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신편 한국사
  • 조선 시대
  • 24권  조선 초기의 경제구조
  • Ⅳ. 국가재정
  • 8. 역
  • 4) 신역의 포납화

4) 신역의 포납화

신역으로서의 군역 이외에 戶役으로서의 요역이 있었다 함은 전술한 바 있거니와, 보법 실시 이후 군역과 요역은 그 구별이 거의 무의미하게 되고 말았다. 그것은 보법 이후 모든 인정이 군역에 충당되었으므로 요역의 대상자를 따로 파악한다 할지라도 그 대상자는 노약자밖에 남아 있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그러므로 점차 번상·입번하는 군사가 토목·영선 등에 대거 동원되어 군역의 요역화 현상이 일어났다. 군역의 요역화는, 국가가 국민들의 노동력을 과도하게 파악한 데 그 근본원인이 있었다.

그리하여 군역과 요역의 양립은 무의미하게 되었으며, 역을 부담하는 자에게는 이중적인 것이었다. 요역 동원으로 군역 의무가 없어진 것이 아니기 때문에 군역에 일정한 대가를 바치고 방면된 다음에도 다시 요역에 동원되는 것이었다.

당시 정규병력 약 15만 명 중에 의무병종인 정병과 수군이 약 12만 명으로 그들은 대부분 양인농민이었다. 정병은 戶首 1丁에 保人 2丁, 수군은 호수 1정에 보인 3정으로 각 군호 단위는 생계를 위한 농업노동력까지 감안한다면 이중적인 역의 부담은 고통스러운 것이었다. 이에 최소한의 농업노동력을 확보하기 위한 수단으로 군사의 자의에 의하여 雇人에게 대가를 지불하고 대신 입역케 하는 소위 代立의 현상이 일어났다. 그러나 이 대립도 점차 강제적 성격이 짙어감에 따라 대립 자체가 가중한 부담이 되어 갔다.

번상의 대립은 조역가를 公定化하였다. 보인은 정군의 번상에 그 경비를 조달해야 할 의무가 있었고, 그 경비는 당초에 양식으로 바쳤으나 점차 면포로 바뀌어 갔다. 보법의 실시 이전에는 호수와 봉족의 관계가 그다지 각박하지 않았고, 조역가도 정해 있지 않았다. 보법의 실시 이후 정군과 보인은 각자의 생활권을 위협당하였고, 자신의 생활권조차 위협을 받게 된 정군은 자기에게 배정된 보인으로부터 무리한 부담을 요구하게 되었다.

이러한 상황 변화는 조역가의 책정을 불가피하게 하였고, 예종 원년에 비로소 조역가가 책정되었다. 그 규정에는 역가의 납부로서 보인의 임무 수행을 원하는 자에 한하여, 가까운 道의 3日程은 포 2필, 먼 도는 4필로 하며, 그 이상 보인으로부터 포를 함부로 징수하면 보인의 신고에 의해 처벌토록 하였다.0836)≪睿宗實錄≫권 4, 예종 원년 3월 갑오. 그 후≪경국대전≫병전 급보조에서는 “조역가는 1인당 매월 면포 1필을 초과할 수 없다”라고 개정되었다. 이 규정은 예종 때의 규정에 비하여 보인의 부담이 줄어 들게 한 것이다.

조역가가 책정되던 시기에 이미 번상병의 대립 현상도 일어나고 있었다. 즉 번상병은 보인으로부터 받은 조역가로 타인을 고용하여 대립케 하고 자신은 귀향하는 것이었다. 대립의 원인은 보법 실시 이후 국역 담당자가 부족한 농업노동력을 위하여 대립 방법을 취하거나, 혹은 번상하여 군사활동이 아닌 토목공사 등 가혹한 노동에서 벗어나고자 하였기 때문이다. 세조 때 군액이 확장된 이후 번상병이 증가함에 따라 서울의 미곡가격이 등귀하여 번상병이 일정한 조역가만으로 서울에 오래 머물러 있을 수 없었다.0837)≪成宗實錄≫권 1, 성종 즉위년 12월 계축. 이에 번상병은 책정된 군역가보다 많이 남징하게 되고, 그 조역가로서 서울에 사는 雇人에게 지불하여 대립케 하였다.

