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신편 한국사
  • 조선 시대
  • 24권  조선 초기의 경제구조
  • Ⅰ. 토지제도와 농업
  • 1. 토지제도
  • 2) 토지 소유형태와 경영형태
  • (2) 과전법체제에서의 영농형태

(2) 과전법체제에서의 영농형태

과전법이 운용된 조선 초기 자영농의 보편적 존립현상에 대하여 최근의 연구는 오히려 지주지의 농장경영이야말로 이 시기의 기본적이며 규정적 영농형태였던 것이라고 주장하기도 한다. 즉 노비라든가 挾戶 등을 예속노동력으로 사역하는 지주지의 직영 농장이 중심을 이루고 그 주위에 지주로부터 토지·牛具·종자 등 생산수단 기타를 대여받는 종속적 전호경영이 다수 집적된 복합적 농장형태가 이 시기 농업의 규정적 범주이며 동시에 국가 조세 수입의 기본 지반이었다고 한다.0103)李鎬澈,≪朝鮮前期 農業經濟史≫(한길사, 1986)에서 제시한 이른바 大農經營說 및 李榮薰,≪朝鮮後期 社會經濟史≫(한길사, 1988)에서 제시한 이른바 主戶-挾戶說이 대표적이다. 특히 전자에서는 “조선 전기 가장 발전적인 농업경영형태는 바로 大農的 농업경영이었다”고 주장하고 있다. 앞서 살핀 바 북부지역에서 그리고 경기와 하삼도에서 다수 세력가의 지주지와 농장형태의 존속 사실이 확인되므로 이들 견해는 매우 설득력이 있어 보인다.

그러나 만약 그같은 세력가의 지주지가 농업경영의 규정적 형태라면 이 시기 국가체제는 아마도 유지되기가 매우 어려웠으리라 생각된다.

한 고을 안에 巨室 수십 가가 있으면 그 세력이 수령을 능가하고 시비를 전도 시키기에 족하다. 권세가 성하니 아무도 감히 제어할 수가 없다. 용렬한 관리는 또한 위세에 겁내고 오히려 巨室로부터 죄를 입거나 재상에게서 꾸짖음을 당할까봐 두려워하니, 어찌 그들에게 법을 집행할 수 있을 것인가…이에 열 집의 부역을 한 집에 떠맡긴다(≪世祖實錄≫권 46, 세조 14년 6월 임인).

각 군현의 품관들이 모두 향리·書員의 용사자로 婢夫를 삼아 짝을 지어 공모하되, 무릇 자기의 徭賦雜役을 촌민들에게 분담시키며 백성을 속이고 약자를 침해하니 그 해악이 여러 가지이다(≪中宗實錄≫권 80, 중종 30년 11월 병자).

즉 일국의 드러난 巨室로부터 향촌의 품관 토호에 이르기까지 이 시기의 세력있는 지주 사족들은 국가의 정상적인 수취체제로부터 사실상 벗어나 있는 존재들로서, 자신과 그 예속 호구들이 부담해야 할 응분의 貢賦·徭役들을 여타 촌민들에게 전가시키고 있었다는 것이다. 아마도 이처럼 국가의 기본 부역조차 담당치 않는 거실 세가, 혹은 품관 토호 등 지주사족들을 기본 존립기반으로 하고서는 국가체제를 유지 운용하기가 어려웠을 것으로 판단된다.

뿐만 아니라 지주지의 직역이 기보적 영농 범주로 보편화되어 있는 상태라면, 과전법이라는 토지분급제도 자체를 운용하기가 사실상 불가능하였을 것으로 보인다. 물론 과전 등은 이른바 ‘累代의 農舍’ 위에 설정된 경우도 있었지만 기본적으로는 일반 농민의 소경전 위에 설정된 것이었다. 그것을 경작하는 전객은 그 수조권자인 전주를 직접 상대하여 납조하면서 자신의 소경영의 재생산에 골몰하고 있었다. 따라서 일상적으로 자행되는 전주의 과도한 수탈에 대한 소농민들의 불평은 대단히 커서, 그 원한으로 인하여 한발 등의 천재가 초래된다는 풍문이 나돌기에 이르렀고, 그에 따라 사전의 일부를 하3도로 이급할 수밖에 없다는 논의가 일어나기도 하였다.0104)金泰永, 앞의 책, 247∼248쪽.

