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신편 한국사
  • 조선 시대
  • 24권  조선 초기의 경제구조
  • Ⅲ. 각 부문별 수공업과 생산업
  • 3. 제지업
  • 1) 제지업의 발달

1) 제지업의 발달

제지기술이 최초로 발명된 것은 중국 후한의 蔡倫에 의해서이다. 이 제지 기술이 우리나라에 전래된 이래로 삼국시대와 고려시대에 이르러 더욱 발전하였다. 삼국 및 고려 시대에 제지기술이 발달되었다는 것은, 고구려의 승려 曇徵이 일본에 종이와 먹의 제조법을 전하였다는 사실과 신라의 白硾紙가 중국에서 천하 제일이라고 인정받았던 사실 및 중국 송나라 사람들이 고려 종이를 최상으로 여기고 있었다는 점에서 이를 충분히 짐작하고도 남음이 있다. 특히 고려 문종 이후부터는 많은 종이가 중국으로 수출되었다. 그 후, 元에서도 고려 종이를 불경지로 쓰려고 구했고, 어떤 때는 10만 장이라는 막대한 양의 종이를 구입해 갈 정도로0573)全相運,≪韓國科學技術史≫(正音社, 1983), 192쪽. 고려의 제지 기술이 발달하였던 것이다.

고려에서는 각 관청과 왕실에 소용되는 종이를 조달할 목적으로 서경 각 관, 주·부·군·현, 향·소·부곡 및 각 역에 紙位田 혹은 紙田을 지급하였고, 詹事府에 供紙戶를 지급하였다. 또한 왕실이나 중앙 관청에 종이를 공납하는 紙所가 있었으며, 일반 백성들도 皮紙 등 각종 종이를 공납하고 있었다. 그리고 고려에서는 종이의 제조 원료가 되는 닥나무의 충분한 확보를 위해 그 재배를 국가적 차원에서 장려하였다. 즉 성종과 인종 때에는 전답 조성이 불가능한 곳에 닥나무를 심어 재배하도록 장려하였다.

이같이 오랜 전통을 지닌 종이는 조선시대에 이르러 각 관청의 사무용, 저화 발행, 서적 간행, 부의용, 군수용 등 정부의 대소 일용품은 물론이고, 사대교린용 및 민수용으로 특히 중요시되었고 그 사용 범위 또한 광범위하였다. 조선 초기 정치제도의 완성기라 할 수 있는 성종 때에 완간된≪經國大典≫ 工典 工匠條에 의하면, 京工匠은 총 2,795명으로 30개 관청에 129종의 일을 담당하고 있는데 그 중 紙匠의 수가 제9위인 85명이고, 外工匠은 8도를 합쳐 27종 3,764명으로 그 중 지장이 최대 다수인 705명을 차지하고 있다.

순위 匠人名 인원수 비율(%)










(129)
沙器匠
冶 匠
矢 人
鍊 匠
紡織匠
弓 人
綾羅匠
瓮 匠
紙 匠

기 타
386
192
171
170
110
108
105
104
85

1,364
13.8
6.9
6.1
6.1
3.9
3.9
3.8
3.7
3.0

48.8
합계   2,795 100

<표 1>京工匠數 및 그 비율

(≪經國大典≫권 6, 工典 京工匠)

순위 匠人名 인원수 비율(%)










(27)
紙 匠
冶 匠
席 匠
矢 人
木 匠
漆 匠
皮 匠
弓 人
油具匠

기 타
705
493
408
377
356
311
297
284
182

351
18.7
13.1
10.8
10.0
9.5
8.3
7.9
7.5
4.8

9.4
합계   3,764 100

<표 2>外工匠數 및 그 비율

(≪經國大典≫권 6, 工典 外工匠)

위 도표를 토대로 서울과 지방의 공장수를 모두 합하면 총 6,559명이다. 그 중 지장이 총 790명으로 모든 공장 중 최다수를 점하고 있다. 이들 지장은 서울의 경우 조지서 81명·교서관 4명, 지방은 경상도 265명·전라도 237명·충청도 131명·황해도 39명·강원도 33명 순으로, 서울의 2개 관청 및 지방의 5개도에 배속되어 국가에 필요한 종이를 생산 공급하였다.

