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신편 한국사
  • 조선 시대
  • 24권  조선 초기의 경제구조
  • Ⅰ. 토지제도와 농업
  • 1. 토지제도
  • 2) 토지 소유형태와 경영형태
  • (1) 토지 소유관계의 변천

(1) 토지 소유관계의 변천

고려 말의 사전은 기사양전 및 그것과 동시에 실시된 私田租 公收의 조처를 경과하면서 사실상 혁파되고, 과전법의 시행으로 사전의 옛 田籍마저 모두 불태웠으며 그것을 사적으로 감추어 두는 일도 처벌받도록 규정되었다. 이제 不輸租의 특권을 향유하던 조업전적 사전은 완전히 혁파되었으며, 전국의 전지는 일단 국가수조지로 편성되고 과전법에 따라 다시 재편성되었다.

사전혁파의 구체적 대상은 고려 말 사전의 전주들이 조업전임을 내세워 자행해오던 개별적 수조권이었다. 사전개혁의 초기단계에서는 그 같은 수조권 뿐 아니라 소유권적 측면에서도 토지국유의 원칙을 관철시키고자 하였으나, 그 원칙은 결국 현실적인 토지 소유관계의 제약으로 실현할 수가 없었다.

그러면 고려 후기에 전국적으로 범람하고 있던 사전의 소유권은 누구에게로 귀속되었을까. 물론 토지의 소유는 대체로 당시의 현실적 지배관계 여하에 따라 그 귀속이 판가름났을 것이다. 구체적 사실을 전하는 사례가 찾아지지 않으므로, 동·서 양계지역에 관한 다음의 사료를 검토해 보기로 한다.

신우 14년 6월 창왕이 교서를 내려 ‘근래에 호강의 겸병으로 田法이 크게 무너졌다.…동북면·서북면에는 원래 사전이 없는 것이니, 만약 사전이라 칭하면서 넘치게 據執하는 자가 있거든 도순문사가 통렬히 금단하여 다스릴 것이며 그 갖고 있는 文契는 沒官하라’고 하였다(≪高麗史≫권 78, 志 32, 食貨 1, 田制 祿科田).

동·서 양계의 땅은 전조의 말기에 고식책에 얽매여 일찍이 양전 수조하지 못하고, 혹은 日耕으로, 혹은 烟戶로 (수조)하고 있으니 전제가 한결같지 않다. 그중에는 토전을 광점하고 조업전이라 칭하면서 제 마음대로 궁민들에게 주거나 빼앗기도 한다(≪太祖實錄≫권 2, 태종 원년 7월 경신).

위의 사료는 살펴본 바 개혁파 사류가 창왕을 옹립하고 착수한 사전개혁의 첫 조처였다. 즉 원래 양계지역에는 사전을 설정한 일이 전혀 없으니, 억지로 행세하는 사전은 모두 색출하여 혁파하라는 내용이었다. 그리고 사전개혁의 후속조처에 따라 不輸租의 사전 형태는 양계지역에서도 혁파되었다.

또한 국가의 수조는 일경 혹은 연호를 단위로 하였음을 알 수 있다. 이처럼 불수조 형태의 사전은 혁파되었지만, 그 뒤로도 토지를 광점하고서 조업전이라 칭하며 횡행하는 지주는 그대로 존속하고 있었다는 사실이 확인된다. 즉 별다른 하자가 없는 한 소유권에 입각한 토지 지배관계는 과전법의 시행전후를 막론하고 그대로 존속하였던 것이다.

이 양계지역의 경우로 미루어 보아 여타 지역의 토지 지배관계의 변천을 대체로 짐작할 수 있다. 그것은 현실의 소유권을 중심으로 하는 현실적 지배관계 여하에 따라 토지 소유관계의 귀속이 결정되었으리라는 사실이다. 따라서 이전부터 경영해오는 농장이라든가 지주지도 그 소유와 경영에 별다른 하자가 없는 한, 그리고 아마도 개혁파와 적대적 관계에 있지 않는 한, 그 소유권이 그대로 보전되었다.

城州의 서쪽 교외는 황폐하여 사는 사람이 없었다. 政堂文學 安牧이 처음으로 개간하여 田畝를 널리 일으키고 크게 집을 지어 살았는데…손자인 瑗에 이르러 극히 번성하여 안팎으로 전지를 점거한 것이 무려 수만 頃이요, 노비가 백여 인이나 되었다(成俔,≪傭齋叢話≫권 3).