그리고 과전의 후신인 職田에서 관수관급제를 실시할 때에는 경기 감사를 통하여 새 제도의 편의 여부를 농민들에게 물어 보아서 동의하는 자가 훨씬 더 많다는 사실을 확인하고서야 그것을 시행하기에 이르렀다고 하였다. 이에 직전으로 설정된 토지를 소유·경작하는 주체가 보편적으로 소농민경영이었다는 사실을 알 수 있다. 그러므로 과전이 설정된 경기지역은 전주가 전조를 수납하고 여타 지역은 국가가 수납하는 차이야 있었지만, 아마도 이 시기 영농형태의 기본 범주가 소농민경영이었다는 사실에는 별다른 차이가 없었을 것으로 생각된다.

더구나 이 시기 국가재정의 주요 항목을 이루고 있던 공납과 역의 부과기준은 이전의 計丁法으로부터 計田法으로 이행하기에 이르렀다. 앞에서 살핀 바 계전법적 수취제는 그 시험의 단계에서부터 농민들이 ‘심히 편하게’ 여기는 것으로 판명된 제도였다. 그러므로 “무릇 貢賦와 徭役은 백성의 소경전 결부수에 따라 정한다”는 법제는 그 소경전을 경작하는 자영 소농민층의 보편적 존립현상을 전제하지 않고서는 결코 성립하거나 운용될 수 없는 수취제였다. 즉 토지와 가호를 소유한 자영 소농민층의 광범한 성장과 그 보편적 존립을 전제로 하고, 그들을 상대로 보다 더 효율적으로 부역을 수취하기 위하여 고안된 새로운 제도가 이른바 계전법으로 정착하였던 것이라고 생각된다.0105)아직 휴한농업이 더 일반적일 정도로 토지생산력이 상대적으로 낮은 함길도의 경우, 의연 計丁法을 그대로 시행할 수밖에 없었다는 사실을 참조해야 할 것이다(≪世祖實錄≫권 32, 세조 10년 2월 갑신). 거실에서 품관에 이르는 세력 있는 지주사족들은 오히려 그같은 부역을 모피하는 것을 관례화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지역적인 혹은 규모상의 편차야 다양하였겠지만 조선 초기 사회의 기본적 영농형태는 자영 소농민경영이었던 것으로 판단된다. 그런데 이 시기 사회계층의 다수를 점하는 것은 양민층이었다. 그들은 여타 계층과는 달리 군역이라는 기본 국역을 사실상 의무적으로 전담하고 있었다. 그 다음은 노비층이 다수였으나, 소수의 공노비를 제외한 사노비들은 대개 그 主家에 직접 혹은 그 비호하에 은점되어 국가에 대한 정상적 부역의 부담을 모피하고 있었다.0106)“무릇 公役이 있으면 모두 公賤과 良民으로 하여금 당하게 하고 私賤에게는 미치지 않는다”(≪成宗實錄≫권 91, 성종 9년 4월 기해).
“지금 公私의 奴婢로서 逃漏隱接해 있는 자가 무려 百萬이나 된다”(≪成宗實錄≫권 170, 성종 15년 9월 계축).
그러므로 이 시기의 사회는 대체로 국가와 양민 자영농층과의 관계를 기본 축으로 하여 운용되었던 것으로 여겨진다.