이상에서 조선 초기의 제반 수공업 중 제지업이 차지하는 비중이 가장 높다는 점과 아울러 국가에서 제지업을 특히 중요시하고 국가의 중요 산업으로 인식하고 있었다는 사실을 여실히 알 수 있다. 실제로 조선 초기의 수공업 중 제지업은 가장 발달된 부문의 하나로, 종이의 품질이 우수할 뿐 아니라 생산된 분량도 막대하며 또한 그 종류도 매우 다양한 것이 특징이라 할 수 있다. 게다가 제지 원료가 되는 닥나무의 재배, 새로운 품종의 도입, 외국 제지 기술의 도입·전수 등에 관한 국가의 지속적이고도 정책적인 관심과 장려책에 힘입은 결과, 제지업은 조선 전 시기에 걸쳐 주요 산업으로서의 명실상부한 지위를 계속 누리게 되었다. 그리고 제지업은 관장을 중심으로 영위되는 관영 제지업과 사장을 중심으로 운영되는 민영 제지업의 두 형태로 분류된다. 여타 일반 수공업이 그렇듯이, 조선 초기의 제지업도 관청과 왕실을 중심으로 영위되는 관영 제지업이 주류를 이루고 있었다.

조선 초기 종이의 주요 수요처를 알아 보자. 종이는 사대교린용으로 많이 사용되었다. 조선의 전통적인 외교정책은 중국에 대한 사대, 일본·여진에 대한 교린정책이 중심을 이루어 왔다.

조선 초기에 명과의 관계는 외교적 마찰이 해소된 15세기 초부터 정상화되었고, 이어서 양국 사신의 왕래도 빈번해졌다. 사신의 왕래에는 조공과 회사가 뒤따랐다. 사신의 빈번한 왕래는 조공과 회사의 횟수와 그 수량을 증가시켰다. 따라서 조선은 각종 직물류·인삼·모피·돗자리 등 막대한 양의 조공품을 바쳤으며, 그 중에서 종이의 진헌도 상당한 양에 달했다.

종이는 주로 명에 대한 각종 사행시 연례 방물의 한 품목으로서 진헌하는 경우, 명 황제 및 그 사신들의 특별한 요청에 의해 바치는 경우, 조선에 온 사신들에게 人情 예물로서 증여하는 경우 등으로 대별된다. 명과의 관계에서 다량의 종이가 소요된 대표적인 몇 가지 예만을 들어 보면 다음과 같다. 태종 6년(1406)에 명 황제의 요청에 따라 순백지 8,000장을 진헌하였으며, 동왕 8년에는 진헌사 李文和로 하여금 순백후지 6,000장을 바치게 하였다. 세종 원년(1419)에 명 사신 黃儼이 황제의 명에 의해 불경 인쇄용 종이 2만 장을 요구하였으며, 같은 해에 조선은 순백후지 18,000장과 순백차후지 7,000장을 중국에 진헌하였다. 동왕 2년에는 厚紙 35,000장을 진헌하였다. 이 밖에도 막대한 양의 종이가 각종 사행시의 방물 및 명측이 특별한 요청에 의해 소용되었다. 그리고 명 사신이 조선에 체재할 때, 이들 사신에게 인정 예물로서 각종 종이를 자주 증여하였을 뿐만 아니라 또한 그들의 요구에 의해 사여하는 경우도 빈번하였다. 또한 조선의 사신들이 명에 왕래할 때, 사행로 연변의 요동·廣寧·山海關 등에 주재하는 관원들도 종종 종이를 요청하였으므로 이에 응하여 지급하기도 하였다. 명과의 교류에 사용된 종이는 주로 表箋紙·咨文紙·白紙·厚紙·擣鍊紙·油紙·油厚紙·白奏紙·常紙·黃藁紙·冊紙·印經紙·靑薄紙 등이었다.

그리고 조선은 압록강, 두만강 연변에 거주하는 여진 여러 부족과의 교류도 활발히 전개하였다. 이들 여진족들은 말·모피·약재 등의 토산물을 조선에 바치고 그들의 부족한 생필품 및 종이·농구류 등을 회사품으로 받아 가거나 무역하여 갔다. 그들이 조선의 산물 중 가장 귀하게 여겼던 것은 종이를 비롯한 면포·백저포·쌀 등이었다. 특히 그들은 종이가 토산이 아니라는 이유로 자주 이를 요청하였으며, 또한 喪葬용 종이도 빈번히 요구하였다. 이에 조선은 그들 여러 부족을 회유하거나 귀순시키기 위해서 또는 각 부족의 추장 수, 보족의 성쇠, 위치 등에 관한 각종 정보를 수집하기 위해서, 특정 여진인들에게 종종 종이를 사여하기도 했다. 그러나 厚紙는 군수용으로 사용될 염려가 있었기 때문에 이의 지급은 금지시켰다.

또한 일본, 대마도, 유구와의 교류도 활발하였다. 조선은 이들 사신들로부터 토산품을 진상받고 쌀·직물류와 더불어 종이 등을 지급하였으며, 이들 지역에 통신사·회례사·報聘使 등의 사신을 파견할 때에도 역시 각종 물품과 더불어 종종 종이를 함께 보냈다. 이들과의 교류에 사용된 종이는 白紙·油紙·楮注紙 등이 주류를 이루고 있었다.