처음 정당문학 하륜이 경기·전라 양도 감사가 되어, 兵이 農에서 나온다는 옛 뜻에 따라 민호의 간전 다소를 헤아려 부역 차정하는 법을 세웠더니, 백성들은 심히 편하게 여겼으나 권세가로서 田園을 광점한 자는 많이 싫어하였다(≪太祖實錄≫권 15, 태조 7년 12월 갑진).0092)河崙이 경기 감사가 된 것은 태조 2년(1393)이었다(≪太宗實錄≫권 23, 태종 16년 11월 계사조와 그의 卒記 참조).

위의 사료에서 개간을 통하여 농장을 일으킨 安牧은 고려 말 공민왕대의 顯官이었고, 그의 嗣孫 安瑗은 고려 말에서 조선 태종대까지 현달한 관인이었다. 그의 농장은 사전의 혁파나 과전법의 시행 및 왕조의 교체에도 불구하고 소유권에 입각한 토지 지배관계를 오히려 발전적으로 지속하고 있었다. 그리고 다음 사료는 여말선초의 그 같은 변동을 겪고 난 뒤에도 경기·전라도에는 전원을 광점하고 있는 권세가로서의 대소의 지주가 존속하고 있었다는 사실을 보여준다. 이러한 상황은 경기와 전라지역에 국한되지 않았던 것으로 생각된다. “畿內의 땅에는 達官들의 別業이 많다”라든가 “하삼도는 토지가 비옥하고 물산이 풍부하여 朝士의 농장과 노비가 절반을 넘는다”0093)≪太宗實錄≫권 28, 태종 14년 7월 갑진.
≪世宗實錄≫권 124, 세종 31년 4월 계축.
는 조선 초기의 기록들은, 고려 말 사전개혁과 과전법의 시행을 경과하면서도 별다른 하자가 없는 토지의 소유관계를 그대로 유지하고 있었음을 보여준다.

그렇다면 고려 말엽에 오히려 더 큰 물의를 일으키면서 범람한 비현실적 소유관계 아래에 있던 私田의 소유권은 어떻게 귀속되었을까. 고려 말기에 전국적으로 확대되었다고 하는 사전의 가장 큰 특징은, 그것이 조상 전래의 文券에 의한 조업전으로 행세하면서 개별 수조권을 행사하되 1인 소경전의 수조권자 즉 전주가 여럿으로 난립하고 있었다는 사실이다.

근년에 이르러 겸병이 더욱 심해져 간흉한 도당이 주군을 포괄하고 산천으로 경계를 표시하며 그 모두를 가리켜 조업전이라 칭하면서 서로 밀치고 빼앗으니, 1畝의 田主가 5, 6을 넘고 1년의 전조를 8, 9차례나 거두어 간다(≪高麗史≫권 78, 志 32, 食貨 1, 田制 祿科田).

전조의 전제는…그 법이 더욱 심히 무너지게 되자 세력가들이 서로 겸병하여 1인의 소경전에 田主가 혹 7, 8인에 이르기도 하는데, 수조 때에는 사람과 말에 대한 供億, 求請 抑賣하는 물건, 路費, 漕運費 등이 실로 그 租의 몇 갑절 정도만이 아니었다(鄭道傳,≪朝鮮經國典≫上, 賦典 經理).

고려 말기에 사전의 폐단을 논하는 경우 언제나 가장 절급한 사항으로 거론되는 것은 전주의 난립이었다. 심지어 사전개혁파와는 다르게 그 폐단을 개량하여 사전제도를 그대로 지속시키자는 주장을 폈던 李穡이나 權近같은 경우조차, “그 田主가 1인이라면 다행이지만 혹 3, 4家가 되거나 혹 7, 8가도 있으니…백성의 곤궁함은 이 때문이다.…바라건대 甲寅柱案을 위주로 공문 朱筆을 참작하여 쟁탈자는 그대로 바로잡도록 하자”0094)≪高麗史≫권 115, 列傳 28, 李穡.고 하든가, “근년 이래 전란이 쉬지 않고 수재·한재가 서로 잇달아 백성은 飢色이 들고 들에는 굶주려 죽는 자가 있는데, 더구나 1田에 2, 3의 전주가 있어 각기 그 조를 징수하여 민재를 박탈하니…원컨대 지금부터 일체 본국의 전법에 따라 경중에서는 版圖司가, 외방에서는 按廉使가 田訟을 결단하여 승자가 수조토록 하여 1田에 1主만 있게 함으로써 백성이 蘇息하도록 해야 한다”0095)≪高麗史≫권 78, 志 32, 食貨 1, 田制 租稅 신우 9년 2월 左司議 權近 等 上書.는 것이 그 개량법의 요체였다. 1인이 소경전을 두고 그것을 사전으로 지배하는 전주가 여럿이 난립하여 서로 전조를 징렴하면서 또한 田訟을 벌였던 것이 이 시기 겸병된 사전의 보편적 실상이었다.