그러면 그들의 기준적 영농규모는 대체로 어떠하였는가. 우선 고려 말의 사전개혁론에서는 일정 직역을 갖지 않은 농민에게 代田 1결씩을 免租해줌으로써 그들을 일정 국역에 차정할 자로 책정한다는 규정을 제시한 바 있었다.0107)代田에 대해서는 休閑田田 혹은 代償田 등의 다른 해석도 있으나 “國俗 造家之地謂家代”라고 했으니, 곧 집 주위의 텃밭을 이르는 듯하다. 텃밭은 비옥한 토지라 하여 대체로 全實收稅가 관행되었다(≪世宗實錄≫권 69, 세종 17년 9월 경오). 또 실제로 고려 말기 왜구의 침략에 대비하여 전라도 연해의 군졸들을 江華·喬桐으로 徙民시켜 항구적으로 수군역을 부과하면서 국가가 그들에게 절급한 토지는 각 호당 1결 50부였다. 관련 사료를 보면 그 1결 50부의 경작에는 雇工·閑民 등 종속노동력이 동원되었으며 그것의 경영을 바탕으로 하고서 戶首 1丁을 중심으로 奉足 2명과 다시 여러 명의 閑役者가 기식하고 있는 상태였다.0108)≪世宗實錄≫권 1, 세종 즉위년 9월 을해. 이는 마치 당시에 병조가 보고한 바 ‘父는 정군이 되고 아들과 사위는 봉족이 되어 3丁으로써 1正軍을 이루고 있는 戶首’의 전형적 형태0109)兵曹의 계문에 이같은 형태를 ‘陸地軍丁之例’라고 하였다(≪世宗實錄≫권 45, 세종 11년 7월 임신).
또한 이 시기에는 토지·노비 등 재산이 子女均分相續制로 운용되고 있었으며 사위의 처가살이가 보편적이었다.
와 매우 유사한 軍役戶였던 것으로 보인다. 이 시기 토지 1결 50부는 장정 3∼4명의 노동력이 투입되어야 하는 경작규모였으며, 그래서 수군 1호의 호수 및 그 아들·사위 등 봉족과 이에 딸린 가족 등 여러 사람의 부양이 가능한 경제적 지반이 될 수 있었던 것으로 판단된다.

“10결 이상을 경작하는 자는 모두 豪富之民이요, 3, 4결을 가진 자도 대체로 적다”거나, “小民의 田地는 불과 1, 2결인 자가 많다”는 것이 이 시기 토지소유의 분화 상황이었다.0110)≪世宗實錄≫권 83, 세종 20년 11월 경자 및 권 94, 세종 23년 12월 기유. 경상도의 경우 “백성으로서 논을 가진 것은 그 落種의 수가 많아야 1石地를 넘지 못하고, 적은 자는 10두락에도 미치지 않는다”고 하는 정도로 소농민의 경작규모는 영세하였다.0111)≪成宗實錄≫권 45, 성종 11년 7월 임신.
結負와 斗落의 관계로 말하자면 湖南의 薄田은 40두락이, 그 上畓은 20두락 정도가 1結이었다고 한다(丁若鏞,≪經世遺表≫권 8, 田制 10, 井田議 2).
충청도에서도 “1결의 토지는 한 사람(家戶)이 경작하는 것이 아니다. 한 사람이(전세로) 바치는 것은 불과 몇 되에 불과하다”는 상태였다.0112)≪成宗實錄≫권 197, 성종 17년 11월 신해. 그런데도 “하3도의 경우 각기 소경전의 다소에 따라 혹 몇 되, 몇 말씩을 농민들로부터 거두어 常稅로 삼는다”0113)≪燕山君日記≫권 12, 연산군 2년 2월 계축.
이 때 1結은 田稅는 下下年이라야 4斗였다는 사실을 아울러 참조할 것이다.
고 하는 바와 같이, 일반 전세의 수납에서조차 소농민이 기본 바탕을 형성하고 있었다.

이제 이 시기 경작규모에 따른 호등분화 상황에 관한 거의 유일한 자료로 남아 있는 세종대 강원도의 경우를 도표로 만들어 보면 다음과 같다.0114)≪世宗實錄≫권 74, 세종 18년 7월 임인.
戶等 책정의 기준은 이보다 앞서 세종 17년 3월 무인에 이루어졌다. 도표의 호등별 토지소유 추정규모는 각 기준치의 중간을 택하여 계산한 것인데, 어디까지나 추정치에 불과하지만 전체 결수는≪世宗實錄≫地理志의 65,980결과 가깝다.

경영 규모 戶 等 戶 數 비 율 戶等別 추정 규모 비 율
50결 이상
20결 이상
10결 이상
6결 이상
5결 이상
大 戶
中 戶
小 戶
殘 戶
殘殘戶
10호
71 
1,641 
2,043 
7,773 
0.1%
0.6 
14.2 
17.7 
67.4 
75結×10=750결
35×71=2,485 
15×1,641=24,615 
8×2,043=16,344 
2.5×7,773=19,433 
1.18%
3.91 
38.7  
25.7  
30.5  
11,538호 100% 63,627결 100%

<표 2>세종대 강원도 토지경영규모에 따른 戶等 분화

우선 위의 호등에 파악된 민호들은 비록 잔잔호로 분류된 소농민의 경우일지라도 대체로는 이른바 ‘恒産을 가지고 恒心이 있는 자로서 그 군현의 호적에 올라 부역을 제공하는’0115)≪世宗實錄≫권 18, 태종 9년 12월 무오. 즉 불완전하나마 자영농적 존재들이었다는 사실을 주의할 필요가 있다.