종이는 특히 서적 인쇄에 대량으로 사용되었다. 崇儒政策을 표방하고 건국한 조선은 유교 정치의 이념을 널리 구현시키기 위한 방편으로 대대적인 편찬 사업을 전개하였다. 즉 4서 5경·≪性理大典≫·≪小學≫등과 같은 경서류와≪孝行錄≫·≪三綱行實圖≫등과 같은 윤리서,≪資治通鑑≫·≪史記≫등의 역사서,≪元六典≫·≪續六典≫등과 같은 각종 법전류의 편찬·간행 사업이 바로 그것이다. 조선 초기의 편찬 사업 중 비교적 규모가 큰 몇 가지 사례만을 열거하면 다음과 같다. 세종 7년(1425)에≪성리대전≫과 4서 5경을 印刊하기 위해 충청·전라·경상 3도로 하여금 13,000貼의 종이를 상납케 하였다. 동왕 15년(1433)에는≪자치통감≫의 印刊을 위해 조지서, 전라도, 충청도, 경상도, 강원도로 하여금 총 30만 권의 종이를 상납케 하였다. 조선 초기에는 이상에서 열거한 사례 이외에도 수많은 서적을 印刊하였는데, 이같은 편찬 사업에는 막대한 양의 종이가 소요되었다.

이 밖에도 조선 초기에 특기할 만한 것으로는 불경의 간행을 들 수 있다. 조선은 표면적으로는 억불정책을 표방하였지만, 실제 왕실 내부 즉 세종·세조와 같은 好佛 군주를 비롯하여 대군·왕자·비빈·종실 부녀자 및 민간인들 사이에는 여전히 불교가 숭신되고 있었다. 또한 명의 숭불 경향과 일본·유구 등의 숭불에 기인한 끊임없는 대장경 요청 등 조선을 둘러싼 대외적인 환경도 조선 초기의 불교정책에 일정한 영향을 미치고 있었다. 왕실의 숭불 현상과 더불어 중국측의 불경지 요구 및 일본·대마도·유구의 계속적인 불경 요청 등 대외적 요인이 함께 작용하여, 조선 초기에는 많은 양의 불경을 印刊하게 되었으며 또한 이같은 여건은 막대한 불경 인쇄용 종이의 생산을 촉진시켰다. 세조 3년(1457)에 대장경 50건 인쇄에 소용되는 종이 40만 6,200권을 각 도에서 제조하여 해인사로 수송하도록 한 것이 그 대표적인 예라 할 수 있다. 이 밖에도 조선 초기에는 수십 차레의 불경 인간 사업이 있었음을 볼 때, 여기에도 막대한 양의 종이가 소용되었음을 충분히 짐작하고도 남음이 있다. 불경이나 서책의 인쇄는 주로 주자소·전교서·간경도감·사찰 등에서 담당하였으며, 또한 정음청에서도 종종 서적 간행이 이루어졌다.

오늘날의 지폐의 일종인 저화가 조선시대에 처음 사용된 것은 태종 원년(1401)이다. 저화에 소용되는 종이는 처음에는 각 도에서 제조, 상납하였다. 그러자 종이의 두께가 같지 않은 등 많은 폐단이 발생했기 때문에, 태종 15년(1415)에는 조지소를 설치하여 전적으로 저화용 종이를 생산하게 하였다. 여기서 생산된 종이는 사섬시로 옮겨져 저화로 인쇄되었다. 저화의 발행량을 살펴 보면, 성종 20년(1489)에 사섬시에 소장되어 있던 저화 중 신저화가 101,078장, 구저화가 3,722,903장이었다고 한다. 그러나 이 숫자는 사섬시에 보관되어 있는 것만을 표시할 뿐, 실제 시중에 통용되고 있는 저화는 포함되어 있지 않은 것이다. 따라서 그 당시 실제 전국적으로 통용되고 있었던 저화까지 합친다면 상당한 분량이 될 것이다.0574)李光麟,<李朝初期의 製紙業>(≪歷史學報≫10, 1958), 30쪽. 이같은 수량의 저화를 제조하는 데도 많은 양의 종이가 소용되었을 것이다.