고려 말에는 ‘宗廟·學校·倉庫·寺社·軍須田 및 국인 세업의 전민을 호강한 자들이 거의 모두 탈점’0096)≪高麗史≫권 78, 志 32, 食貨 1, 田制 祿科田.
표현상의 과장을 감안하더라도 그것이 전국적 현상으로 대대적으로 확대되고 있었음은 인정할 수밖에 없다.
할 정도로 사전이 전국에 널려 있었으며, 사전의 田訟이 너무 복잡하기 때문에 국가의 행정기능이 마비될 지경에 이르렀다.0097)≪高麗史≫권 78, 志 32, 食貨 1, 田制 祿科田 신우 14년 7월 大司憲 趙浚 等 上書. 전국적으로 두루 존재하던 사전인데도 왜 1인의 소경전을 두고 그 전주는 여러 명이 난립하게 되었는가. 당시의 기록에는 대체로 겸병과 탈점 때문이라고 전하고 있다. 즉 조상 전래의 조업전임을 칭하는 사전을 다른 세력가 또한 조업전임을 내세워 다시 겸병하거나 탈점하기 때문에 그 전주가 여럿으로 난립하였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고려 말에 조업전임을 칭하는 사전의 전주권은 그리 대단하지 않았다고 할 수 있다. 이는 다른 세력가에 의하여 언제든지 겸병이나 탈점될 수 있는 것으로서, 당해 토지에 대한 항구적·구체적 지배권을 행사하는 것이 아닌 한갓 기생적 수조권에 불과한 것이었다. 오히려 토지에 대한 항구적이며 구체적인 관계를 일상적으로 가진 자는 바로 그 토지를 경작하는 농민이었다.

사전의 혁파는 한 토지 위에 난립하고 있던 여러 전주권을 혁파한 것이었다. 그러므로 이제 그 토지의 소유권은 지금껏 여러 전주에게 조를 바칠 수밖에 없는, 그러면서도 그 토지를 평소에 경작하고 있음으로 인하여 항구적·구체적 지배관계를 맺고 있는 佃客0098)과전법 조문의 田主·佃客이란 표현은 물론 고려 말기의 田主·佃戶라는 관용어를 이어받은 술어로서, 토지국유의 의제적 관념에서 표현된 것이다.들에게 귀속되었던 것으로 보인다.

사전을 혁파한다는 내용은 일차적으로는 그 토지에 대한 수조권을 국가가 확보하여 실현한다는 것이었다. 앞서 살핀 바 공사전조의 일체 공수로 인하여 사전에 대한 개별 수조권 즉 전주의 권리가 일체 停罷된 상태에서 기사양전이 단행되었다. 과전법의 시행에 이르기까지 사전에 대한 옛 전주들의 개별 수조를 정파시킨 채 국가의 공수를 실현하게 되자, 국가는 토지를 일상적으로 경작하고 있는 당해 농민을 대상으로 전조를 징수하게 되었다. 그리고 이전의 사전이 혁파되고 새로운 과전법에 따른 수조권을 실현할 때에도 국가 혹은 새 전주가 상대하게 된 것은 역시 당해 토지의 경작자였다. 그래야만 당해 토지에 대한 수조권을 확실하게 실현할 수가 있었던 것이다.

사전의 혁파, 과전법의 제정 과정에서 당해 토지의 정당한 소유·경작자는 기사양전이 단행되는 과정에서 소경전과 그 일상적 경작자와의 대조를 통해서 자기 소경전임을 확인받아 양안에 자기 소유지로 올리게 되었던 것으로 추측된다. 물론 이를 구체적으로 확인할 수는 없지만 그 사실을 유추게 하는 사료가 남아 있다.

(신우) 14년 8월 대사헌 조준이 상소하여 ‘원컨대 지금 양전의 기회를 당하였으니 그 경작전을 심사하여 소경전의 다과로써 그 호를 상·중·하 3등으로 정하고, 良賤의 生口를 분간 成籍하여, 수령은 안렴사에게 바치고 안렴사는 版圖司에 바치게 하여, 조정에서 무릇 징병·조역할 때에 참고할 만한 근거가 되도록 하소서’라고 하였다(≪高麗史≫권 79, 志 33, 食貨 2, 戶口).

