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신편 한국사
  • 조선 시대
  • 24권  조선 초기의 경제구조
  • Ⅲ. 각 부문별 수공업과 생산업
  • 4. 조선업
  • 4) 조선기술의 발달
  • (1) 중국식 조선법의 시도

(1) 중국식 조선법의 시도

조선은 왜구를 해상에서 무찌르는 고려 말기의 전략을 그대로 답습하여 태조·태종 등 역대 임금이 수군과 군선의 정비·강화에 부심하여 세종대에는 막강한 수군의 세력과 군선의 척수를 보유하기에 이르렀다. 당대 수군의 선척은 앞의<표 2>에서 보는 바와 같이 大船·中大船·中船·兵船·快船 등 13종 829척에 달했다.

그런데 이들 군선은 왜구가 한창 극성하던 고려의 공민왕과 우왕대에 수군활동을 재개하며 건조하기 시작하여 조선조에 들어서 그 초기에 이르기까지 불과 수십 년 동안에 급작스럽게 건조·보강된 것으로서 선박구조의 규격이 없고 선형도 통일되지 않는 등 결함이 많았다.

그러므로 태종·세종대에 왜구의 진압이 일단락되자 군선의 각종 결함이 지적되면서 그 개량이 적극적으로 모색되기에 이르렀다. 예를 들면 세종 12년(1430)의 기록에 다음과 같은 구절이 있다. “중국 강남, 유구[沖繩], 일본 등 여러 나라의 배는 모두 鐵釘을 쓰고 여러 날 걸려 건조되므로 堅緻하고 경쾌하여 여러 달 바다에 떠 있어도 물이 새지 않고 큰 바람을 만날지라도 깨지지 않아 20∼30년을 쓸 수 있다. 그런데 우리나라의 병선은 나무못을 쓰고, 또한 급속히 건조되므로 튼튼하고 경쾌할 수가 없어 8∼9년도 못가서 벌써 파손이 되고 헐어져 보수를 일삼게 되므로 선재인 소나무가 견뎌내기 어려워 그 폐단이 크다. 그러므로 이제부터 다른 나라의 조선 예에 따라 서둘지 말고 철정으로 꾸며 배가 견치하고 빠를 수 있도록 하자”는 것이다.0648)≪世宗實錄≫권 48, 세종 12년 5월 무오.

또 같은 무렵에 다음과 같은 기록도 있다. 즉 “각 포의 군선은 모두 마르지 않은 송판으로 나무못을 써서 만들어 풍랑을 만나면 이은 자리가 쉽게 해이되므로 틈새가 많이 생기고 물이 새어 습해지므로 빨리 썩어버려 7∼8년을 견디지 못하고 또 새로 배를 만들게 되니 연변의 소나무가 거의 다 떨어져서 장차 계속되기가 어려운 바, 중국선은 역시 소나무를 써서 조선을 하는데 가히 20∼30년을 쓰고 있은 즉, 청컨대 중국선의 船制에 따라 철정을 쓰고 판자에 석회를 바르고 또 괴목을 쓰고 판자를 겹붙여 배를 만들어 시험을 하자”는 내용이다.0649)≪世宗實錄≫권 48, 세종 12년 5월 계해.

여기에서 지적된 한선의 결함은 마르지 않은 소나무 재료를 가지고 나무못을 써서 서둘러 건조하므로 배의 속력이 나지 않고 접합 고착한 부분이 취약하여 배의 수명이 짧다는 것으로 요약이 된다.

그런 논란이 있은 지 4년이 지난 세종 16년(1434)에는 또 다음과 같은 기록이 나타난다. 즉 “의정부와 6조가 모두 전함이 빠르고 느린 데 대하여 왕에게 상주하기를 세종 13년 경강에서 만든 冬字 甲船이 중간 정도로 빠른데 하체에는 철장과 목정을 절반씩, 그리고 상장에는 모두 철정을 써서 철이 1,800근 들었습니다. 우의정 崔閏德이 아뢰기를 채택할 만합니다. 금년 가을 경강에서 司水色이 만든 往字 甲船이 가장 빠른데 하체에는 철정과 목정을 절반씩, 그리고 상장에는 모두 철정을 써서 철이 모두 1,900근 1량이 들었습니다. 의정부와 6조가 모두 아뢰기를 채택할 만합니다. 금년 봄 유구의 선장이 만든 月字 甲船이 제일 빠르지 못한데 상장과 하체에 모두 철정을 써서 철이 3,352근 1량이 들었습니다. 왕이 병조에 명하기를 금후 각 도 각 포의 전선은 冬字와 往字 시험선을 본받아 만들도록 하고, 유구의 선장이 만든 月字船이 비록 그 상장이 전함에는 맞지 않아도 그 하체가 견실하여 그 공법을 취할 만한 즉 그것 역시 본받도록 각 도에 이첩하라고 했다”0650)≪世宗實錄≫권 65, 세종 16년 9월 정유.는 것이다.