조선은 고려 말기의 여러 사회적 모순을 개혁하고 재편성함으로써 국가체제의 기초를 확립하였는데, 경제적으로는 다음과 같은 몇 가지 경영형태들의 복합구조를 그 기초로 하고 있었다. 즉 경영주체라는 면에서 볼 때 지주의 농장형, 소농민의 자영형, 그리고 영세소농 혹은 무전민의 병작형이라는 세 가지 형태가 그것이었다. 세 가지는 각기 차원을 달리하는 형태이며, 국가를 직접 상대하는 것은 앞의 두 가지가 중심이 되지만, 그러나 그 모두는 다소간의 상호 규정적으로 얽히면서 전개되었다.

이 시기에는 3, 4결에서 수십 결에 이르는 대토지를 소유한 다양한 규모의 지주가 존속하였고, 그 사회적 성분도 王室·宗親·勳戚·朝官·品官士族·富商大賈·鄕吏, 그리고 私奴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편이었지만, 범주적으로는 사족층이 그 핵심이었다.0116)金泰永, 앞의 책, 제3장<朝鮮前期 小農民經營의 推移>참조. 위의 표에 대·중·소호로 분류된 호등은 대체로는 사족지주였으며, 양민의 극히 상층부가 참여하고 있었을 것으로 보인다. 이 시기에는 토지·노비 등 재산이 자녀에게 균분상속되었으므로 특히 지배층일수록 계급내 혼인을 통하여 지주지의 보전을 도모하고 있었다. 대체로는 왕실에 가까운 勢家일수록 그리고 고위 관직을 띤 경우일수록 대토지를 소유하게 되는 편이었으며 동시에 그 소유지도 여러 군현에 분산되어 있는 편이었다.0117)가령 세조의 왕위찬탈에 반대하다가 逆謀로 몰려 家産이 적몰된 錦城大君 瑜의 소유지는 6개 道 13개 군현에, 사육신 가운데 成三問의 소유지는 6개 군현에 분포하고 있었다(≪世祖實錄≫권 3, 세조 2년 3월 정해 및 권 7, 세조 3년 3월 병술). 또 李退溪의 孫子女가 分衿한 토지는 3,000여 斗落으로서 5개 군현에 걸쳐 분포하고 있었다(李樹健,<退溪 李滉家門의 財産 由來와 그 所有形態>,≪歷史敎育論集≫13·14, 1990, 675쪽). 그같은 지주지 경영은 기본적으로 지주의 노비를 중심으로 挾戶라든가 혹은 부근 作人의 일부까지를 노동력으로 사역하는, 지주 자신 혹은 그 대리인에 의한 농장직영의 형태가 일반적이었다. 아직 자연조건이나 노동조직의 한계성으로 인하여 하나의 농장이 일정 규모를 초과하는 대경영의 형태로 전개되기는 어려웠으며, 따라서 대지주의 경우라도 기껏 3, 4결 정도 규모의 농장을 여러 곳에 분산적으로 경영하는 방식을 취하게 되었다.0118)李鎬澈, 앞의 책, 제11장 참조.

한편 위의 표에 6결 이상의 殘戶로 분류된 이들도 기실 자영농으로서는 부농에 속하는 편이었다. 그 신분이 사족이거나 혹은 양민일지라도 그만한 정도의 토지규모라면 다소의 奴婢戶, 雇工이나 婢夫 따위 노동력을 구사하는 자영의 형태를 취하면서, 여지가 있으면 부근의 빈농들에게 병작지로 대여하거나 혹은 그같은 노동력을 직접 사역하여 전체를 농장제적으로 경영하는 방식도 충분히 가능하였을 것으로 짐작된다.