즉 위화도 회군 직후의 개혁파 정권은 현안의 사전을 혁파하기 위한 양전을 결행하면서 민호의 소경전의 다과를 주요 기준으로 하는 새로운 징병·조역의 호등제를 추진하였는데, 이 계획이 당시에 그대로 실현되었던 것 같지는 않다. 그러나 위의 사료에서 볼 수 있듯이 호등제 문제와는 별도로 양전 과정에서 경작전을 심사하는 일, 그래서 개별 농민호의 소경전의 다과를 판별하는 일 등을 거치게 되어 있었다. 더구나 징병·조역 이외에 조세의 납부자를 새로이 판가름하였던 기사양전에서는 경작자와 그의 소경전을 대조 심사하는 일이야말로 반드시 거쳐야 할 절차였다. 무릇 隨等異尺의 방식으로 결부제를 운용하는 전통적 양전에서는 그 전품의 등급에 따라 결부의 실적이 바뀌며, 이에 따라 부세의 부담이 달라지므로 그 같은 대조를 통한 상호간의 확인은 반드시 거치지 않으면 안되는 절차였다.0099)전통적인 양전의 경우, 가령 조선 후기에도 토지의 매 필지마다 그 납세자와의 대조가 이루어지고 있었다는 사실이 확인된다. “守令이 장차 汎繩[尺이 쌓여서 束이 되고 束이 쌓여서 負가 되는데, 줄(繩)로써 재는 것을 이름하여 범승이라 한다]하려 할 때, 백성이 수령 앞에 나와 호소하기를 ‘이 논배미의 稅는 3負나 되니 1負를 감해주기 바랍니다’라고 하였다. 從者에게 물으니 대답하기를 ‘진실로 그러합니다. 이 논배미의 稅가 억울함은 뭇사람들이 다 아는 바입니다’라고 하였다”(丁若鏞,≪牧民心書≫권 4, 戶典 田政).

더구나 기사양전은 현안의 조업전적 사전을 전면 개혁하여 새로운 국가 토지법제를 정립하기 위한 기초작업으로서, 대신급의 대관을 새로운 都觀察黜陟使라는 직함으로 파견함으로써 새 정권, 나아가서는 새로운 국가의 경제적 기초를 확보하려는 것이었던 만큼 개별 토지와 그 소유·경작자와의 대조는 반드시 수반되었을 것으로 여겨진다. 농민으로 하여금 자기 토지의 소유관계나 결부의 수를 명확히 확인시키지 않고서 새로운 정권을 운용하기란 쉽지 않았을 것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결국 사전 속에 토지를 탈점당하고 예농적 존재로 겨우 연명하던 다수의 농민이 이제 그 원래의 자기 소경전을 되찾음으로써 자영농으로 발돋움하게 되었을 것으로 생각된다. 또한 정치적 측면에서 개혁파 사류는 안정적인 정권을 확립하는데 실로 심대한 효과를 기대할 수 있는 관건이었기 때문에 그러한 방향으로 추진해가지 않을 수 없었던 것으로 보인다.

그래서 고려 후기에 등장하고, 과전법 조문에서는 佃客농민의 기본적 소유 및 경작지라는 개념으로 정립되며, 이후 “무릇 공부와 徭役은 백성의 소경전 결부수에 따라 정한다”0100)≪成宗實錄≫권 4, 성종 원년 4월 병자.는 등 조선 전기에 많이 관행되는「所耕田」이라는 용어는, 매우 중요한 역사적 의미를 지녔던 것으로 이해된다. 그것은 사료상으로 고려 후기에 등장하는 당시부터 소유 및 경작지라는 의미를 지니고 있었다.0101)≪高麗史≫권 85, 志 39, 刑法 2, 禁令 충렬왕 11년 3월 下旨는 그같은 개념의 所耕田이 처음 보이는 적절한 사례이다. 앞서 살핀 바 “세력가들이 서로 겸병하여 1인의 소경전에 전주가 혹 7, 8인에 이르기도 하였다”는 고려 말의 사전에 난립하였던 전주라는 존재가 부정될 때, 당해 토지에 남게 된 권한은 국가의 수조권과 그 수조권 실현의 대상으로서의 소경전을 경작하는 자의 소유권 두 가지 뿐이었으리라고 짐작된다.

그러므로 과전법의 시행은, 고려 말의 조업전적 사전에 대한 전주들의 난립된 수조형태를 근절하고 자기 소경전을 경작·소유지로 확보하여 국가 혹은 새로운 전주에게 1년 1조만을 바치는 자연농민층을 폭넓게 확보케 하였던 것이다. 과전법이 그 운용과정에서 계속 병작반수의 영농형태를 금단하며 또한 균전론적 시책을 펴나가고 있었던 것도 그 원래의 자영농 확보책을 지켜가고자 하는 자기운동의 일환이었던 것으로 해석된다.0102)金泰永,<朝鮮前期의 均田·限田論>(≪國史館論叢≫5, 1989).

개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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