紙甲·神機箭·樂線紙 등의 군수용으로도 종이가 다양하게 이용되었다. 종이를 이용해서 만든 갑옷의 일종인 紙甲의 제조에는 休紙·表紙를 비롯하여 각종 과거 시험에 사용했던 落幅紙와 擣鍊紙·厚紙 등이 사용되었다. 그리고 신기전 제조에도 종이가 사용되었다. 신기전에 사용되는 發火筒은 종이를 말아서 원형의 통을 만들고 그 통 속에 화약을 넣은 뒤 통의 양끝을 종이로 막아 그 위를 끈으로 묶은 것으로 종이 폭탄의 일종이다. 이 때 사용되는 종이는 주로 표지이다. 藥線이란 銃筒의 藥筒 속에 있는 화약에 불을 붙여 폭발시키는 역할을 하는 것으로, 약통에 뚫려있는 藥線穴에 끼워서 약통 속의 화약과 연결한 것이다. 이 때 약선을 만드는 데 사용되는 종이가 약선지이다.0575)蔡連錫,<朝鮮初期(1400∼1467) 火器의 硏究>(≪韓國史論≫7, 국사편찬위원회, 1983), 193∼196쪽. 군기시 방화 소용에 白厚紙가 사용되고 있는 점으로 보아,0576)≪成宗實錄≫권 181, 성종 16년 7월 갑인. 藥線紙도 백후지 등과 같은 厚紙類가 사용된 것 같다. 세종 때 각 도에서 매년 군기감에 상납하는 休紙의 元定과 加定의 수는 각각 1,750권 및 1,020근이었는데, 당시 이 곳에 남아 있는 것이 1,095권 및 14,180근이었다고 한다.0577)≪世宗實錄≫권 29, 세종 7년 8월 무자. 아마 이 휴지는 紙甲 제조용이었다고 생각된다. 이로써 조선 초기 군수용 종이 수요의 일단을 살펴 볼 수가 있다. 그리고 厚紙類는 군수물 제조용으로 매우 중요시되었기 때문에 국가 간의 사무역을 엄격히 금지시켰으며, 이를 위반할 때에는 杖 100, 徒 3년이라는 중형에 처하였던 것이다. 0578)≪經國大典≫권 5, 刑典, 禁制.

또한 喪葬시 부의용으로도 많은 종이가 소용되었다. 국가에서는 왕족과 문무 백관 및 그 부모나 처자가 사망했을 때, 신분과 지위의 고하에 따라 쌀·콩·油芚과 더불어 종이를 차등있게 지급하였다. 이들에게 지급된 종이의 수량은≪조선왕조실록≫도처에 산재되어 있는 기사들에 의하면 1회에 대략 70권에서 200권 사이가 보통이었다. 또한≪경국대전≫에서는 3품 이하의 奉使人 및 재임시 사망한 자에게 쌀·콩 공히 10석과 종이 70권을 지급하도록 규정하였다.0579)≪世宗實錄≫권 83, 세종 20년 10월 갑술. 성종 21년(1490) 4월의 傳旨에 의하면, 內官의 부모 및 양부모의 사망시에 종이를 비롯한 쌀·콩·관곽 등 賻儀物의 지급량을 상세히 규정하고 있다. 그 중 종이의 지급에 관한 규정만을 살펴 본다면, 大殿의 경우 長番 당상관 70권·당하관 60권, 出入番 당상관 40권·당하관에게는 종이만 50권을 지급하도록 하고 세자궁은 당상관 60권·당하관 50권, 출입번에게는 40권을 지급하도록 규정하였다. 文昭殿·廷恩殿·양대비전·중궁의 내관으로서 당상관에게는 60권을 그 당하관 및 昭敬殿·慈壽宮·昌壽宮의 내관에게는 50권을 지급하도록 하였다. 또한 내관으로서 재임시 사망한 자에게도 수량은 기록되어 있지 않지만 부의용 종이를 지급하게 하였다. 심지어 改葬 혹은 遷葬할 때에도 종이를 지급하는 경우가 있었다. 그리고 사신의 임무 수행 중 사망한 경우 또는 일본이나 여진족의 부모 처자상에도 예에 따라 부의용 종이를 종종 지급하였다. 이외에도 부채·병풍·창호지·우산·각종 문서·삿갓·비옷·등심지·돗자리·노끈 등 민수용으로도 막대한 양의 종이가 소용되었다.

이상과 같이 국가 및 민간 수요의 막대한 종이를 생산하기 위하여, 조선은 국초부터 그 원료가 되는 닥나무의 재배·배양에 지대한 관심을 가지고 정책적으로 장려하였다. 즉 태조 4년(1395)에는 감사 및 수령의 득실을 고찰하는 조목으로서 興學撫民·恤刑治兵 등과 더불어 種桑麻·藝莞楮라 하여, 이들의 책임하에 백성들에게 뽕나무·삼·왕골과 더불어 닥나무의 재배를 적극 권장하였다. 그러나 이같은 닥나무 재배에 관한 국가의 장려책은 별다른 효과를 거두지 못한 것 같다. 즉 관청의 수탈로 닥나무의 재배가 민간에게 이익을 주기보다는 오히려 폐해만 초래하였기 때문에, 이를 심지 않을 뿐만 아니라 혹 심어 놓은 것마저 베어버려 닥나무 밭을 소유하고 있는 자가 백에 한 둘도 되지 않는다고 할 정도였다. 그 결과 국가는 종이의 원료인 닥을 확보하기 위한 적극적 방편으로, 태종 때에는 각 도로 하여금 대호는 200條, 중호는 100條, 소호는 50條씩 닥나무를 심게 하고, 감사 差人으로 하여금 그 재배 상태 등을 고찰케 하였다. 이 때 법을 준수하지 않는 자는 벌금으로 저화를 징수하고 그 수령을 처벌하도록 강제하였다.0580)≪太宗實錄≫권 20, 태종 10년 10월 임술.