그리고 위의 표에서 가장 큰 비율을 점하고 있는 잔잔호는 일반 농민층을 가리키며, 그 가운데에는 이 시기 전형적인 소농민경영으로서의 양민 자영농이 있었을 것으로 판단된다. 기록에서는 그냥 5결 이하의 소유라고만 분류해 두었으나, 거기에는 물론 1결 미만의 영세농으로부터 4, 5결 정도의 부농까지 널리 분포해 있었고, 그것도 영세농쪽이 훨씬 더 많은 비율을 차지하고 있었을 것으로 짐작된다.0119)이들이 軍役을 부담할 경우 대체로는 奉足 즉 保人으로 편제되었을 것이다. 그리고 재생산과정에서의 자립이 어려운 영세농일수록 인근의 지주지를 부분적으로나마 병작하지 않을 수 없었으며,0120)경작 규모와 그 재생산과정의 자립관계는 “지금 산간지역의 농민으로서 一夫一婦가 경작하는 것은 겨우 논 10두락과 밭 1日餘耕이니 합쳐야 種稻 20두락인데도 또한 요족하다. 들이 너른 곳 사람들은 한 농부가 경작하는 것이 거의 종도 30여 두락인데도 역시 굶주리는 자가 있다”(柳馨遠,≪磻溪隨錄≫권 1, 田制 上)는 기록이 참고된다. 이에 따라 정도의 차이는 있겠지만 예속적 관계를 벗어나기가 어려웠을 것으로 보인다. “풍년에는 徭賦 때문에 괴롭고 흉년에는 徵債로 시달려 가산을 다 팔고 遊離 失所하여 타인에게 기식하는 자가 많다”0121)≪成宗實錄≫권 45, 성종 5년 7월 기사.는 것이 이 시기 영세 소농들의 일반적 상태였다.

그런데 잔잔호층 가운데에서도 이 시기의 사회편제에서 기준적 농민층으로 비정할 수 있는 것은 역시 앞서 강화·교동 수군의 사례에서처럼 1, 2결 정도를 소유 경작하는 양인자영농이 아니었던가 한다. 그것은 호주 부부를 중심으로 그 자식 부부와 女壻 부부 등 3, 4명의 장정을 포함한 혈연가족으로 구성된 가호로서, 자체의 노동력으로 자기 소유지를 경영하는 한 단위의 자영농형태를 이루고, 또한 父가 정군이 되고 아들과 사위는 봉족이 되어 불완전하나마 독자적으로 군역의 기본 단위를 이루기도 하는 존재였던 것으로 여겨진다. 이 시기에도 노비 등 타인 노동력의 노동의욕 내지 노동효율은 매우 저조한 편이었으며, 또 보다 영세한 소농층은 생산수단과 그 도구가 부족하거나 열악함으로 인하여 노동생산성을 제대로 발휘하기가 어려운 편이었다. 따라서 별다른 외부의 교란을 받지 않는다면, 이 정도 규모의 자영농이야말로 경제적 유인관계로 보아 가장 힘써 경작노동에 종사하게 되는 선진적인 기준이 될만한 영농형태였을 것으로 생각된다. 그러나 물론 이들도 자연적 재해와 국가체제의 침체로 인하여 경우에 따라서는 여지없이 몰락하여 유이민으로 나서기도 하였다.

그런데 위의 표에는 파악되지 않았지만, 이 시기에는 貧農 혹은 無田農들의 竝作 농업도 관행되고 있었다. 이는 지주와 경작자가 토지의 소출을 절반씩 나누는 영농 관행으로서, 사료상으로는 조선시대에 와서 비로소 확인된다. 아마도 이 시기에 토지생산력이 발전하고 과전법체제에서 지주의 과도한 수탈을 금단한 결과 조세와 지대 사이에 차액이 항존하게 됨에 따라 자리잡게 된 영농관행이 아니었는가 한다. 다음 기사는 그같은 사실의 일단을 보여준다.

전조의 말기에 민폐가 다단하였는데 我朝에 이르러 점차 혁거되었으나, 민간에는 아직도 나머지 폐단이 있다.…품관·향리가 토지를 광점하고 유망민을 招納하여 병작반수하니, 그 폐단이 사전보다 심하다. 사전은 풍년이라도 1결에 다만 2석을 수취하는데 병작은 많은 경우 10여 석을 수취한다. 유리자들이 이에 의탁하여 피역하게 되고 영점자들이 이에 의탁하여 그들을 隱接시키니, 부역이 균평치 않은 까닭이 오로지 여기에 있다.…전지의 병작은 鰥·寡·孤·獨·無子息·無奴婢者로서 3, 4결 이하 경작하는 경우를 제외하고는 일체 금단할 일이다(≪太宗實錄≫권 12, 태종 6년 11월 기묘).