이 기록은 세종 12년부터 거론되어 온 船制 개혁의 의도가 그 후 여러 나라의 배를 시험적으로 만들어 시험해 본 결과 결국 세종 16년에 이르러 중국의 조선법을 채택하게 된 경위를 말한 것이다.

여기서 甲船(甲造船 또는 甲造法)이란 한국 사서에서 중국 강남의 尖底船을 두고 한 말이다. 그 조선법은 외판을 접붙인다(板疊造)는 데서 나온 이름이다. 이에 대하여 한국 재래의 韓船과 그 구조법은 외판을 외껍질로 單板을 쓴다 해서 單造船 또는 單造法이라 했다.

세종 16년 이상과 같이 신중한 연구와 시험 끝에 전국의 군선을 중국의 甲造法에 따라 건조키로 하였는데, 그것은 고려 이후로 전해져 내려온 한선구조의 平底船을 버리고 중국 강남의 조선법에 따른 尖底型船을 채택하기로 한 일대 전환이었다. 그러나 그같은 시도는 오래 가지 못하고 전통적인 한선으로 복귀하게 되었다. 곧 문종 원년(1451)에 다음과 같은 기록이 보인다.

의정부가 병조에서 제공한 바에 따라 왕에게 아뢰기를 ‘지금 사람을 경기·충청·전라의 3도에 파견하여 군선을 甲造와 單造로 하는 이해 장단을 물었습니다. 그 甲造船은 과연 유능한 배목수가 중국의 선제에 따라 정교하게 만들면 물 안의 벌레가 나무를 먹을 수 없으며 선체가 튼튼하고 깨지지 않아 정말 유익합니다. 그런데 지금 서투른 배목수를 써서 법에 따르지 않고 배를 건조하므로 겨우 15년이 지나고 혹은 13∼14년이 못되어 이미 썩기에 이르고 공로는 두 배가 들어서 도리어 單造의 이득에 미치지 못합니다. 그 單造船은 물자가 많이 들지 않고 또한 깨진다 하더라도 보수를 가하면 수십 년을 견디어 내며 또 그 上粧은 조운에도 쓸 수가 있어서 정말 무궁한 이득이 있습니다. 청컨대, 금후로는 제도의 군선을 甲造로 하지 말고 모두 單造로 하도록 정해 주십시오’라고 하니, 왕이 그대로 따랐다(≪文宗實錄≫권 8, 문종 원년 6월 기묘).

이것은 세종 16년(1434)에 중국의 조선법에 따르기로 하였던 결정을 그 17년 후인 문종 원년(1451)에 다시 전통적인 조선법인 한선구조로 되돌아오게 번복한 사실을 말해준다. 그런데 여기에서는 중국의 선제를 포기한 이유를 두 가지 들고 있다. 그 하나는 유능한 배목수를 얻기 어려워 제대로 배를 만들지 못한다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單造船도 잘만 만들면 甲造船 못지않게 오래 사용할 수 있다는 것이다.

그러나 그 첫 번째 이유는 그 전에도 甲造船은 사람들이 모두 싫어했다는 기록이 있는 것 등으로 미루어 단지 구실에 지나지 않는 것으로 보인다. 두 번째의 경우 “單造船도 修補만 잘 하면 수십 년을 쓸 수 있다”는 구절은 매우 중요한 몇 가지 사실을 시사하고 있다. 당초 태종·세종대에는 여러 방면으로 군선의 체질 개선을 도모하면서 군선의 點檢法을 마련하고, 배밑에 石灰를 도포하고 또 선저를 불로 그을려 충해를 방지하는 煙薰法을 엄히 하는 한편 일정한 기간 동안 배를 쓰고 나서 묵은 나무못을 일체 갈아버리는 改槊을 실시케 하는 등, 선체의 유지 보수의 개량 방법을 확립해 보고자 노력을 해왔던 것이다. 그러므로 그런 여러 가지 방법의 효과를 믿고 갑조선을 버리고 전통적인 단조선으로 복귀할 수 있었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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