민간인뿐만 아니라 또한 관청에서도 닥나무 밭을 소유하고 있었음은, 태종 15년(1415) 李澄玉의 陳言에「官種楮田」의 소출로 저화를 만들고자 한 주장에서 알 수 있다. 중앙의 닥나무 밭은 상림원에서 관장하고 있었으며 藏義洞에 위치하고 있었다. 즉 상림원이 장의동에 닥나무를 심고, 그 소출로써 조지서에서 진헌표전지를 제조하였던 것이다. 그러나 장의동 닥나무 밭의 소출만으로는 국가 수용이 부족하자, 훼철된 절터나 국유지로서 버려진 빈 터에 닥나무를 심어 그 부족분을 보충케 하였다.0581)≪世宗實錄≫권 42, 세종 10년 12월 병술. 한편 지방 각 관청도 닥나무 밭을 소유하여 자체 수용은 물론 국가에 대한 공납·진상용 등 제반 종이를 생산하였다. 이는 지방 각 읍의 닥나무 밭에 대해 대장을 작성하여 공조·본 도·본 읍에 각각 1부씩 비치하고 이를 기르게 한≪경국대전≫의 규정을 통해서도 잘 알 수있다. 이같이 조선 시대에는 닥나무 재배를 국가의 주요 정책으로 혹은 지방 수령의 주요 책무로 삼아 적극 장려함으로써, 사대교린용·서적 인쇄·저화 제조용·군수 및 민수용 등의 막대한 수용의 종이를 충당시키기 위해 노력하였다.

土宜(닥나무)읍 읍수 土貢
(종이)
읍수
합계
충청도 忠州, 丹陽, 淸風, 陰城, 堤川, 懷仁, 報恩, 公州,
定山, 恩津, 連山, 海美, 靑陽
13 35 38
경상도 寧海, 河陽, 星州, 陜川 4 48 48
전라도 珍山, 錦山, 益山, 古阜, 沃溝, 扶安, 井邑, 泰仁,
高山, 羅州, 海珍, 靈岩, 靈光, 康津, 咸平, 南平,
南原, 淳昌, 龍潭, 求禮, 任實, 長水, 鎭安, 谷城,
光陽, 長興, 潭陽, 順天, 茂珍, 寶城, 樂安, 綾城,
和順, 同福, 玉果
35 2 36
경기도 廣州 1 0 1
황해도 遂安, 白川, 兎山, 松禾 4 5 9
강원도 江陵, 襄陽, 平昌, 原州, 寧越, 橫城, 洪川, 金城,
金化, 三陟, 平海, 蔚珍, 春川, 杆城, 高城, 通川,
歙谷
17 0 17
평안도 平壤, 中和, 祥原, 三登, 江東, 順安, 甑山, 咸從,
三和, 龍岡, 安州, 成川, 肅川, 慈山, 順川, 价川,
德川, 永柔, 孟山, 殷山, 陽德, 義州, 定州, 龍川,
鐵山, 隨川, 宣川, 嘉山, 定寧, 寧邊, 博川, 泰川
32 0 32
함길도   0 0 0

<표 3>전국의 닥나무 생산지

≪世宗實錄地理志≫각 도 각 읍 土宜, 土貢條에 의함.
* 합계는 土宜·土貢條에 중복된 경우 1邑으로 계산함.

조선 초기 닥나무의 재배 생산지는 세종 14년(1432)에 편찬된≪세종실록지리지≫의 각 도 土宜條와 土貢條에서 살필 수 있는데, 그 산지 및 종이를 공납하는 읍을 간추려 보면 앞의<표 3>과 같다.