즉 병작반수는 아마도 고려 말 사전에서 지대를 수취하던 관행에서 비롯되었다고 생각되는데, 과전법에서는 공사전을 막론하고 수조액을 1결 최고 30두로 묶어 두었으므로, 고려 말의 사전이 혁파되고 공조를 바치게 된 공전으로서의 지주 소유지에서 이제 지대와 공조의 차액을 수탈하는 새로운 병작반수제가 관행되어 갔다는 내용으로 풀이된다. 그러나 앞서 살핀 바와 같이 과전법체제는 농업생산 증대를 도모하기 위한 원리의 하나로 균전론적 시책을 강조하고 있었다. 경작노동력을 보유하지 못하여 자칫 진황시키게 될 경우 이외에는 원칙상 병작반수를 금단하고 있었던 것이다.

그런데 이 병작반수제에는 지주가 유망민을 끌어모아 병작제를 유도하고 나서는 편이며, 병작자는 피역 등 불가피한 사정으로 의탁하게 되었다는 사실이 주목된다. 유망민을 초납하여 병작반수관계를 맺었으니, 지주는 그들에게 토지는 물론 종자·농구·축력, 그리고 처음에는 農糧까지도 대여하여야만 비로소 영농이 가능하였다. 또 그러한 병작관계에서는 병작농의 지주에 대한 경제적 의존도가 높고 따라서 예속성이 강할 수밖에 없었다. 일정한 농업생산력 수준의 제약 아래 결부된 이같은 병작관계야말로 이후 전개되는 병작반수제의 원형이며 또한 그 전형이었던 것이다. 그래서 그것은 조선 전기까지 아직도 크게 발전하지는 못하였던 것이다. 이와 같은 병작농민은 이른바「挾戶」의 전형이었으며, 혹은 婢夫·雇工으로도 정착되었을 것으로 추측된다. 그리고 그 가운데에는 금년에 南州의 豪猾家에 숨었다가 명년에는 北郡의 鄕愿家로 옮겨가 버리는 협호적 유망민도 적지 않았던 것으로 보인다.

병작반수제는 국가의 금단에 의해서라기 보다도 당시의 농업생산력으로 말미암아 병작농 자신의 자립도가 매우 낮아 부차적인 영농관행에 머물고 있었다. 15세기에도 “무전민이 거의 10분의 3이나 된다”는 상태였으므로 “토지를 가진 자가 有故하여 耕種이 불가능하게 되면 隣里·族親이 함께 경작하여 (수확을) 나누는 것이 곧 민간의 常事”0122)≪世祖實錄≫권 11, 세조 4년 정월 병자.로 되어 있는 정도였다.

과전법체제에서 비중을 가진 영농 범주를 들자면 지주지 직영의 농장형, 소농민의 자경지 자영형, 그리고 소농민의 借地 병작형이라고 하는 세 가지로 대별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런데 국가경제에서 차지하는 구성비율을 들자면 역시 소농민 자영형이 기본이 되고 지주지 농장형이 그 다음을 점하고 있었던 것으로 이해된다. 그리고 병작농은 이 시기에 아직도 농장이나 지주지의 외곽에서 부수적으로 존립하는 형태가 일반적이었는데, 생산력의 발전과 함께 점차 그 독자성을 높여가고 따라서 그 범주를 확대시켜 가고 있었던 것으로 이해된다.0123)李榮薰,<土地所有와 農業經營>(≪한길역사강좌≫4, 1992).
金泰永,<朝鮮前期社會의 性格>(≪한길역사강좌≫4).

그런데 이 시기에는 국가경제의 기반을 이루고 있는 다수 소농민들이 아직도 뿌리박기 어려운 낮은 자립도에서 항구적으로 국가의 還穀이나 지주 사족들의 長利 등에 크게 의존하여 연명하고 있었다. 영세 소농민일수록 국가적 수취와 지주 사족의 수탈이라는 일상적 굴레를 벗어나기가 어려웠다. 그러므로 이 시기에는 국가권력의 일차적 담당자인 지주사족층이 양민 자영농을 사회경제적 바탕으로 하는 전형적인 지배체제를 구축할 수 있는 기초조건이 마련되고 있었던 것이라고 풀이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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