위와 같이 당초에는 번상병의 편의에 따라 대립이 시작되었으나 뒤에는 각사 吏胥·奴僕들의 강제적인 代立 요구로 변해 갔고, 부분적인 현상에서 전면적인 현상으로 확대되어 국가에서 대립을 공인하게 되었다. 성종 말 경에는 이미 각사의 이서·노복이 번상병에게 대립을 강요하는 경향으로 바뀌고 있었다. 각사의 이서·노복은 번상병으로부터 고액의 代立價를 받아「退立」의 명목으로 조작하거나 서울의 한산인과 결탁하여 그들을 대립시켜 중간이익을 취하였다.

관속인 이서·노복이 강제로 고액 대립가를 요구하여 결과적으로 保人이 도망하거나 유리하게 되었고, 보인이 유리하자 정군 혼자서 대립가를 마련하다가 정군마저 감당치 못하여 도망하였다. 도망하여 絶戶된 군역의 대립가는 그 일족 또는 가까운 이웃에게 전가되어 남아 있는 군호조차 도망하는 연쇄적 현상이 일어났다. 이렇게 군호가 도망하면 군적은 공허한 대장이 되고 말았으나 代立價의 징수는 여전히 군적에 의하여 징수되었다. 대립가는 풍년·흉년에 따른 곡가의 변동과 면포의 생산량에 따라 유동적이었지만 성종 24년에는 대립가 1朔番價가 5승포 8∼9필이나 되었기 때문에 국가는 공식적으로 5승포 3필만 받도록 책정하였다.0838)韓國軍事硏究院,≪韓國軍制史-近世朝鮮前期篇-≫(陸軍士官學校, 1968), 243쪽. 중종 때에 이르면 1삭번가는 훨씬 고액으로 징수되고, 대립가의 징수 절차에 새로운 방식을 채택하게 된 상황에 대하여는 후술할 것이다.

한편 각 지방 진관의 留防正兵이나 각 浦의 수군에는 방군수포가 널리 행해졌다. 성종 6년의 군액 통계에 의하면 정병 72,109명, 수군 48,800명인데, 정병 중에 번상정병의 27,620명, 유방정병이 44,484명이었으므로0839)≪成宗實錄≫권 59, 성종 6년 9월 갑인. 수군과 유방정병의 합계 93,284명은 지방군에 해당된다. 지방군에게는 일찍부터 방군수포의 현상이 일어나고 있었다. 세종 때부터 지방군의 代役현상이 나타났고, 문종 때에 선군 즉 수군의 경우에 입번하지 않으면 月令이라 하여 매월 포 3필 또는 미 9두를 징수한 바 있다.0840)≪文宗實錄≫권 4, 문종 즉위년 10월 경진.

지방군의 방군수포는 당초에 군사의 편의를 위한 것이었으나 점차 지휘관의 私利를 위해 강요되었다. 그러한 한 원인으로서 당시의 僉使와 萬戶에게는 녹봉이 없었다는 점을 들 수 있다. 따라서 그들은 모든 경비를 사졸로부터 거둬들여야 했고, 결국 탄핵의 대상으로 지탄받았던 것이다.0841)李珥는 그의≪萬言封事≫에서 軍政개혁의 여러 조항 중에 지방의 放軍收布에 대하여 言及하고 그 원인을 제도적 결함에서 찾았으니, 즉 兵使·水使·僉使·萬戶·權管 등의 관직은 祿俸制가 마련되어 있지 않아 士卒들로부터 모든 경비를 取辦하게 되었다 하였다(≪栗谷全書≫권 5, 疏剳 2, 萬言封事). 그러므로 첨사·만호에게 녹봉을 제정해 주어야 한다는 논의도 있었고, 때로는 첨사·만호의 자질이 논의되기도 하였다.0842)≪成宗實錄≫권 3, 성종 원년 2월 신미 및 권 29, 성종 4년 4월 을유. 그리고 지방군에 대한 방군수포는 번상정병의 경우처럼 價布가 공식적으로 정해지지 않고 불법적으로 행해졌다.

<李載龒>

개요
팝업창 닫기
책목차 글자확대 글자축소 이전페이지 다음페이지 페이지상단이동 오류신고