이 도표에 의하면, 각 도의 닥나무 산지수는 경기도 1읍, 충청도 13읍, 경상도 4읍, 전라도 35읍, 황해도 4읍, 강원도 17읍, 평안도 32읍이다. 그런데 경상도의 경우 닥나무 산지는 4읍인데 비해 종이를 공납하는 읍은 무려 48읍으로 기재되어 있고, 반면에 전라도의 경우 닥나무 산지는 35읍인 데 비해 종이를 공납하는 읍은 전주와 남원 2읍만 기록되어 있어 이해하기가 곤란하다. 그러나 경상도의 경우 “嶠南楮竹之鄕”0582)≪楮竹田事實≫(정조 18년) 갑인 5월 초 5일. 또는 “兩南 지방을 지나 가면 도처에 楮田이 경작되어 닥나무가 재배되고 있다”0583)≪楮竹田事實≫(정조 17년) 계축 12월 17일.는 등과 같은 각종 사료를 통해서 볼 때, 영해·하양 등 土宜 4읍은 닥나무 생산이 가장 풍부한 대표적인 읍임을 나타낼 뿐이며 나머지 종이를 공납하는 읍도 역시 닥나무 산지라는 것을 미루어 짐작할 수 있다. 이와 같이 생각한다면, 경상도의 닥나무 산지는 48읍이 된다. 조선 후기 정조 때 편찬된≪楮竹田事實≫충청도 관계 기록에 의하면, 닥나무 밭을 소유하고 있는 읍은 공주·한산 등 44읍이다.≪세종실록지리지≫충청도의 닥나무 생산 읍과 종이 공납 읍을 합하면 총 48읍인데, 이 중 중복된 읍을 1읍으로 계산하여 10읍을 제외하면 38읍으로≪저죽전사실≫의 닥나무 밭 소유 읍인 44읍과 대략 일치한다. 그리고 전라도 전주의 경우, 土貢條에는 종이가 기록되어 있으나 土宜條에는 닥나무가 기록되어 있지 않다. 그러나≪저죽전사실≫에 의하면 전주의 상관면·소양면·구이동면이 닥나무 산지로 기록되어 있는 점으로 보아0584)≪楮竹田事實≫(정조 18년) 갑인 11월 27일. 전주 역시 닥나무 산지였음을 알 수 있다.

이상과 같은 분석을 토대로 한다면,≪세종실록지리지≫의 토의조는 기록의 오류라기보다는 종이를 공납하는 읍이 곧 닥나무 토산 읍이라는 혼효된 동일의식 속에서 기록된 것이 아닌가 한다. 다만 닥나무 산지로 기재된 읍은 그 재배가 보다 성행했던 읍이라 할 수 있다. 따라서 조선 초기의 닥나무 생산읍은 앞의<표 3>에서 보는 것과 같이 경기도 1읍, 충청도 38읍, 경상도 48읍, 전라도 36읍, 황해도 9읍, 강원도 17읍, 평안도 32읍이라고 추측된다.

이상과 같이 닥나무 산지가 전국적으로 광범위하게 산재되어 있었으나, 국가의 수요에 비해 그 생산은 부족한 편이었다. 그 이유는 국가의 수탈, 과중한 공납, 紙役의 부담 등으로 그 재배를 꺼리는 경우가 많았기 때문이다. 따라서 국가는 그 재배 및 생산을 늘리기 위해 이를 수령 7事 중의 1조로 삼아 고과의 대상으로 삼았으며, 또한 조정에서는 닥나무 밭에 대한 면세의 논의가 일어나기도 하였다. 그러나 이러한 노력에도 불구하고 국가의 수요를 충족시킬 만큼의 닥이 생산되지 않자, 그 부족을 대체하기 위해 삼·뽕나무·버드나무·대잎·솔잎·부들·짚 등을 닥과 혼합하여 각종 종이를 만들어 사용하였다.

그리고 원료의 부족을 타개하고 또한 종이의 품질을 향상시키기 위해, 국가에서는 일본산 닥나무(倭楮)를 보급하여 그 재배를 장려하였다. 즉 세종 12년(1430)에는 대마도에 사람을 파견하여 일본 닥나무를 구해 오게 하였다. 일본 닥나무는 그 뿌리를 가져 오는 수도 있었으나 이 경우 말라 죽기 쉽기 때문에, 주로 종자를 구해 와서 심는 것이 보통이었다. 세종 때에는 바다 기운이 있닿는 강화도, 충청도 태안, 전라도 진도, 경상도의 하동·남해·동래 등지에 닥나무 종자를 나누어 주고 심게 하였으며, 매년 여름과 가을에 그 생육 상태를 중앙에 보고하도록 하였다.0585)≪世宗實錄≫권 84, 세종 21년 정월 임진 및 권 65, 세종 16년 8월 정미.

