기가 담당한 도성문의 개폐를 관장하고 교대할 때는 병조에 그 열쇠를 반납하였다. 만약 왕이 밖에 나가 있을 때에는 수문장이 열쇠를 관장하고 왕명에 의해서만 개폐할 수 있었다.

 그러나 모든 문을 폐쇄하고 사람의 통행을 금지하였다 하더라도 갑작스럽게 생기는 일 등으로 꼭 야간통행을 해야 될 경우가 있게 마련이다. 이러한 경우 비상조치로서 통행을 허락하지만 서울의 안위를 위하여 조심스럽고 신중한 조치를 취하는데 야금 중이라도 다음의 세 경우는 통행이 인정되었다.

첫째, 급한 공무가 있는 관리, 질병과 장사·출산 등의 부득이한 일이 있어 통행을 해야 할 경우이다. 이럴 때 직접 순관이나 경수소에 피치 못할 사유를 보고하면 순관과 경수소는 사람을 시켜 경첨을 가지고 그가 목적하는 집까지 보호해서 연행하도록 하였다. 그리고 이튿날 병조에 보고하여 진실 여부를 조사시켰다.

둘째, 順廳에 통행금지 해제의 깃발인 通宵旗(밤의 통행을 허락하는 기)가 게양되었을 때는 비록 아무런 標信이 없다 하더라도 통행이 자유롭게 인정되었다. 통소기가 걸리는 때가 언제인지 대전에는 규정이 없어 알 수 없으나 명절이라든가 혹은 나라에 큰 경사가 있을 때 이 통소기가 게양되는 것이 아닌가 한다.

셋째, 야간통행을 함으로써 맡은 바 임무를 수행할 수 있는 병조·형조·의금부·한성부·수성금화사와 5부의 直宿員 등은 통행할 수 있었다. 그러나 이들이 통행을 하려면 모양이 둥글고 한 면에는 「通行」이라 쓰고 또 한 면에는 「通行」이라 篆字로 낙인한 통행표신을 승정원에서 받고 또한 병조에서 군호를 받아 각각 그 관청의 아전과 사령을 거느리고 아무 때라도 그들의 직무를 수행할 수 있게 하였다. 물론 통행표신은 이튿날 아침에 승정원에 반납하도록 하였다.

 한편 통금 중에 도성문이나 궁궐문을 열어야 할 경우의 절차를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첫째, 지방으로부터 급한 용무로 왕에게 啓達할 일이 있을 경우 도성문은 열지 않지만 전달은 되었다. 즉 이 때는 도성문을 지키는 책임자인 호군이나 요원이 문 틈으로 이를 받아 급히 궁궐 문까지 나아가서 상주하였다.

둘째, 정해진 시간 이외에 도성문을 여는데 있어서의 절차를 살펴보면 어떠한 이유에서 도성문을 열어야 할 때에는 반드시 궁중에서 둥근 모양의 한 면에는 「信符」라 篆字로 쓰고 또 한 면에도 역시 전자로 「信符」라 인각한 개문신부를 내려야 가능하였다. 이 개문신부는 둘로 쪼개어 호군이나 오원이 右符를 가지고 있는데 궁내의 左符가 내려지면 이와 맞추어 보고 맞을 때만 문이 열려졌다. 그리고 이들이 교대할 때는 반드시 병조에 반납하고 교대한 자가 다시 병조에서 우부를 받아서 간직하였다.

셋째, 궁궐문을 시간 외에 열어야 할 때가 있다. 이런 경우에는 모양이 네모나고 한 면에는 「開門」이라 쓰이고 뒤에 「御押」이 있는 개문표신을 사용하였으며 또 불시에 궁궐문을 닫아야 할 때도 역시 「閉門」이라 쓴 폐문신표를 받아서 닫았으며 긴급을 요할 때는 이 궁궐의 개·폐문표신은 도성문을 열고 닫을 때도 직접 통용할 수 있었다.

 다음에 통금을 어긴 자나 군사가 군률을 어겼을 때의 경우를 살펴보면 만약 군관이나 경수고에서 아무런 이유없이 통행하는 자를 체포하였을 때에는 일단 근처의 경수소로 넘기고 이와 같이 차례로 넘겨 순청에 구금시킨 후 다음날 행정관청인 병조에 보고하였다. 그러나 3품 이하관은 직접 구속하지만 당상관이나 사헌부·사간원의 관리는 그들을 수행하고 있는 관청 하인인 根隨를 인질로 가두고 본인은 돌려 보내며, 도성 밖에서 이런 자가 있을 때에는 경수소에 수감했다가 새벽이 되면 순청에 보고하도록 하였다. 만약 사유를 속이고 야간통행을 위반한 자나 그 위반자로부터 뇌물을 받고 석방 해준 자가 있을 때는 모두 군령으로 이를 엄하게 다스리도록 하였다. 이상과 같이 그때그때 임시로 임명되는 순장의 직권 아래 행순의 막중한 사명이 지켜져 서울은 철저히 방어되고 있었던 것이다. 이같은 막중한 사명을 가진 순장은 도성 내외의 행순군사를 초저녁에 이름과 대조하여 점검하고 통행금지가 해제된 후에 다시 점검하고 해산시키는 동시에 군사의 출결과 각 시간마다의 이상 유무를 병조에 보고함으로써 그의 책임을 다하였다. 그리고 행정적으로 총괄의 책임을 지고 있는 병조의 당상관은 모든 숙위, 행순인과 각 문의 파수일, 그리고 경수소 직숙인의 성명을 초저녁에 정해진 군호와 함께 밀봉하고 승정원을 통하여 왕에게 상신하고 왕으로 하여금 이를 항상 파악할 수 있도록 하였다. 이를 省記라고 하는데 대궐 내에 입직하는 여러 장수와 선전관, 겸사복, 상·대호군, 호군 및 각 관청의 관리 및 순장, 순관 외의 출사는 이름은 쓰지 않고 총 인원수만 적었다.

 위에서 기술된 것은 주로 야간의 순행에 관한 것이나 평시에 있어서도 궁궐이나 도성 내외의 경비를 강화하기 위하여 경수소 이외에 그 문을 지키는 파수군을 고정 배치하였다. 즉 궁궐문은 병조가 5위의 기간병인 정병과 갑사를 차출하여 여러 곳에 분속시켰고 또 대졸 10명을 차출하여 광화문과 종묘문을 지키게 했다. 그리고 도성문은 입직에서 나온 출직 보병으로써 파수하게 했는데 興仁·崇禮·敦義·東小門은 책임자로 호군을 임명하고 그 나머지 문은 司直 이하의 군관인 오원을 책임자로 임명하였다. 대개 대문에는 30명, 중문과 대문의 좌우 협문에는 20명, 소문과 중문의 좌우 협문에는 10명의 군사를 배치하여 지키게 하였다. 그리고 종묘문은 4명, 도성문은 8명으로 하여 각각 평시에 이를 지키도록 하였다.283)≪經國大典≫권 4, 兵典 行巡·啓省記·門開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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