그러나 일본 닥나무에 대한 국가의 지대한 관심과 적극적인 재배 장려책도 역시 큰 효과가 없었다. 즉 이전에 국가에서 종자를 나누어 주고 재배하도록 한 지역의 일본 닥나무가 거의 멸종의 처지에 있거나 혹은 재배 상태가 좋지 못하였는데, 그 이유로 연변 수령의 무관심을 들었다. 따라서 세종 29년(1447)에는 다시 그 종자를 전라도·경산도 등 연변의 수령들에게 보내어 각 관의 바닷가에 위치하고 있는 園圃에 심게 하고, 파종에서 생장에 이르기까지의 상태를 일일이 기록하여 보고하도록 하였다. 단종 즉위년(1452)에는 연변 수령으로 하여금 閑曠地를 택하여 일본 닥나무를 재배하게 하되 牧官·대도호부는 1결 50부, 도호부·地官은 1격, 縣官은 50부씩 심어 재배케 하고, 관찰사가 그 재배 상태 및 수령의 관심 여부 등을 조사하여 성적이 나쁜 수령은 출척케 하는 등 보다 강경한 대응책을 강구하였다. 세조 때에도 역시 전라도 영광 기슭의 일본 닥나무 생산지에 대해 그 주수를 관찰사가 직접 조사하여 보고하게 하고, 또한 看守人을 두어 보호하게 하는 등0586)≪世祖實錄≫권 29, 세조 8년 12월 임인. 일본 닥나무에 대한 국가의 관심은 각별한 것이었다.

이같이 수 차례에 걸친 조정의 논의와 국왕의 장려책 및 처벌 규정 등에도 불구하고 일본 닥나무가 널리 재배되지 못한 이유는, 풍토의 부적합성에 기인한다기보다는 오히려 관청의 수탈, 국가의 과중한 공납, 방납의 페단에 따른 민간의 재배 기피 현상에 있다고 하겠다. 세조 때 승려 信云이 전라도 영광 時兒島에 일본 닥나무가 자라고 있다는 사실을 관찰사에게 보고하자, 영광 郡事는 군민을 번거롭게 하고 소요시켰다는 이유로 그를 섬에 가두고 大杖을 가하여 죽음의 지경에 이르게 했다는0587)≪世祖實錄≫권 25, 세조 7년 8월 정해. 사실에서도 닥나무 재배 기피현상을 충분히 짐작하고도 남음이 있다.

국초에는 국가에 필요한 종이를 각 도에서 매년 상납하는 공물로써 충당하였다. 그러나 점차 국가 기관이 정비·확충되고 문화가 발달되며 외교 관계도 원활해지게 됨에 따라, 종이의 수요도 점증하여 양질의 종이를 일정한 장소에서 대량으로 생산해야 할 필요성이 커지게 되었다. 이같은 필요에 부응하여 서울에 설치된 관영 제지업장이 곧 조지소이다.

먼저 조지소의 설치 경위부터 살펴보자. 조지소가 최초로 설치된 것은 태종 15년(1415)으로, 그 직접적인 계기가 된 것은 태종 때 발행된 저화용 종이를 생산하기 위한 것이었다. 즉 저화용 종이는 원래 각 도에 分定하여 제조·상납하게 하였는데, 그 품질의 好惡·厚薄 등이 같지 않아 백성들이 두꺼운 종이의 저화만을 선호하는 등의 폐단이 생기자, 서울의 일정한 장소에서 균일한 품질의 종이를 제조할 목적에서 조지소를 설치하였다. 저화의 원료는 민폐를 없애기 위하여 官楮田에서 생산되는 닥과 각 도에서 상납하는 休紙를 이용하였다. 그러나 저화 통용정책이 실패로 돌아가자, 조지소는 이제 저화용 종이의 생산보다는 사대교린용 表箋·咨文紙와 기타 국용의 각종 종이를 생산하는 기구로 기능이 전환되었다. 그 중에서도 사대 교린용 표전·자문지를 제조하는 것이 가장 주요한 임무였다.

세종 때에는 국왕의 好佛에 기인한 刊經과 다량의 서적을 빈번히 간행함으로 인하여 조지소의 기능은 점차 확대되어, 표전·자문지 이외에도 佛經紙와 竹葉紙·松葉紙·蒿節紙·蒲節紙·麻骨紙·純倭紙·薏苡紙 등과 같은 冊紙를 제조하기에 이르렀다. 그리고 조지소의 제지 기술도 점차 향상되어, 이의 신설 당시만 해도 전라도 남원·전주에서 생산되는 종이의 품질에 미치지 못했지만, 세종 때 이르러서는 그 품질이 지극히 양호해져 이제 이들 지역의 종이를 사용하지 않을 정도가 되었다.0588)≪世宗實錄≫권 49, 세종 12년 9월 기유. 즉 이전에는 전주·남원에서 생산된 표전·자문지와 奏啓紙를 歲貢으로 상납케 하여 국가의 수요에 충당하였으나, 이제 조지소에서 지극히 양호한 품질의 종이를 생산케 됨으로 이들 두 지역이 공납에 따른 폐단을 비로소 줄일 수 있게 되었다는 것이다.0589)≪世宗實錄地理志≫권 148, 京都 漢城府 造紙所. 따라서 세종 때에 조지소는 명실상부하게 국가에서 최고 품질의 종이를 제조하는 곳으로 성장·발전하게 되었다. 조지소의 기술 향상과 중요성이 증대되면서, 표전·자문지는 오로지 이곳에서 생산되는 것만을 사용하게 되었다. 그러자 도련하는 데 막대한 工役이 소모되는 등 그 폐단이 커지게 되자, 문종 때에는 다시 그 일부를 하 3도에 分定시켜 세공으로 상납케 하는 것을 恒式으로 삼았다.0590)≪文宗實錄≫권 3, 문종 즉위년 9월 신축 및 권 5, 문종 즉위년 12월 갑술.

이같이 조지서의 기능이 확대되고 운영 업무가 방대해짐에 따라, 세종 13년(1431)에는 提擧 1인을 加設하고 提調 1인을 설치하였다. 이어서 역시 동왕 13년에 사무가 번잡하다는 이유로 別坐 1인을 가설하고 주자소 預差書員 4인을 가설하여 조지소에서 근무하게 하였다. 문종 2년(1452)의 冗官汰去 때 別坐 4인 중 1인이 감원되었다. 세조 12년(1466)의 관계 개혁 때, 조지소를 조지서로 개칭하고 종6품의 司紙 1인을 배정하였다. 이같이 수차례에 걸친 관리수의 증감 결과, 성종 때 완간된≪경국대전≫에 조지서는 경관직 6품 아문으로서 提調 2인, 종6품의 司紙 1인·別提 4인, 잡직으로서 工造 4인·工作 2인을 두고, 공장으로서 木匠 2인·廉匠 8인·紙匠 81인 및 기타 잡역부로서 差備奴 90인·根隨奴 5인을 예속시켰다.

특별한 기술과 겸험 및 자격을 요하는 관직은 임기에 구애받지 않고 오랫동안 재임케 하는「久任制」가 있었는데, 이 제도는 주로 기술계의 직위를 전문화시킴으로써 행정의 능률을 향상시키기 위한 것이 주된 목적이었다. 세조 때 조지소의 別坐 1인을「久任官」으로 정하여 제지 기술과 능률의 향상을 도모하기도 하였다.

조지서 紙匠들도 타 장인들과 마찬가지로 잡직으로서 체아직을 받고 있었다. 사섬시·조지서·교서관 3관청을 합쳐서 工造 4명·工作 2명의 체아직이 배정되어 있었는데, 이 중 조지서 장인 체아직으로서의 공조 4명과 3관청이 협의해서 번갈아 授職하는 이른바「和會遞兒授職」으로서의 공작 2명이 있었다. 일반 장인 출신의 잡직 요원들은 2番으로 나누어 입사하고 입사한 지 900일이 되면 加階하도록 되어 있었으나, 다만 尙衣院 綾羅匠과 조지서의 紙匠만은 3번으로 분번하여 입사일 600일에 加階하도록 우대받고 있었다. 기타 조지서에 배치되어 있는 90명의 差備奴는 紙匠의 조역을 담당하고 있었는데, 이들은 京奴로써 충당하며 부족할 때에는 選上奴로써 보충하였다.

지장은 조지서(81명)·교서관(4명)에 소속되어 있는 85명의 京工匠과 경상도(265명)·전라도(237명)·충청도(131명)·황해도(39명)·강원도(33명) 순으로 5도에 걸쳐 총 705명의 外工匠으로 구성되어 있다. 외공장으로서 비교적 많은 지장을 보유하고 있었던 읍은 전라도의 전주(23명)·남원(23명)과 경상도의 밀양(17명) 등이다. 기타 읍은 10명 이하의 지장을 보유하고 있었다. 이들 지장은 입역의 대가로 紙匠田을 지급받아 생계를 유지하였다. 그러나 세종 27년(1445)에 紙匠位田이 혁파되자, 당번 때에는 입역이 대가로 朔料月俸을 지급받았고, 비번 때에는 자신의 작업장에서 종이를 제조하여 생계를 유지하였다.

조선 초기 지장의 신분은 대부분 공청이었으며, 이들은 60세가 되면 면역되었다. 기타 양인을 비롯하여 入番人吏·日守·관노비·군인·승려 등도 종종 地役에 동원되어 사역되었다. 그리고「徒年定役」이라 하여 徒罪를 범한자를 조지서 擣砧役에 배정하여 사역시켰는데, 세종을 전후하여 이것이 입법화되고 세조·성종대에 이르기까지 계속 관행화되고 있었던 듯하다.

개요
팝업창 닫기
책목차 글자확대 글자축소 이전페이지 다음페이지 페이지상단이동 오류신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